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둘과 함께 자라면서 어릴 때는 항상 과자 기근 현상을 겪었던 것 같다. 엄마가 과자를 인색하게 사주셨던 것도 아닌데 항상 돌아서면 과자가 없어지곤 했다. 삼 남매의 과자 취향이 다 같을 수도 없어, 엄마가 내가 좋아하는 과자를 사다 두시는 날은 그리 자주 오지 않았는데 어쩌다 한 번 찾아온 그 날, 그 과자 역시 하루를 채 넘기지 못하고 제일 고학년인 내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늦은 오후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기 일쑤였다. 나는 몹시 아쉬웠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정도 충분히 많은 용돈을 모아뒀다 싶은 생각이 들던 시점이 찾아왔을 때부터 나는 내 방 옷장 한편에 자그마한 공간을 마련해 내가 좋아하는 과자들을사 모아두기 시작했다. 당장 한 번에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하지만 먹고 싶을 때 언제든 먹을 수 있을 만큼.
넘치는 과자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고, 이미 가지고 있음에도 더 많은 과자를 원하게 만들었고, 가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르게 만들었다. 나는 스스로를 스포일드 키드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뭐, 일탈과 비행에 빠진 것도 아니고 고작 과자에 탐욕스러운 십 대가 되었을 뿐이었다. 아무렴 뭐 어떤가. 엄마한테 이 썩는다고 잔소리 듣는 것을 빼고는 행복한 나날이었다. 평생 먹을 군것질거리들을 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 약 7년의 시간 동안 전부 다 먹은 것 같다. 특히 멜버른에 거주할 때 내 당수치는 아마도 최고점을 찍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A4용지 반만 한 거대한 캐드버리 초콜렛(특히 큐브 형식으로 안에 카라멜이 들어있어 한 입 베어 물면 카라멜이 마치 치즈처럼 늘어나던 은혜로운 초콜렛)을 하루에 하나씩 먹어치웠다. 이 재미대가리 없는 멜버른에서 유일한 재미는 캐드버리뿐이라며 열심히도 먹었고 한국에 돌아와 왜 살이 찐 건지 궁금해했다.
캐드버리 이 미친놈..
그렇게 군것질을 탐닉하기를 7년. 나는 드디어 단 것에 질려버렸다. 예쁜 디저트를 먹으러 1시간 거리도 마다않고 지하철을 타고 달려가 눈앞에 펼쳐진 3단 트레이 디저트의 자태에 박수를 치며 꺄르륵대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전골에 소주를 때려 붓는 인간이 되었다. 가끔, 아주 가끔 초콜렛이나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긴 했지만 딱 한 입 먹으면 그만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초콜렛이 당기는 주기만큼이나 드물게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지난 금요일, 일요일까지 쓸 수 있는 배스킨라빈스 싱글 레귤러 1+1 쿠폰을 아무 생각 없이 쳐다보다가 그저께 길을 걷다 배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1500원에 행사 중임을 써붙여둔 것을 보고 굳이 그 순간 아메리카노가 마시고 싶지는 않았지만 마시지 않을 이유도 없다는 생각에 홀린 듯 가게로 들어갔고, 순식간에 결제까지 마친 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준비되길 기다리면서 무심하게 들여다본 분명 누군가에겐 매력적일 것임이 분명하지만 나에겐 그저 통에 담긴 얼린 유제품일 뿐인 아이스크림들 중 '아보카도'와 '치즈 케이크'가 동시에 적혀있는 무지막지한 아이스크림을 발견했던 것이 떠올랐다. 아보카도와 치즈케이크라니. 