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파란색 자석처럼 그녀에게로 향했다. 민혜는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석아, 보물 챙겨. 걸을 시간이야!”
민혜와 나는 미세먼지 가득한 운동장의 빨간 길을 걸었다. 그녀는 더 이상 내 뒤를 따라 걷지 않았다. 옆에서 나와 발을 똑같이 맞추려고 애썼다.
“여기는 너무 시끄러워서 얘기하기엔 별로다. 그치? 너에게 말을 하는 법을 알려줘야 하는데. 그래도 너 걷는 거 좋아하니까 국어수업은 이따가 마치고 그 들판에서 하자.”
나는 정문 근처 벤치 쪽으로 발을 옮겼다. 여자애들이 둘둘 짝을 지어 그곳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구석 쪽에 한 자리가 남았다. 그곳에 앉았다.
“뭐야? 안 걸어? 나랑 얘기하고 싶나 보네?” 민혜는 혼자 킥킥댔다.
"우리 같이 음악 들으면서 얘기할까? 뭔가 더 좋을 것 같아!" 들뜬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나는 이어폰 한쪽을 그녀에게 건넸다. 우리는 그 노래를 함께 들었다.
“음악은 다 각각의 색깔이 있는 것 같아. 이 노래는 말이야. 아. 먼저 물어봐야겠다. 이 노래는 무슨 색인 것 같아?”
나는 몇 초간 고민했다.
“회색”
“진짜? 왜 그렇게 생각해?”
“그냥. 뭔가 회색 같은 느낌이야.”
“그렇구나. 역시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른 것 같아. 나는 노란색으로 들리거든. 이 노래를 들으면 어렸을 적 기억이 떠올라.”
“무슨 기억?”
“우와, 너 많이 발전했구나. 칭찬해줄게. 되묻는 법도 배웠어. 하하. 역시 내 첫 수제자는 다르다니까.”
그녀는 게으른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하늘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남동생이 있었는데 내가 죽였어.”
나는 그 말의 무게와 진지해진 그녀의 표정에서 충격을 받았다. 아픔이라곤 털끝만큼도 모를 것 같은 그녀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저 농담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음악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무서워졌구나. 하지만 너에겐 전부 얘기하고 싶어. 너는 왠지 내 얘기를 다 들어도 나를 싫어하지 않을 것 같거든. 사실 조금 두렵기도 해. 아니야, 몰라. 이 느낌을 믿어볼래.”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엄마랑 아빠는 아주 장사가 잘되는 짜장면 가게를 하고 계셨어. 엄마는 나를 임신하시고 아줌마를 한 분 뽑으셨어. 그분이 상한 재료를 자주 쓰셨나 봐. 점점 손님이 줄었고 엄마가 나를 낳으시던 날, 그 사실이 TV 고발 프로그램에 나와서 가게가 폭삭 망했지 뭐야.
이후 우리 집은 단칸방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어. 아빠는 기술이 없으셔서 그 당시 하실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어. 공사장에서 일을 시작하셨지. 그렇게 돈을 모으셔서 내가 3살 되던 해에 병원 앞에 죽집을 차리셨어. 그때부터 엄마랑 아빠가 가게에 계속 나와 계셨고 나도 거기서 자랐어. 그리고 내가 5살 때 엄마는 남동생을 낳으셨어.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장사가 불티나게 잘됐어. 그래서 집도 조금 더 큰 곳으로 이사했어. 부모님은 내 동생을 복덩이라고 부르시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셨지. 곧 가게는 너무 바빠졌어. 그래서 나는 집에서 혼자 동생을 돌보는 시간이 많아졌어.
내가 7살이고 동생이 3살이었던 어느 여름날이었어. 선풍기를 틀어도 전혀 시원하지 않은 그런 날씨였어. 집에 있는데 동생이 목이 마르다는 거야. 냉장고엔 물이 없었어. 두리번거리다가 현관 입구 쪽을 봤는데 커다랗게 생긴 음료수가 두 통이나 있었어.
