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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기 Dec 31. 2022

마약 카르텔의 도시인 줄로만 알았던 마닐라 여행 4

셋째 날, 사실상 마지막 날은 마닐라에서 나름 핫하다는 because coffee에서 시작했다. 아직은 태양이 작열하기 전의 아침, 우리는 카페까지 총총 걸어갔다. 가는 길에 드립다 큰 장총을 맨 가드를 만났다. 앞서 동생 남친이 쟤네들 장총 들고만 있지 실제 상황이 발생하면 총 버리고 도망갈 거라고 해서 그깟 장총 따위 전혀 무섭지 않을 줄 알았으나 총은 총이었다. 나는 또 쫄아서 장총을 만지작거리며 인사를 건네는 가드를 피해 카페 안으로 도망 아닌 도망을 쳤다. 아마도 플랫화이트를 시켰던 것 같다. 동생과 동생 남친은 그 카페에 여러 번 가 봐서인지 전문가처럼 주문을 했다. 사실 우리는 (입는) 망고에 가려고 했다. 한국에도 있지만 우리 집에선 먼 망고이기 때문에. 그런데 막상 망고에 가 보니 영업시간이 구글 맵에 등록된 영업시간 보다 1시간이 늦었고 그래서 생각지 않게 카페에 가게 된 것이었다. 난 플랫화이트와 라떼의 차이를 잘 알지 못한다. 늘 그렇듯, 그냥 플랫 화이트라는 이름이 더 예쁘니까 라떼를 두고 플랫화이트를 주문했다. 라맛이 났다.


전날 밤 우리는 독일식 맥주 가게에서 맥주를 마셨다.  동생 나의 짧은 마닐라 일정에 대해 못내 아쉬워했다. 나의 한국행 비행이 원래는 넷째 날 저녁이었는데, 여행을 얼마 앞두고 항공사 측에서 갑작스레 넷째 날 정오 비행으로 바뀐 일정을 통보했다. 원하면 정오 비행기 탑승하고 원치 않으면 취소하라는 식의 통보. 나는 어쩔 수 없이 정오 비행기 일정을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여행 일정이 4일에서 3일로 줄어들게 되어 우리는 당초 동생이 계획했던 마닐라 근교 여행을 가기에 일정이 상당히 애매해져 결국 마닐라에만 머물게 되었다. 동생은 오로지 마닐라에만 있기에 3일은 너무 길다며, 더 이상 날 데려갈만한 데가 없다고 했다. 마닐라 내에서 구경할 곳은 대부분 쇼핑몰, 카페, 음식점이 전부라 웬만하면 근교 여행을 갔어야 했다며. 이때 동생 남친이 갑작스레 셋째 날 호캉스를 제안했다. 근교 여행만큼은 못하겠지만 수영장 있는 호텔에서 동생이랑 즐겁게 놀다 가라며. 이 섬세함 뭐지, 라임즙 짜기 기술에 이어 동생이 동생 남친에게 반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속전속결로 그 자리에서 단숨에 호텔 예약을 마쳤다. 예약하는 과정에서 동생 남친이 최저가를 검색해보려다 세금 불포함 부분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채 예약을 했는데, 결제까지 하고 보니 불포함된 그 세금이 무려 객실가보다 높이 책정된 채 결제된 것을 알게 되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황당하고 억울했고 괜히 나 때문에 동생네가 안 써도 될 돈을 쓴 것 같아 너무너무 미안했다. 호텔 세금 눈탱이 맞은 만큼 체크인 후 더 재밌게 놀고 조식도 더욱 전투적으로 먹자며 동생과 결의를 다졌다.


커피를 다 마시고 망고는 웬 망고냐 팀호완에서 점심을 먹은 뒤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 입국에 필수사항이었던 pcr검사를 한 뒤 호텔 체크인을 하기로 했다. 팀호완은 거의 10년 전쯤 동생과 함께한 홍콩 여행에서 처음 가보았다. 시 10대 후반, 20대 초반이었던 우리는 딤섬을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데 이렇게 불친절하게 철저히 중국어로만 적힌 메뉴판을 준다고?싶었던 팀호완에서 중국어 메뉴판을 들여다봐도 도통 알 수가 없었기에 옆 테이블이 시킨 메뉴를 가리키며 이거 달라, 저거 달라해서 우리가 무엇을 시킨 건지 이름조차 알 수가 없었는데 스팀을 퐁퐁 뿜으며 테이블에 놓여진 뽀얀 딤섬들을 입에 넣는 순간 나와 동생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만두라니. 그때의 좋은 기억을 되새기며 도착한 팀호완은 여전히 역시 팀호완이었다. 주문한 모든 메뉴가 맛있어 버리는 것. 얼마나 맛있고 기분 좋았는지 세상에 식사 직후 발 마사지를 받으며 세상모르게 잠들어 버렸다. 열정 가득 압을 팍팍 실 파이팅 넘치는 태국 마사지와는 달리 마닐라사근사근 살랑살랑한 마사지는 배부른 돼지를 잠재우기 딱 좋았다.



호텔 체크인을 앞두고 대망의 pcr. 나는 코로나 이후 프리랜서로 생활한 데다 코로나 증상을 느낀 적도 걸린 적도 없어 누군가가 해주는 코로나 검사를 받는 게 처음이라 꽤나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호텔 주차장에 이게 맞나 싶게 천막으로 설치된 검사소에서 동생이 미리 예약한 내역을 확인하고 그 옆 천막에 가서 미쓰 킴 맞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자 부스 안에서 팔꿈치까지 오는 긴 위생장갑을 낀 두 손이 등장하더니 순식간에 코를 쑤시고 사라졌다. 원래 이렇게 허접 신속하게 진행되는 것인가? 신속은 기대했으나 허접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의사에게 야매로 pcr테스트 결과 조작 의뢰가 쉽게 가능하다던 동생의 말에 급작스러운 신뢰가 갔다. 결과는 다행히 음성이었고 우리는 홀가분하게 호텔로 향할 수 있었다.