이것은 맛보지 않아도 아보카도의 크리미함과 치즈케이크의 꾸덕함이 장착된 어마 무시한 미친놈일 것임이 분명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게다가 내가 배스킨라빈스에서 제일 좋아하는 초콜릿칩 아이스크림과 사이좋게 위아래로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이내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 1+1 쿠폰을 그 아보카도 치즈케이크 미친놈과 초콜렛칩을 위해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언급했듯 더 이상 군것질에 돌아버린 과거의 내가 아닌, 카페에 갈 때면 거의 자동반사 수준으로 휘핑크림 많이요를 외치던 내가 아닌, 항상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주문하는, 그래서 상대가 먼저 카페에 도착해 나 대신 주문을 해 줄 때면 당연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해두고 그럼 좋다고 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뻔한 인간이 되어버린 나는 사실 싱글 레귤러 1+1을 포장하러 집을 나서기 전 고민이 되었다. 분명 두어 숟가락 떠먹고 이만하면 됐다 싶은 마음이 들 텐데 남은 아이스크림은 어쩌냔 말인가. 게다가 내가 기억하기로 싱글 레귤러 사이즈는 포장이 되지 않았다. 컵이나 콘에 아이스크림을 얹어주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작년 말 어드매였나 또 별안간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던 날 배스킨라빈스에서 싱글 레귤러 사이즈를 컵에 담아 집에 돌아와 두어 숟가락 떠먹고 락앤락에 넣어 냉장고에 넣어두고 일주일을 먹었다. 이번에도 집에 돌아와 락앤락에 옮겨 담아야겠다고, 이번에는 1+1이니까 이주일 동안 먹겠다고 생각했다가 문득 아이스크림 2개를 양 손에 들고 오기가 조금 불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차피 집에 돌아와 락앤락에 옮겨 담을 거라면 아예 처음부터 락앤락을 들고 가 담아달라고 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종이컵 쓰레기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좋았다.
동네 배스킨라빈스는 늘 사람으로 붐비던데. 챙겨 온 락앤락을 잠바 춤에서 주섬주섬 꺼내는 것이 살짝은 민망하지는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반대로 만약 내가 배스킨라빈스에서 락앤락을 꺼내며 여기에 포장해달라는 사람을 보게 되면 어떤 생각을 할까 상상해보았다. 나는 아마도 그걸 보자마자 바로 헐, 대박!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딱히 민망할 일도 아니었다. 집에 있는 락앤락 용기들을 살펴보았다. 어떤 건 싱글 레귤러 2스쿱을 담기엔 너무 커 보여서 혹시나 알바생이 나를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생각할까 봐 내려놓았고, 어떤 건 너무 작아서 자칫 쓸데없이 종이컵 1개를 써야 할 상황이 올 것 같아 내려놓았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대략 높이 7cm 정도의 락앤락으로 정하고 집을 나섰다.
아침 댓바람부터 아이스크림을 먹으려는 사람은 그닥 없는 건지 손님이 한 명 밖에 없었다. 쿠폰을 사용하기 위해 키오스크가 아닌 알바생에게 직접 주문을 했다. 키오스크로도 쿠폰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차피 락앤락에 담아달라는 말을 할 거라면 알바생에게 직접 주문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싱글 레귤러 2개 주문을 마치고 가방에서 주섬주섬 락앤락을 꺼내 혹시 여기에 담아주실 수 있냐 물었다. 알바생은 흔쾌히 그럼요! 주세요! 했다. 사이즈가 너무 딱 맞아서 스쿱이 동그란 모양으로 예쁘게 담기지 않을 것 같은데 괜찮으시냐고 묻는다. 어차피 먹어버릴 것 당연히 괜찮다고 했다. 난 진짜 괜찮은데, 사이즈가 안 맞아 담기 힘들다면 양을 덜 줘도 괜찮은데 자꾸만 둥글게 예쁘게 담으려 알바생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보였다. 예쁘게 담아주실 필요 전혀 없고 잘 안 담기면 양 조금 덜 주셔도 된다고 외쳤다. 그럼에도 알바생은 열심이었다. 심미적인 것에 어느 정도 의미를 두는 성격인가 보다.
아이스크림 두 스쿱으로 가득 찬 락앤락을 받아 들고 집에 돌아왔다. 배스킨라빈스에 락앤락을 들고 가긴 또 처음이라, 괜스레 기념 삼아 사진을 찍었다. 역시 아보카도와 치즈케이크가 들어간 그 아이스크림은 예상한 만큼 꾸덕하고 달달하고 크리미한 미친놈이었다. 두어 숟가락을 더 떠먹고 뚜껑을 닫아 냉동실에 넣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