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슬기 Jan 22. 2021

빗질을 귀찮아하는 너에게

나도 너와 같다는 걸 알아줘


항상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나도 너만큼이나 싫어. 나도 너만큼이나 귀찮아. 그런데 어쩌겠니, 네 얇고 가느다란 털은 옷을 한 번 입고 벗는 것만으로도 쉽게 엉켜버리는걸. 미뤄두었다가 한 번에 빗으면 또 아프다고 짜증 낼 거잖아. 그렇다고 엉킬 일이 없도록 아예 짧게 밀어버리면 이 추운 겨울,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산책 나갈 때마다 날 원망할 거잖아. 빗질이 그렇게 싫고 귀찮다면 너는 직모인 진돗개나 단모인 퍼그로 태어났어야 했어.


강아지가 알아들을 리 만무한 말들. 지나치게 솔직한 내 이런 진심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가뜩이나 싫어하는 빗질을 당하고 있는 강아지에게 이러한 말들을 혼자 중얼거림으로써 심기를 더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다만 싫어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네 엉킨 털을 빗어야 하는 내 입장도 썩 유쾌하지는 않다는 것은 알리고 싶었다. 사막여우 같이 초연하고도 달관한 듯한 무표정으로 묵묵히 털을 빗었다. 털이 잘 엉키는 겨드랑이 부위를 빗을 때 강아지는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으나 나의 사막여우 같은 무표정을 보고 힝 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견생 7년 차, 같이 사는 인간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짜증도 앙탈도 다 필요 없다는 것을 숱한 발톱 깎기와 양치질, 눈꼽 떼기를 통해 터득한 바였다.     


사실 빗질을 싫어하는 건지 아님 브러쉬의 촉감이 아픈 건지 잘 모르겠다. 말티즈의 털은 굉장히 얇은 데다 촘촘하게 자라기 때문에 잘 뭉치고 잘 엉켜 빗살이 매우 세밀하게 박혀있는 브러쉬를 사용한다. 이 브러쉬로 내 맨살 위를 쓸어보면 까끌한 느낌이 그다지 기분 좋지 않다. 강아지도 같은 느낌일까. 생각해보면 비교적 털의 길이를 짧게 유지하는 여름에 빗질을 해주었을 때는 아픈 기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브러쉬 자체가 아프다기보다는 그냥 엉킨 털을 빗어내는 느낌이 싫은 것 같다. 보온의 이유로 여름에 비해 강아지의 털 길이를 3배 이상 길도록 두는 겨울이면 우리 집에서는 작은 전쟁이 시작된다. 빗으려는 자와 탈출하려는 자. 어쩜, 전날 저녁 열심히 긴 머리를 감고 말리고 빗질까지 하고 잠들어도 다음날 아침에 일어날 때면 새집을 세 개 정도는 지은 듯 뒤죽박죽인 머리스타일로 탈바꿈하곤 하는 주인을 쏙 빼닮았다.


가뜩이나 여름보다 3배 이상 길어버린 강아지의 털은 산책을 위해 옷을 입히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옷과의 마찰, 산책을 하는 동안 옷 속에 가둬진 털들끼리의 끊임없는 비벼짐, 산책에서 돌아와 다시 옷을 벗을 때 발생하는 정전기 이 셋의 환상적인 콜라보로 인해 하루가 멀다 하고 엉킨다. 하루면 다행이랴, 체감 상 1시간 단위로 털 엉킴의 정도가 더 심화되는 것 같다. 옷을 안 입히고 산책을 갈 수도, 산책을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차피 나갈 때 옷 입히는 것 털을 조금만 잘라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했다가 집에서 키우는 반려견이 야생의 들개인 줄 아느냐고 수의사 쌤에게 혼이 났다. 보호자는 두꺼운 패딩 입고 나왔으면서 이 추운 날씨에 털을 자를 생각을 하다니 조그만 강아지가 불쌍하지 않냐고. 빡빡 밀려는 것도 아니고 엉킴이 심한 부위만 조금 자를 생각이었는데. 다소 억울하긴 했지만 그래도 맞는 말이다. 강아지가 빗질을 거부할 때 해줄 말이 하나 더 생겼다. 안타깝지만 너 겨울 내내 털 자르면 안 된대.     


오전에 강아지 털을 한 번 빗었다. 최대한 덜 아프라고 살살살. 20분이 걸렸다. 강아지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 보여 잽싸게 산책을 다녀왔다. 오늘은 여기서 끝이야. 더 귀찮게 안 할게. 긴 하루가 끝나고 자기 전 예능을 보며 강아지 털을 쓰다듬었다. 강아지의 앞발 뒷부분에서 손가락 한마디 반만 한 뭉친 털이 만져졌다. 어떡하지 하면서도 내 손은 브러쉬로 향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빗어야지. 오늘 더는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진짜로 이번 딱 한 번만 더. 그다음엔 정말 귀찮게 안 할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