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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기 Feb 18. 2021

72시간 단식, 그 호기로운 도전

죽겠어요


주 2회 채식을 같이 하고 있는 친구가 갑자기 72시간 단식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오늘은 나랑 카페에서 만나 이미 라떼를 마셨으니 내일부터 시작하겠다고. 이전에도 해본 적이 있는데 몸이 가벼워졌고, 당시 신경 쓰이던 원인 모를 피부 알러지 반응이 72시간 단식 후 눈에 띄게 좋아졌다고 덧붙였다.


좋은 통삼겹이었다


살면서 굳이 다른 사람이 한다고 나까지 동참할 필요는  없다고 느끼는 일들이 있다. 이를테면 패러글라이딩, 암벽등반, 파쿠르 같은 것들. 단식도 그중 하나였다. 헐리우드의 48시간 다이어트 같이 액체만 주구장창 마시는 다이어트도 물론 그중 하나. 사실 단식이라던지 헐리우드 48시간이라던지 하는 다이어트를 하기엔 스스로의 의지가 그리 대단하지 않음을 알기에 본능적으로 기피해왔던 것일 수도 있다.


야들야들 닭 목살


그런데, 2일 전 아는 동생들과 가볍게 맥주 정도나 하려고 만난 자리가 의도치 않게 다들 먹고 죽자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고, 주종도 맥주가 아닌 100% 오직 소주 순정파의 길을 걷게 되어서, 다음 날 숙취는 고사하고 왠지 몸속 장기가 다 술에 절여진 양 찌든 느낌에 그 72시간 단식이라는 것 나도 같이 하겠다고 친구에게 메세지를 보내 버렸다. 72시간 정도는 안 먹어야 온 몸 가득 퍼진 독소가 그나마 배출될 것 같았다. 아직 전날 마신 술이 채 깨지 않아 72시간이 마치 7시간인 것처럼 별 거 아니게 느껴진 것도 있었다.  


은행골의 참치 뱃살 초밥


우선 핸드폰에 단식 추적기라는 어플을 다운받았다. 전날 새벽 1시쯤 먹은 쿠키를 마지막으로, 이미 오전 11시가 넘었기 때문에 꽁으로 10시간 단식은 이룬 셈이었다. 대충 72시간 단식의 효과에 대해 찾아보니 면역력이 개선되고, 체중 감량, 체지방 감량, 세포 재생, 근육량 감소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근손실이라.. 뭐, 얻는 게 있으려면 잃는 것도 있어야겠지. 흐린 눈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호텔 라운지에서 배터지게 먹던.. 전생인가


다행히 72시간 단식을 하기로 결심한 첫날, 즉 어제는 아무 약속이 없어 하루 종일 집에만 있을 수 있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강아지랑 놀다 보니 오후 5시가 되었다. 그다지 체력이 소모되는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미친 듯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하루쯤 안 먹어도 허기가 느껴지지 않는 그런 가성비 좋은 몸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차라리 채식은 비록 고기나 만두, 핫도그 이런 것들을 못 먹을지언정 뭐라도 먹을 수는 있었는데 말이다. 무의식적으로 전날 먹다 남겨둔 칸초에 손을 뻗으려다 나는 지금 고작 과자 하나도 먹을 수 없는 처지임을, 단식이란 말 그대로 물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먹을 수 없다는 뜻임을 다시금 떠올렸다.


누구 코에 붙인 모듬 사시미


오후 7시,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내가 엄살이 심하긴 하지만, 이번엔 진짜 아픈 느낌이었다. 두통이라기보다는 그냥 띵-하게 아픈 느낌? 친구에게 나 왠지 아픈 것 같다고 하니 24시간도 안 지났는데 그럴 수 있냐며, 말 그대로 아픈 것 '같은' 거라고 너는 안 아프다고 했다. 매정한 인간. 그 말을 들으니 슬그머니 두통이 호전되었다. 단식 중 소금을 섭취하는 것은 허용된다는 글을 읽었다. 소금을 섭취하면 물 단식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전해질 불균형이 해소된다고 했다. 배고픔도 해소된다고 했다. 죽염이나 천연 소금이 좋다는데 둘 다 없어서 맛소금을 소량 찍어 먹었다. 이게 뭐라고 맛있어서 눈물이 날 뻔했고, 당연하게도 배고픔은 해소되지 않았다.


내 인생은 뉴욕피자를 알기 전과 후로 나뉜다


오후 8시, 맛있는 녀석들을 시청하기 시작했다. 왓챠라는 아주 좋은 플랫폼으로 맛있는 녀석들을 1화부터 300화까지 무제한 스트리밍 할 수 있었다. 배고파 죽기 딱 좋은 시점에 맛있는 녀석들을 틀다니. 끌리는 제목을 아무 거나 눌렀고, 서울 시내에 위치한 냉짬뽕 집이 나왔다. 평소 짬뽕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도 않는 데다 내 돈 주고 혼자 짬뽕을 시켜먹는 일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보니 마지막으로 짬뽕을 먹은 게 퇴사 전 주말 근무를 하며 동료들과 시켜먹었던 매운 짬뽕이었던 것 같은데, 단식을 하는 그 순간 냉짬뽕을 보니 진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검색으로 바로 나온 선릉에 위치해 있다는 그 냉짬뽕 식당을 별표 표시해 놓았다. 고작 별표 표시로는 이미 짬뽕에 돌아버린 나를 막을 수 없었다. 배달의 민족 어플을 실행해 짬뽕집이란 짬뽕집은 죄다 즐겨찾기에 추가했다. 흡사 짬뽕에 뇌가 조종당하는 것만 같았다. 악순환은 계속되었다. 다음 메뉴는 냉채 족발이었고, 나는 족발집들을 즐겨찾기에 추가하다 못해 네이버에 해파리냉채 만드는 레서피까지 검색하기에 이르렀다. 친구와 단식 메이트로서 서로 느끼는 감정이라던지 하는 것을 공유하기로 했는데 단식 시작 24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음식에 돌아버린 나머지 전두엽이 마비되어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 것까지는 차마 쪽팔려서 공유할 수 없었다.


Love of my life..잠시 안녕


사실 어제 아침 10시 정도에 제로콜라를 한 잔 마셨다. 칼로리가 없는 음료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단식 중 제로콜라 허용 여부에 대해 의견이 나뉜다. 고작 제로콜라 한 잔으로 단식이 깨져버린 것인가. 눈물이 차오르려 하지만 냉정히 정리해보면, 나는 지금 약 36시간째 단식을 유지 중인데 제로콜라를 마신 시점에서 다시 계산해보면 27시간째 단식을 하고 있는 셈이다. 즉, 공복 상태는 36시간째, 단식은 27시간째 유지 중. 눈물 난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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