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슬기 Jan 25. 2021

가끔 네가 부끄러울 때가 있어


아유, 애기네 애기. 산책할 때면 자주 듣는 단골 멘트 중 하나다. 우리 집 강아지는 키도 작고 몸집도 작다. 게다가 겨울이라 털까지 수북이 길었기 때문에 충분히 5-6개월쯤 된 진짜 ‘애기’로 착각할만한 생김새를 갖추었다. 하지만 이 애기는 나와 함께 7번의 여름과 겨울을 보내며 눈 오는 날 산책을 가면 당장 안아 올리라며 인간을 째려볼 줄 알게 되었고, 좋아하는 간식 앞에서 오른발과 왼발 그리고 코를 연달아 줄 줄 고, 늘상 똑같은 얼굴을 매번 새로운 듯 셀카를 찍는 인간을 한심하게 쳐다볼 줄 아는, 곧 8살 생일을 맞이하는 베테랑 강아지다.     

 


어린아이가 커가며 점점 사람이 되듯, 우리 집 강아지도 천지분간 못하던 애기 시절에 비하면 많이 점잖아진 편이다. 떠오르는 에피소드를 몇 개 적어보자면, 처음 강아지를 집에 데리고 왔을 무렵 나는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갓 2개월이 지난 강아지를 혼자 집에 두고 출근하기가 영 마음에 걸려 노트북에 cctv프로그램을 깔고 핸드폰 어플과 연동한 뒤 출근을 했는데, 쉬는 시간에 짬을 내어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본 나는 기함을 하고 말았다. 강아지가 자기 키보다 족히 2배는 높은 수납박스 위에 올라가 온몸으로 하울링을 하고 있던 것이다. 어떻게 올라갔는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문제는, 어떻게 수납박스 위에 올라갔느냐보다 어떻게든 수납박스 위에 올라가버린 강아지가 내려오는 방법을 몰랐다는 것이다. 강아지는 그 위에서 나를 좀 내려달라며 한 뼘 남짓한 작은 몸으로 온 힘을 다해 하울링을 하고 있었다. 몇 시간 째 수납박스 위에서 용을 쓰는 강아지를 보고 머리가 새하얘진 나는 퇴근하기가 무섭게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강아지 우는 소리가 온 건물에 울릴 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 강아지가 울다 지쳐 탈진이라도 한 걸까.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떨렸다. 불안감이 엄습해 왈칵 현관문을 열었다. 강아지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바닥에서 쿠션 귀퉁이를 물어뜯으며 놀고 있었다.

?????

도대체 너 어떻게 오르고 내려온 거니? 혹시 내가 없는 사이에 누가 들어오기라도 한 거야? 내 속도 모르고 강아지는 그저 꼬리를 살랑이며 밥을 먹을 뿐이었다. 무료 어플이라 녹화 기능이 없다 보니, 아직도 그날의 일은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이밖에도 배변훈련을 하던 시기에 동생의 이불에 연달아 3번 오줌을 싸는 만행을 저질러 동생을 울린 적이 있었고, 묽은 변을 본 뒤 그걸 엉덩이에 묻힌 채 온 집안에서 신나게 똥꼬스키를 타고 다니며 집 구석구석에 본인의 흔적을 퍼뜨려 둔 적도 있었다. 퇴근 후 거실 방바닥에서 마치 현대미술같이 자유분방한 무늬로 얇게 펴진 채 딱딱하게 굳은 강아지의 그것을 발견한 나는 살짝 죽고 싶었다. 다 치운 뒤 그날 저녁은 굶었다. 게다가 입은 또 어찌나 짧은지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잘 먹던 사료를 갑자기 뱉어내기 시작해 입에 맞는 사료를 찾아 10종류가 넘는 사료를 사다 바치느라 내 등골을 휘게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랬던 애새끼(?)시절을 지나 어엿하고 멋진 성견으로 거듭난 우리 집 강아지는 더 이상 엉뚱한 배변 실수를 하지도, 온 집안을 똥밭으로 만들지도, 예전만큼 사료 투정을 하지도 않지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구석이 하나 있다. 바로 다른 강아지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 산책 중 다른 강아지를 만나면 크게 세 가지 반응을 보인다. 1. 다른 강아지를 발견한 그 자리에 얼어붙어 망부석이 된다. 2. 다른 강아지의 낌새를 느끼자마자 왔던 길로 되돌아가자고 한다. 3. 열 번 중 한 번꼴로 먼저 관심을 표현하지만 상대 강아지가 관심에 응하면 1,2번 중 하나로 태세를 전환한다. 그나마 만만한 콩떡 같은 체구의 우리 집 강아지를 본 상대 강아지의 주인이 애기가 무섭대 하며 강아지와 걸어감으로 상황은 쉽고 빠르게 마무리되지만, 아무래도 내가 어릴 때 사회화 교육을 단단히 잘못 시켰구나 하는 후회가 남는 건 사실이다. 7년째 매일매일 폭설 폭우가 내리는 날을 제외하고는 빠짐없이 산책을 가는데 아직도 이러는 걸 보면 이제는 그냥 성격이려니 하고 살지만 말이다.    


 

며칠 전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강아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나 싶더니 종종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10m 앞에 태어난 지 두 달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아직 귀도 제대로 서지 않은 자그마한 아기 백구가 뽈뽈대며 걸어오고 있었다. 짜식 그래도 애기는 괜찮구나. 이내 아기 백구가 우리 집 강아지를 발견하고는 네 발로 얼렁뚱땅 우당탕탕 뛰어왔다. 그걸 본 우리 집 강아지는 그대로 1번의 상태, 망부석이 되었다. 정말로? 이만한 애기를 보고도 이런다고? 아직 세상의 모든 게 궁금한 아기 백구는 잘 걸어오던 형아가 자기 앞에서 멈춘 게 신기한 듯 우리 집 강아지 앞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우리 집 강아지는 마지못해 체면치레하듯 아기 백구와 코를 맞대고 킁킁댈 뿐이었다.


연두야, 항상 너보고 최고의 강아지라고 하잖아, 그거 늘 진심이었거든. 그런데 누나 이럴 땐 네가 조금 부끄럽다. 너의 이런 모습까지도 사랑하지만, 부끄럽긴 해.      

매거진의 이전글 빗질을 귀찮아하는 너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