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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기 Jan 26. 2021

시금치 카레 도전기

도대체 왜냐고요? 저도 모릅니다

  

몇 달 전부터 시금치 카레를 만들고 싶었다. 딱히 어디서 제대로 된 시금치 카레를 먹어본 적도 없으면서, 비가 주룩주룩 하염없이도 내리던 지난 여름날부터 시금치 카레가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카레에 넣을만한 이런저런 소박한 재료들을 산 뒤 마지막으로 시금치를 장바구니에 담으려는데, 오랜 장마에 채소 가격이 천정부지에 달해 시금치 한 단이 거의 6천원에 육박했다. 제철이 아닌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한 단에 6천원이라니 제 아무리 셈에 약한 나지만 이건 백번 생각해도 사먹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결론이었다. 마침 집근처 카레 전문 식당에서 시금치 카레를 팔고 있었다. 헌데 막상 사먹으려니 이게 웬 청개구리 같은 심보인지, 기어코 만들어 먹어보고 싶은 것이다. 결국 눈 딱 감고 시금치를 사러 마트에 갔다. 아, 아무리 눈을 꽉 감아도 백수 형편에 시금치 한 단 6천원은 너무했다. 결국 시금치 가격이 내릴 때까지 머릿속에서 시금치 카레라는 것을 잠깐 구석에 치워두기로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별 생각 없이 당장 필요한 식재료나 몇 개 사려고(새해 목표였던 일주일치 식량 한 번에 장보기는 아직도 글러먹었다) 들른 마트에서 시금치 뭉탱이가 1000원에 떨이 세일 중인 것을 발견했다. 내가 아무리 채소나 과일 단위를 잘 모른다고 해도 저건 한 단은 족히 넘어보였다. 연이은 약속이 잡혀있어 집밥을 해먹을 일이 향후 며칠 간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지금 저 시금치 뭉탱이를 못 본 채 지나치는 것은 시금치 카레를 갈망했던 지난날의 나를,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시금치를 보자마자 시금치 카레를 떠올리고 마는 현재의 나를 세트로 모욕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결국 못 이긴 듯 그 시금치 뭉탱이를 사버리고 말았다.     


막상 사고 집으로 돌아와 시금치 카레 레서피를 검색해보니 생각보다 요구되는 재료가 많았다. 리코타 치즈를 넣는 사람도 있었고, 휘핑크림 및 생크림은 거의 대부분 넣는 듯했다. 하지만 가끔, 어쩌다 한 번 입맛이 당기는 요리를 할 뿐인 자취생의 냉장고에 리코타 치즈 및 휘핑크림, 생크림이 있을 리가 만무한데다 그토록 원했던 시금치 카레지만 고작 카레 한 번 만들자고 부가적인 재료들을 한가득 사고 싶지 않았다. 진짜 만들고 싶은 것은 맞느냐고 묻는다면 맞긴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냉장고 재료 안에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그런 카레, 들어가는 재료는 소박한 하지만 시금치가 들어감으로 어느 정도 때깔이 그럴싸해지는 그런 카레를 원했기에, 또한 저 재료를 다 사다 넣는다고 한들 식당에서 파는 카레 뺨치는 멋드러진 시금치 카레를 내 손으로 만들어 낼 거라는 보장이 없기에 가급적 안전한 길을 택하고 싶었다.     


그렇게 시금치 뭉탱이를 산 지 3일 째. 연이은 약속들로 인해 컨디션이 바닥을 치다 못해 지하까지 뚫고 내려간 느낌이었지만 냉장고에서 만 2일을 머무른 시금치의 컨디션 역시 오늘내일해 보여 어쩔 수 없이 마트에서 양파를 사왔다. 재료는 시금치, 버터, 양파, 닭가슴살, 우유, 치즈 한 장이다.

레서피 두세 개를 참고해 내 멋대로 내 편한대로 재창조해낸 레서피는



1. 믹서로 시금치 퓨레를 만든다. 물 200ml + 시금치 한 뭉탱이 전부

2. 양파를 버터 약 15g 정도에 볶으며 카라멜라이징 한다.

