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가 좋은 건 네가 좋아서야

by 강숲






그녀에게 그렇게 깊은 흉터가 있을 줄은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세상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도 미소를 잃지 않고. 그런 그녀가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마지막 수업종이 울리고 그녀와 나는 교문을 지나 우리의 들판으로 향했다.

“오늘 날씨 최고지?”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아 참, 내가 왜 노란색이 떠오른다고는 말 안 했지? 나는 이게 문제라니까. 내 얘기에 빠져버리면 하던 대화가 뭐였는지 곧잘 까먹곤 해. 선생님이 이러면 안 되는데. 동생 장례식이 끝나고 건물 밖을 나왔는데 그 앞에 산이 하나 있었어. 그 산 전체가 단풍으로 노랗게 물들어 있는 거야. 이 노래를 들으면서 그 풍경이 떠올랐어.” 그녀는 양팔을 뻗고 들판을 뛰어다니며 그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너 피아노 잘 친다고 했지?” 내가 물었다.

“초등학교 때는 잘 쳤는데 요즘엔 많이 안 쳐서 까먹었어.”

“나 좀 가르쳐줘.”

“그래. 좋지! 어디서?”

들판으로 향하는 입구 쪽에 낡은 주택들이 여럿 붙어있었다. 그 끝에 폐가로 보이는 허름한 집이 한 채 있었다. 창문이 깨져있어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곳엔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옆으로 쓰레기 더미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나는 그 집을 가리켰다.


“진짜? 저기서 피아노를 치자는 거야? 너무 으스스한데? 귀신이 나오면 어떡해? 네가 날 지켜줄 거야?”

“응”

“그럼 좋아. 적어도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인 건 확실해 보여. 피아노를 치다가 누가 와서 나가라고 하면 그때 나가지 뭐.”


우리는 폐가의 입구 앞으로 갔다. 문고리를 옆으로 돌리자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전등 스위치는 위아래로 켜 봐도 작동하지 않았지만 깨진 창문 사이로 비치는 햇빛에 그곳은 충분히 밝았다.


민혜는 오른쪽 선반 위에 여러 겹으로 쌓인 수건들 중 가운데 하나를 꺼내서 그랜드 피아노와 의자에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컥컥, 여기 오랫동안 안 쓴 곳인가 보네. 그런데 왜 피아노를 놔두고 갔을까? 궁금하지 않아?”

“모르겠어.”

피아노 덮개를 열자 먼지가 연기처럼 둥둥 떠올랐다. 그녀는 수건으로 닦아내고 앉아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건반을 누를 때마다 먼지들이 햇빛에 비쳐 하얗게 피어올랐다. 그 위로 울리는 음표들은 그때의 분위기와 절묘하게 닮아있었다.

“어떤 곡 쳐줄까?” 그녀는 왈츠를 치면서 손을 풀고 있었다.

“네가 치고 싶은 곡”

피아노 선율과 우리의 추억들이 하나의 하모니를 이루며 그 공간을 아늑히 채워갔다.


“정말 좋다.”

“정말? 네가 그렇게 표현해주니까 기뻐. 어렸을 때 항상 피아노를 치면서 특별한 누군가 내 곡들을 들어줬으면 했거든. 그 소원을 이룬 것 같아. 특히 그게 너라서 더 좋아.”

“치는 법 가르쳐줘.” 나는 무안해져서 급히 화제를 돌렸다.

“알겠어. 음... 내가 국어 쌤인데, 이제는 음악 선생님까지 도맡아야 해? 너무 날로 먹으려는 거 아니야? 나도 뭐 대가가 있어야지. 공짜 좋아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뭘 원해?”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고 내 쪽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순간 내 볼이 빨개지고 마음이 쿵쾅쿵쾅 뛰었다. 몸이 마비된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뭐야? 무안하게. 수업료는 말이야...” 그녀가 갑자기 양 손으로 내 목을 움켜잡고서는 그녀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 내 입술에 그녀의 입을 포갰다. 순간 번개가 친 것처럼 머리가 하얘졌다.

“뭐야. 너 뽀뽀 처음 해봐?”

그녀는 내 붉어진 불에 자신의 손등을 갖다 대며 킥킥댔다.

“사실 나도 처음이야.”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이 다시 피아노에 손을 올렸다.

“아참, 피아노 가르쳐준댔지?”

민혜는 내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열심히 알려주었다. 시간이 그대로 멈췄으면 했다. 하지만 창가 쪽의 빛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우리는 곧 집으로 돌아갔고 학교에 마치고 다시 그곳에 왔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늘어가는 내 피아노 실력만큼 그녀에 대한 감정도 더욱더 애틋해져 갔다.

하루는 그녀가 ‘Yesterday’의 악보를 가져왔다. 기타곡이지만 피아노와의 조합도 무척 잘 맞았다.

“너 정말 빨리 배우는구나. 몇 달만 더 있으면 내가 치는 곡들 다 익히겠는데?”

우리는 함께 그 곡을 연주했다.

“그런데 이 노래 가사 뜻이 뭐야?”

“저번에 사전으로 찾다 말았어.”

“그래? 가사 뜻을 알고 들으면 더 좋을 거 같아.”

“알아올게.”

“고마워.”

“아참, 내일 토요일이잖아? 우리 바닷가 안 갈래?” 그녀가 물었다.

“어느 바닷가?”

“어디든 괜찮아. 조용한 바닷가에 가고 싶어. 거기서 너랑 같이 추억을 쌓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