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어

by 강숲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머리를 살짝 돌려 그녀를 보았다. 민혜가 눈치채고 내 쪽으로 완전히 고개를 틀었다.


이 노래 진짜 정말 좋아.” 그녀는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볼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있으면 얼굴이 더 붉어질 것 같아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이렇게 멋진 곳에서, 혼자 멋진 노래를 듣는 남자애라니. 넌 다른 애들하고 뭔가 다른 것 같아. 그래서 계속 궁금해. 너에 대해서 최대한 많이 알고 싶어.”

“뭐.”

“너 국어 점수 0점이지?”

“아니.”

“내가 볼 땐 빵점 맞는데? 매일 혼자만 있고 말을 안 하니까 그렇지. 뭐든 안 쓰면 고장 나는 법이야. 오늘부터 내가 너의 국어 선생님이 되어줄게.”

나는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나처럼 말을 잘하려면 말이야. 아 참. 그전에 나한테 수업료를 내야 해. 돈은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냥 내가 질문을 하면 솔직하게 대답해주면 돼. 어때. 쉽지?”

그녀는 정말 말이 많았다.

“어떤 여자애를 좋아해?”


해가 지평선 위에서 기웃기웃 거리고 있었다.

“어두워지고 있어. 이제 돌아가자.” 내가 말했다.

“뭐야. 다른 대답을 하면 안 되지.”

“다음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언제? 내일?”

“응”

“좋아. 그땐 지금처럼 대답을 피해 갈 생각 하지 마.” 그녀가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뻤다.

진 노란색의 노을이 아늑하게 들판 전체를 감싸는 가운데 우리는 길게 펼쳐진 길을 따라 걸었다.



그녀와 나는 신호등 앞에서 헤어졌다. 나는 주황빛을 은은히 뿜고 있는 가로수 길을 혼자 걸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MP3을 꺼내봤지만 다시 엉켜버린 줄을 풀 여력도 없었기에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집에 도착하니 썰렁한 공기만이 나를 반겼다. 내 방에 들어가 바닥에 있는 매트를 펴고 누웠다. 온갖 불편한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쳐댔다. 그 한가운데는 그녀가 있었다. 완전히 무기력해진 기분이었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녀의 모습이 더 선명해졌다.


새벽까지 잠을 뒤척이다 늦잠을 잤다. 허겁지겁 학교로 뛰어갔다. 수업은 이미 진행 중이었다. 나는 발소리를 최대한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자리에 앉았다. 민혜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녀는 수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짝지인 정민이 나를 쳐다봤다.

“뭐?”

“아니. 그냥, 신기해서. 네가 미소 짓는 거 처음 보는 것 같아.”

“내가 언제? 네 착각이겠지.”

“그래? 내가 잘못 봤나 보네.” 그는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공책과 두꺼운 사전을 펼치고 ‘Yesterday’ 가사의 한글 뜻을 찾기 시작했다. 6번의 종이 울리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민혜가 식판을 들고 내 앞으로 왔다. 정민의 귀에 뭔가를 속삭이더니 그는 웃으며 교실 맨 앞 그녀의 자리로 향했다.


그녀가 내 옆에 앉았다.

“내 질문 생각해봤어?” 그녀가 식판 오른쪽 끝에 있는 계란말이를 집으며 말했다.

“없어.” 나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생각해본 적 없다고? 너무하다. 하루 종일 그 대답이 뭘까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어 ‘너처럼 긴 생머리에 말괄량이 같은 애’라든가 아니면 ‘나의 무뚝뚝함을 깨줄 여자, 엄마 같은 여자’ 뭐 이런 거 있잖아.”

“그런 거 없어.”

“이상형이 없다고? 너 혹시 남자 좋아해? 아닌데? 분명 어제 나를 보면서 볼이 빨개졌는데?” 그녀는 키득키득거렸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나는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말했다.

“농담이야. 너는 속은 깊지만 말로 표현을 잘 못하는 아이잖아. 그래서 내가 너의 국어 선생님이고. 너에게 나처럼 말을 자유롭게 하는 법을 가르쳐주겠어. 에헴.”

나는 어느새 식판을 위에 있는 음식들을 모두 해치웠다. 그녀는 아직 밥을 반밖에 먹지 않았다.

“너무 빨리 먹는 거 아니야? 그렇게 먹으면 음식의 맛이 느껴지기나 해? 음악을 좋아하는 애가 왜 먹는 걸 즐길 줄 모르니. 이것 봐. 이렇게 밥 위에 김치를 딱하고 얹어서 그 위에 반으로 잘린 계란말이를 포개잖아. 그다음에 한입에 넣는 거지. 그리고 눈을 감아.” 그녀는 과장된 표정으로 소리 내서 음식물을 우걱우걱 씹어댔다.


그런 그녀가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웃음. 나에겐 전혀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내 안에 무언가가 조금씩 금가고 있었다. 다시 불안해졌다.


“나 먹는 거 안 봤지? 학생으로서의 태도가 안 돼 있네. 하지만 난 인내심 많은 선생이니까 기다리겠어.” 그녀는 혼자 웃었다.


민혜는 다짜고짜 가위바위보를 외치더니 주먹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졌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그녀의 식판이 내 식판 위에 얹어졌다. 들고 가라는 손시늉을 했다.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더 아이처럼 굴었다. 세상의 어두운 면을 전혀 모르는 어린이 같았다.

나는 복도로 가서 가지런히 정렬된 식판들 위에 우리의 식판을 툭 떨어뜨렸다. 특히 소리가 크게 났다. 마침 그쪽을 지나가던 학생들이 깜짝 놀라는 게 보였다. 그제야 옆 반 복도에서 떠드는 아이들, 배식당번이 음식물이 담긴 식판들을 정리하는 모습, 창문 너머로 정신없이 뛰어노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내가 딱히 특별할 것 없었다. 나에게 주목을 하기 전까지는 그들의 세계 속에, 나는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는 내 안에서 점점 뚜렷한 형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희미했다. 우주는 관심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전까지 나는 음악의 세계에 살았고 어느 순간 그녀라는 세상이 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그녀가 주는 생명력은 음악의 그것과는 달랐다. 음악은 완전한 질서의 공간이었다. 음표와 음표, 높은 곳과 낮은 곳이 정교하게 그물망을 이루고 있고 그 속에서 나는 예측 가능한 안정감을 느껴왔다.

하지만 그녀는 나에게 무질서 그 자체였다. 그녀는 숭고한 감정과 불안의 느낌, 따뜻함과 뜨거움 등 여러 가지의 복잡하면서 불확실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마법사였다. 하지만 음악보다 더 강렬했고, 더 살아있었다. 처음 그 빛을 느꼈을 때는 두려웠지만 점점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내가 되기를 겁먹는 마음이 여전히 나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녀는 나에게 처음 용기를 주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위로 뛰어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정신은 그녀와 음악을 최대한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손을 잡고 그 다리를 조금씩 건너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