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만으로는 담지 못하는 느낌들이 있어요. 종종 내 마음속에서 뭉글거리는 감정들과 이미지를 밖으로 꺼내고 싶을 때가 있죠. '사실'이라는 틀 안에서는 도저히 풀어낼 자신이 없는 그런 것들 말이에요. 가끔씩 문학의 힘을 빌려서 내 속 무언가를 표현해보려고 합니다.
1
눈을 떴다.
연한 하늘색 천장을 바라본다. 그저 멍한 느낌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빈 책상 하나가 무심히 놓여있다. 머리 깊숙한 곳에서부터 묵직한 통증이 느껴진다. 온몸이 무겁다. 오른손을 쥐었다 펴본다. 감각은 온전히 살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식빵에 발린 쨈처럼 무기력이 몸 구석구석에 퍼져있다. 여기는 어디지?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이 든다.
오른발로 침대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를 돌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번엔 왼발을 먼저 짚고 땅바닥에 내려왔다. 요가 매트가 하나 깔려있다. 방에는 침대와 책상, 그리고 매트가 전부였고 이미 그것들로 인해 공간이 가득 차 있을 만큼 좁았다. 두 발자국 걸어 책상에 왼손을 딛고 창문을 열기 위해 오른손을 뻗었다. 고리 부분이 나사로 고정되어 있어서 아무리 힘을 주어도 열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까 해서 창에 귀를 가까이 대고 가만히 있어보았지만 당최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순간 누군가가 가느다란 생선가시 같은 것은 걸로 내 머리 안을 콕콕 찔러대는 느낌이 들었다. 몹시 불쾌해졌다. 몸을 뒤로 돌려서 이번엔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납작하게 생긴 문고리를 밑으로 내리고 밀었다.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위쪽으로 올린 후 체중의 힘을 이용해서 밀어봤지만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수 차례 쳐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방에 갇힌 것이다.
2
또 한 번의 두통을 느끼며 다시 침대 위로 돌아와 누웠다.
'여기는 어디지? 내 방인가?'
머릿속에서는 고통과 함께 의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기억하려고 노력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생선가시가 나를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 도저히 집중할 수 없었다. 최소한 잠에 들기 전에 기억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과거를 기억할 수 없다면 현재 내 모습을 통해서 모든 것을 유추해봐야겠다,라고 생각했다.
일단 오른손으로 머리를 만져봤다. 머리가 길다. 어깨 선보다 조금 더 긴 듯하다. 눈썹은 약간 숫이 없는 듯했고 눈은 크며 쌍꺼풀이 만져졌다. 코는 적당히 오뚝했으며 입술은 말라있었다. 고개를 밑으로 숙여보았다. 하얀색 티셔츠와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다. 손을 옷 안으로 집어넣어 보았다. 그러자 윗부분에 두 개의 봉긋한 가슴이 만져졌다. 마시멜로처럼 푹신했다. 한 손으로 잡기에는 약간 큰 사이즈였다. 배를 만져봤다. 살은 별로 잡히지 않았다. 손을 바지 안으로 넣으니 수북한 털이 느껴졌다. 그 밑으로 민감한 부분이 만져졌다. 간지러운 기분이 살짝 들었다.
다리는 말랐고 발 또한 앙상했다. 손으로 느낄 수 있었고 몸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내 얼굴만은 볼 수 없었다. 답답했다.
"아아아"
문득 궁금해서 소리를 내어 말해보았다. 목소리는 신뢰감이 느껴질 만큼 또박또박한 발음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3
방은 약간 후덥찌근했다. 어떤 코에 거슬리는 매캐한 냄새가 방 전체에 깔려있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갑자기 그 냄새가 내 코 안에 스며들었다. 매우 불쾌해졌다.
'이곳은 어디고 나는 누구지?'
왜 그 질문이 내 속을 맴도는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은 사라졌고 현재의 정보로는 아무런 힌트도 찾을 수 없었다.
기억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나이 개념, 성별 개념, 판단능력 등은 느낌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저 내가 어떻게 하다가 여기에 갇혀있는지, 어떻게 자랐는지와 같은 스토리를 잃어버렸을 뿐이다. 그 기억이 저장되는 공간이 각기 다르고 나는 한쪽 부분만 손상이 되어버린 것일까? 창문과 문이 잠겨있는 걸로 봐서는 이건 누군가의 소행인 게 분명하다.
이 상황은 너무 비정상적이지 않은가? 어떤 음모에 휘말려 기억을 잃고 여기에 갇힌 게 아닐까? 나는 과거에 존재만으로 누군가에게 위협을 끼치는 그런 사람이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나쁜 사람이었을까?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다고 질문이 무용한 건 아니다. 묻는 행위 자체에어느 정도의 답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4
갑자기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먼저였고, 배고프다는 인식은 그다음이었다. 목이 탔다. 순간 극심한 공포감이 느껴졌다. 먹을 것, 마실 것이 없는 이 공간에서 나는 죽어갈 것이다. 당장 이 방을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초조해졌다. 어떻게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유리였다면 그것을 깰 수 있다는 희망이 들었겠지만 철로 된 그 창문은 내가 아무리 두드린다고 해서 쉽게 열려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문을 부숴버리는 수밖에 없다. 뇌의 일부분이 쿡 찔리는 느낌과 함께 구토감이 몰려왔다. 나는 문 앞으로 달려갔고 맨 발로 문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댔다.
5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내 발과 무릎은 멍으로 가득 차 버렸고 더 이상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다시 한번 공포심이 느껴졌다. 이 우주 속에서, 어떤 꿈속에서 갇혀버린 게 아닐까? 그저 혼자 이렇게, 말라가듯이 죽어가는 게 아닐까? 그리웠다. 사람이 너무 그리웠다. 아무도, 아무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느낌만은 남아있다. 따뜻하게 나를 감싸주었던 누군가의 느낌, 슬펐지만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느낌, 그런 느낌들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그리운 것이었고 그 크기만큼 공허하고 불안한 것이다.
적어도 누군가의 옆에서 죽어가고 싶다. 아무것도 모른 채, 아무도 모르게, 아무런 흔적도 없이 죽어간다는 것,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소멸이었다. 우리는 어떻게든 관계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다. 아무리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더라도 철저한 고독만큼 고통스럽지는 않다. 그들을 떠올리며 추억 속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마저 빼앗긴 나에게 더 이상의 생명력은 존재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공백이었고, 모든 것이 슬픔이었다.
6
생선가시가 머릿속 깊숙한 곳까지 헤엄치는 동안 생각들은 조금씩 줄어들어갔다. 나는 지금 침대 위에 쪼그려 앉아있다. 몸도 마음도 작아지는 느낌이다. 멍, 하다. 모든 것을 빼앗겼다. 이 곳에는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것들을 바라는 내가 잘못된 게 아닐까? 여기에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사물들처럼 나 또한 가만히 있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몸을 움직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숨소리조차 잔잔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상태로 가만히 있어야겠다.
7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마음이 고요해졌다. 더 이상 생각과 배고픔이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계속해서 요동치던 머릿속 생선가시의 움직임이 잠잠해졌다. 그저 책상처럼, 그저 문처럼 가만히 있다.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다. 그렇게 스르르, 눈이 감겼다. 세계는 까맣게 보였고 그 속의 별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들마저도 하나씩 사라져 갔다. 마지막 남은 별 하나를 응시했다. 그것은 한 번의 반짝임을 던지고 은은히 사라졌다. 이제 무한한 어둠 속에서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마침내, 빛은 어둠에 잠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