나는 그중 하나를 열어서 투명 컵에 따랐어. 어린아이가 음료수를 많이 마시면 몸에 안 좋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거기에 수돗물을 반 정도 타서 줬어. 동생이 그걸 마시더니 기침을 캑캑하는 거야? 나는 뭔가 이상하다 싶었어. 컵에 코를 갖다 대니까 아주 강한 냄새가 났어.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빨래할 때 쓰는 표백제였던 거야. 벌써 컵의 반이나 먹은 뒤였어. 동생은 갑자기 거품을 물며 쓰러졌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 엄마에게 울면서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으셨어. 집을 나와 옆집 문을 마구마구 두들겼어. 아무런 대답이 없었어. 나는 맨발로 거리로 뛰쳐나와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라고 외치면서 대성통곡을 했어.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발견하시고 집에 오셔서 동생을 업고 근처 병원에 함께 가주셨어. 동생은 바로 응급실로 이송됐어. 그때 나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
곧 부모님이 병원에 오셨어. 의사 선생님한테 자초지종을 들으시고 두 분은 혼이 나가신 듯 휘청이며 내 옆에 앉으셨어. 두 분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어. 혼이라도 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엄마가 갑자기 울기 시작하셨고 아빠는 그런 엄마를 꼭 안아주셨어. 나는 이상하게 그때부터 눈물이 나오지 않았어. 속으로는 엄청 슬펐는데도 말이야. 그저 멍하니 맞은편 의자를 쳐다봤어. 동생이 머릿속에서 나를 보며 어리광 피우는 모습이 계속 떠올랐어.”
민혜는 하던 얘기를 멈추고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동생은 그날 죽었어. 부모님은 의사 선생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통곡하셨어. 나도 정말 울고 싶었는데 눈물이 안 났어. 그래서 마음으로만 펑펑 울었어. 그런데 사람이 신기한 게 뭔지 알아? 다음날부터 동생 얼굴이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생각나질 않았어. 정말 동생은 나를 엄마처럼 따랐는데 말이야. 나 정말 나쁘지 않아?
며칠 뒤에 나는 동생이 마셨던 음료수를 찾고 있었어. 너무 목이 타서 견딜 수 없는 거야. 하지만 집안 어디를 둘러봐도 찾을 수가 없었어. 결국 세탁기 옆에서 그 통을 발견했어. 물과 섞어서 컵에 따랐어. 그리고 그걸 뚫어져라 바라봤지. 그것만 마시면 갈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어.
컵을 잡고 음료수를 마시려고 했는데 갑자기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거야. 아무리 힘을 써도 마치 남의 손처럼 입 쪽으로 움직이길 거부했어. 나는 그때 처음 내가 낯설게 느껴졌어. 정말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어. 내 안의 무엇이 나를 살린 걸까?
엄마는 그날 이후로 가게에 안 나가셨어. 아빠는 소주를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하셨어. 언제부턴가 일 끝나고 집에 오셔서 술을 드시고 나한테 소리를 지르시는 거야. 나는 너무 무서웠어. 엄마는 아빠를 말리셨고 그러다 늘 말다툼을 하셨어. 시간이 갈수록 아빠는 술에 의존하셨고 엄마는 말이 없어지셨어.
결국 가게는 망했어. 그때부터 아빠가 나를 때리기 시작하셨어. 눈물도 없는, 살인자 년을 낳았다고 하시면서 말이야. 아빠는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자상하셨어. 그때는 하루하루가 정말 악몽 같았어.
초등학교 2학년 때 두 분은 이혼을 하셨어. 엄마는 나를 결국 이모 집에 맡기셨어. 아빠가 술만 먹으면 엄마 집에 찾아와 나를 때리려고 하셨거든. 아빠는 내가 어디 있는지 몰라. 가끔은 아빠가 나를 찾아와서 마구마구 때리는 꿈을 꾸기도 해.
이모는 굉장히 쾌활한 분이셨어. 사업에 성공하셔서 좋은 아파트에 살고 계셨어. 이모는 그 일을 알고서도 내 잘못이 전혀 아니라고 하셨어. 잘해주시긴 하시지만 이모랑은 항상 거리가 느껴져. 자주 다른 남자들이 왔거든. 이모는 남자관계가 매우 복잡해 보였어. 그래도 이모 덕분에 학교도 다닐 수 있고 피아노도 칠 수 있어서 늘 감사해.”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옆에 앉아있던 아이들이 일어나서 건물 쪽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아픔과 고통이 내 가슴속에 온전히 느껴졌다. 마치 하나의 실로 연결되어있는 것처럼.
“나 무섭지 않아? 싫지 않아?”
“진짜 힘들었겠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