너무나 고맙게도 바쁜 와중에 동생 남친이 호텔까지 데려다주었다. 동생과 체크인 카운터를 살피며 다소 우왕좌왕하던 차 아빠뻘의 한 남성이 다가와 한국인이냐 묻더니 그렇다 하자 이야~ 필리핀에  여자들끼리 놀러 왔냐며 주접을 떠는데 때마침 갑자기 인어공주 같은 옷을 차려입은 직원이 나타나 구해주었다. 그리고는 체크인을 도와준 직원이 우리가 세금 눈탱이 쓴 걸 마치 알아보기라도 한 듯 객실 업그레이드를 해주었다. 객실 내 발코니 한 켠에는 살포시 바다가 보였고 한 켠에는 마닐라 도시 전경이 보였다. 우리는 대충 짐을 풀어헤치고 바로 수영장으로 향했다. 수영장은 현란한 미끄럼틀 효과로 유아 전용처럼 생긴 것과는 다르게 꽤나 깊이가 있어 유튜버인 동생은 얼마나 깊은지 체감 동영상을 찍었다. 당시 오래 기른 머리를 기부하고 단발로 자른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동생이 깊은 수심에 들어가 얼굴만 동동 띄워놓고 있자 머리칼이 물에 동동 떠 우파우파처럼 귀여웠다. 수영장 밖에서는 바다도 보였다. 우리는 빈 썬베드를 찾지 못해 아쉬운 대로 바다 앞 빈백 자리에 짐을 내려놓았는데, 마침 수영장 내 바에서 해피아워 이벤트 중이었기에 이벤트를 하지 않았어도 술을 시키려 했던 우리는 이벤트까지 해버리니 어쩔 수 없이 칵테일을 시켰고, 분위기 값이었던 건지 니 맛도 내 맛도 아니었던 마가리타를 들고 빈백에 돌아왔다. 나는 유튜버인 동생의 영향으로 휴양지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나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남겨보려 칵테일 잔을 들었다. 그때의 나는 바닷바람 때문이었을까? 칵테일이 너무도 잔이 넘치도록 가득 담겨있어서였을까? 우아하게 마셔보려던 의도와 달리 칵테일을 가슴팍에 살며시 엎어버렸고 적셔진 가슴팍일랑 수영장 물에 적셔진 비키니와 진배없는 척 영상 촬영을 이어가려 했으나 옆에서 현장을 목격한 동생의 웃음소리에 촬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유튜버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살짝씩 떨어지는 빗방울에 수영장엔 점차 사람들이 줄었고, 동생과 나는 수영장 바로 옆, 호텔 내 사우나에 들어가  우리의 알몸만 보고 우리가 한국인임을 추론해내고야 만 미국 어딘가에서 왔으며 k드라마를 너무나 좋아한다는 필리핀 아주머니들과 스몰토크를 나눈 뒤 객실로 돌아왔다. 우리가 건식 사우나와 탕 앞에서 분주히 왔다 갔다 하며 이곳은 알몸 허용 구역인가, 노 마스크존인가를 판별하려 애쓰는 와중 그녀들 역시 우리가 한국인이 맞는가를 판별하려 애쓴 뒤 비로소 탕 안에서 서로를 마주하였을 때 알 유 가이즈 코리안 하며 말을 건네온 순간은 사우나 온기 때문이었을까 마치 꿈같았다. 너무나 몽롱했던 나머지 저녁 겸 안주를 사우나에서 시켰는지 객실에 돌아와 시켰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여자 둘이 메뉴 네다섯 개를 시켰는데 식당에서 딸랑 포크 겸 숟가락 단 한 개를 동봉해 보내왔고 수줍게 하우스키핑에 찹스틱 플리즈를 전달했으나 플리즈가 간곡하지 못했던 것인지 요청이 누락되고 누락되어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받게 되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늦게나마 맛나게 저녁 겸 안주를 싹쓸이하고 준비한 술들 역시 싹쓸이하다 못해 부족한 술까지 추가 주문한 뒤 동생과 못다 한 수다를 떨며 잠에 들었다. 그렇게 나의 첫 마닐라 여행 마지막 밤이 저물었다.



Because coffee에서 팀호완까지 도보로 이동하며 내가 사실 범죄 도시 2를 마닐라에 오기 직전에 봤다고 하자 동생과 동생 남친이 그게 필리핀에서 일어난 실화라는 이야기를 했다. 마닐라에 가 보지 않은 채 전화로 전해 들었다면 그 위험한 데서 뭐 하냐고, 당장 한국에 오라고 난리를 쳤겠지만 이번 여행으로 동생이 지내는 곳을 직접 보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주변인들이 인정하는 금사빠로써 죽고 못 살 것 같은 사랑도 해 보았으나 결국 현실을 택했던 나는 코로나로 인한 롱디를 이겨내고 결국 마닐라로 삶의 터전까지 옮긴 동생이 새삼 존경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마닐라가 마약 카르텔의 도시인 줄 알았다는 글의 제목은 한치의 과장도 없다. 나는 진심 그런 곳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다만 이 여행으로 인해 나에게 이제 마닐라는 동생이 선택한 도시이자 그로 인해 언제고 가족과 혹은 혼자라도 다시 방문할 이유가 충분한 도시가 되었다. 마법의 단어 땡큐 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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