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황금빛 들판을 가로지르며 그녀에게로 미친 듯이 뛰어갔다. 당장 그녀를 껴안고 싶었다. 하지만 거센 역풍이 나를 가로막았다. 달리고 달려도 결국 제자리였다. 있는 힘껏 소리를 쳐봤지만 바람에 막혀서 그녀에게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조급해졌다. 햇살이 그녀의 피아노를 환하게 비췄다. 더 이상 눈이 부셔서 그곳을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나는 바람에 맞서 계속 달렸고, 계속 넘어졌다. 그녀를 눈앞에 두고도 닿을 수 없었다.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더니 그녀 쪽으로 내 몸을 밀어주었다. 나는 다시 희망을 되찾고 달렸다. 곧 들판 샛길까지 다다랐다. 피아노의 아름다운 선율은 내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조금씩 가까워졌다. 하지만 바람이 더욱더 거세게 휘몰아쳐 좌우로 나를 흔들어댔다. 드디어 그녀가 앉아있는 피아노에 거의 다다랐을 때 발이 땅에서 붕 뜨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선생님이 한마디 할 때마다 학부모들의 웃음과 박수 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웠다. 아이들은 뒤에 있는 부모님과 눈을 맞추며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나만 빼고 모두들 축제 분위기였다. 고개를 뒤로 던져도 돌아오는 시선은 없었다. 나는 그저 희미한 그림자였다.
중학교에 들어갔다. 호르몬의 영향으로 덩치만 자란 몇몇 남자 애들이 서열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여자 애들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펼쳤다. 무슨 초등학교에서 누가 잘 나갔느니 하는 게 그들에겐 중요했다. 나는 어지러운 전쟁터에서 그저 떨어져 있고 싶었다.
쉬는 시간마다 MP3로 음악을 들었다. 수업시간에는 공책에 적힌 가사를 보며 멜로디를 상상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루한 수업을 버틸 수 없었다. 하교 종소리가 들릴 때면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제일 먼저 학교를 나갔다.
입학하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때는 이미 몇 개의 파벌이 형성되어있었다. 가장 세력이 강한 무리의 한 녀석이 나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나는 창가 끝자리에 앉아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는 내게서 이어폰을 뺏더니 자신의 귀에 꽂았다.
“야, 뭐 듣냐? 발라드?”
나는 말없이 그를 뻔히 쳐다봤다.
“불만 있어?”
나는 이어폰을 그에게서 낚아채 다시 내 귀에 집어넣었다. 주변 아이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불만 있냐고?” 그 녀석은 소리를 치며 의자를 발로 찼다. 나는 그를 무시했다. 반 아이들은 더욱더 흥미롭게 우리를 지켜봤다. 빨리 사건이 일어나길 간절히 바라는 눈빛들이었다.
“뒤질래?”
그는 책상에 놓여있던 MP3를 잡아채려고 했다. 순간 나는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반대 손에 주먹을 쥐고 그의 얼굴에 내리꽂았다. 그는 당황하면서 주변을 쳐다봤다. 녀석은 급하게 나의 멱살을 잡고 소리쳐댔다.
“이 새끼 진짜 미쳤어?”
나는 그의 얼굴을 여러 번 후려 팼다. 그 녀석은 뒷걸음질 치다가 의자에 걸려서 넘어졌다. 나는 뒤따라가서 얼굴을 끈질기게 가격했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있었다. 그는 양팔로 얼굴을 최대한 감싸려고 노력했지만 내가 한 손으로 팔을 잡고 있어서 소용없었다.
“야야, 빨리 와! 쟤들 싸워. 장난 아냐.”
바람잡이꾼들은 교실 밖을 나가 소리를 질렀다. 금세 아이들이 몰려와 이미 복도까지 발 디딜 틈 없었다.
한 대씩 때릴 때마다 전율이 돋았다. 그의 얼굴은 점점 시퍼렇게 부어갔다.
“당장 멈춰!”
학생 주임 선생님이 들이닥쳤다. 나는 그제야 휘두르던 주먹을 멈췄다. 심장이 여전히 쿵쾅거렸고 그 쾌감의 여운이 쉽게 가시질 않았다. 그는 거의 실성한 채 다른 애들의 부축을 받으며 양호실로 사라졌다. 나는 교무실로 끌려갔다.
다음날 그의 부모님이 찾아왔다. 상상했던 반응과는 달랐다. 오히려 버릇없는 자식의 기를 꺾어 놓아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런 부모님 밑에서 그런 아들이 있다는 게 의아했다. 하지만 첫인상으로 그들의 인생사를 다 알 수는 없었다. 뭔가 잘못된 게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그 사건 이후 학교에서 나의 입지는 완전히 달라졌다. 아이들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전에는 나를 인식도 못했다면 이제는 두려운 무언가가 되어버린 듯했다. 사실 나에겐 둘 다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들과 나의 거리는 여전했기 때문이다.
선선한 바람이 불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여자애 한 명이 내 앞자리에 앉더니 내 짝지에게 말을 걸었다.
“정민아, 너 시금치 안 먹어?” 민혜가 말했다.
“음... 왜? 너 먹고 싶어?” 정민은 금세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말을 더듬거렸다.
“응, 시금치는 배식량이 항상 양이 적은 것 같아. 다른 애들이 싫어해도 나는 좋아하는 데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내 소시지랑 바꾸지 않을래?”
“응... 좋아.”
민혜는 정민의 시금치를 가지고 오고 그녀의 소시지를 젓가락으로 집어서 그의 식판에 놔두었다.
그녀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물었다.
“너도 안 먹어?”
“먹어.” 뭉쳐져 있던 시금치를 한 번에 집어서 입에 넣었다.
그녀는 살짝 당황한 듯 보였다.
“너 밥 다 먹고 뭐해?” 그녀가 애써 당당한 척 물었다.
“왜?”
“그냥. 운동장 걷고 싶어서.”
“그래서?”
“너 매일 밥 먹고 운동장 걷잖아. 나도 걷는 거 좋아하는데.”
나는 그녀를 뻔히 쳐다봤다.
그녀는 창밖을 쳐다보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언제 걸을 거야?”
“지금”
그녀는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