3. 물 한 300ml가 끌을랑 말랑 할 때 썰어 둔 닭가슴살을 넣는다.

4. 물이 끓고 닭가슴살이 얼추 익었다 싶을 때 카라멜라이징한 양파를 넣고 마저 끓인다.

5. 카레가루를 원하는 만큼 넣고 어느 정도 더 끓인 뒤 1의 퓨레를 넣는다.

6. 우유 약간을 넣고 치즈도 한 장 넣고 섞는다.      



마지막에 우유와 치즈는 딱히 넣을 생각이 없었다. 휘핑크림도 생크림도 아닌 그냥 우유를 넣어 봤자 크게 맛이 달라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1단계부터 잘못 되었다. 나는 벌써 슬슬 맛이 가고 있는 이 시금치 뭉탱이들을 어떻게든 이번 한 번에 다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엄마가 서울에 가져다주신지 3개월도 더 된 믹서를 비장하게 꺼내들었고, 꾸역꾸역 시금치 뭉탱이의 절반 정도를 자르지 않은 채 씻기만 해서 밀어 넣으니 이게 도무지 갈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역시 한 뭉탱이를 한 번에 처리하기란 힘든 것인가 살짝 당황한 마음에 가위로 마구마구 시금치들을 자른 뒤 다시 믹서를 작동하자 어라, 생각보다 또 얘들이 쉽게 갈리는 것이 아닌가. 신나서 나머지 반 뭉태기까지 전부 다 갈아버렸는데, 태어나 처음 시금치를 갈아본 나는 시금치 한 뭉태기가 다 들어간 이 혼합물의 농도에 대해 전혀 감이란 것조차 없었다. 이 혼합물은 딱 봐도 이끼 그 비스무리한 색과 농도를 갖춘 것이 이번에 반을 쓰고 반은 얼려 또 언젠가 시금치 카레 욕구가 드는 날에 꺼내 쓰는 것이 좋을 법 해보였다. 평소의 나라면 이성적인 판단컨대 소분하기가 귀찮더라도 그리 했을 것이나, 상당한 컨디션 난조로 판단력까지 흐려진 나는 흡사 이끼덩어리 수준의 그 시금치 퓨레를 끓고 있는 카레 냄비 속에 전부 흘려보내 버렸다. 그리하여 나는 레서피에 한 단계, 즉 6번을 추가하게 된 것이다.     


시금치 한 뭉탱이가 고스란히 갈린 그 퓨레는 실로 농축된 시금치 맛이 어마어마하여 이것이 투하된 카레는 이게 본래 시금치 카레인지 시금치 미음인지 그 정체성이 불분명해져 어쩔 수 없이 조금이나마 시금치 맛이 희석되기를 바라며 우유를, 그래도 안 되어 치즈까지 넣을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 된 시금치 카레는(혹 누군가의 눈에는 여전히 이끼일 수 있지만) 목표로 했던 맛에는 어느 정도 못 미치지만 그래도 적당히 카레 맛과 시금치 맛이 조화를 이루는 와중에 치즈 맛까지 나만 알 수 있을 정도로 느껴졌기에 어차피 나 혼자 먹을 카레니까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싶었다. 다만 평소 나는 물 400ml정도를 넣어 카레를 끓이면 2-3일을 먹곤 하는데, 이번 카레엔 시금치 퓨레 만들 때 들어간 물, 카레 끓인 물, 거기에 시금치 맛 희석하고자 넣은 우유까지 적어도 액체가 600ml는 들어갔다. 한 일주일은 먹을 양이 만들어졌다. 이번 주는 공교롭게도 아주 높은 확률로 pms에 격렬히 지배당할 예정이고, 그렇기에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대부분의 음식에 유혹당할 것이다. 음식을 먹고 있어도 새로운 맛의 다른 음식을 갈망할 것이다. 과연 내가 일주일동안 시금치 카레만 먹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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