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들을 해보지 않았을까 싶다.
밤에 지하철을 타고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데 저 켜켜이 반짝이는 수많은 집들 사이로 왜 내가 마음 편히 내 집이다 하고 몸 뉘일 집은 하나도 없는지에 대한 억울함과 슬픔.
2014년 나는 서울에 사는 서른을 앞둔 여자였다.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했지만 여전히 모든 것이 불확실했고 세상 일은 생각보다 쉬이 흘러가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큰 포부와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때로는 그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꿈이 나의 못남을 상기시키는 가장 큰 아픔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현실을 제대로 벗어나려고 노력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십 대 후반의 나는 나 자신을 참 미워하고 한심해했다.
"인정받는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겠다는 중학생 때부터 꿈꿔온 장래희망을 인질 삼아 나는 나의 이십 대를 불안정한 생활로 연명해가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길을 걷는 딸의 서울에서의 자취비를 1년간 말없이 지원해 주시던 부모님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과 함께 "이제 우리가 할 건 다 끝났다"며 완전히 경제적 지원을 끊으셨다. 아마도 예상컨대, 부모님 당신들께서 그렇게 강경책을 쓰고 나면 내가 부모님이 사는 지방으로 내려와 소소한 일자리라도 잡든지, 아니면 서울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찾든지 할 거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여느 부모님이 그렇듯 나의 부모님 역시 하나밖에 없는 딸이 안정적이고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셨겠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 삶이 결코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리하여 나는 20대 후반의 나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꿈과 전혀 상관없는 일들로 생계를 이어갔다. 서울애니메이션 센터에서 독립애니메이션 단편 제작지원을 받아 작품활동도 했지만, 제작지원비는 스태프 월급 주는 데 써야 했고 내 생활비는 작품활동과 병행하며 따로 벌어야 했다.
프리랜서로 외주 애니메이션 제작을 하기도 했지만 워낙에 불규칙한 탓에 그것만으로 먹고사는 건 쉽지 않았다. 독서실 사서, 게스트하우스 청소 및 관리, 주말 뮤직바 클럽 바텐더 등등 나름 다양한 일을 해봤다. 그중 당시에 가장 시간당 페이가 괜찮은 일은 내레이터 아르바이트, 홍보 판촉 아르바이트였다. 화장품 가게 앞에서 코스튬을 입고 무료 마스크 팩을 나눠주며 모객을 하거나, 저녁에 대학가 호프집을 돌며 술 마시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게임을 권하고 선물을 나눠주는 소주 브랜드 판촉 회사일 같은 것들이었다. 딱 정해지만 보통 근무시간은 하루 5-6시간에 10-15만 원 정도 받는 8년 전으로서는 나름 고수익 알바였다. 하지만 체력적으로 고된 일인건 사실인지라, 정말 피곤한 날엔 이동하는 지하철 속에서도 서서 졸면서 다녔고 일을 하는 중간에도 피로에 정신을 잃는 바람에 잠꼬대 같은 소리를 외치는 경우도 있었다.
2014년 8월 여름, 그날도 여전히 뙤약볕 아래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강남역 10번 출구 앞 화장품 가게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늘 어딘가 목적을 향해 분주해 보였다. 나는 아무리 목청껏 호객행위를 해봤자 그들 삶의 의미 없는 배경음일 뿐이었다. 점점이 스쳐가는 강남역 직장인들과 취준생들에게 녹음된 기계음처럼 할인 혜택 프로모션을 외치던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한 가지 아이디어가 빛이 나듯 켜졌다. 그리고 생기 어리게 울려 퍼지는 내면의 목소리.
"해외로 나가자."
"늘 가고 싶어 했잖아. 해외생활, 유학, 여행."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늘 가고 싶었잖아. 가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뇌가 차가운 물에 씻긴 듯 상쾌하고 맑아졌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그저 흔한 화장품 가게 앞 판촉 도우미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내 안의 세포 하나하나가 유레카를 외치며 진동하고 있음을 느꼈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지만 이 마지막 기회를 놓치는 것보다, 가서 무슨 일이든 해보고 실패하고 오는 게 그 이후 한국을 돌아왔을 때 더 많이 성장해 있을 거라는 확신.
설명할 수 없는 확신에 온몸의 감각들이 깨어났고 그 감각들이 온전히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옳은 결정이라고.
생각해 보면, 나는 한국에 살면서 꽤 자주 내 안에서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라는 목소리를 듣곤 했다. 이상한 말이지만 정말 그랬다. 태어나 거의 한국에 살다시피 하며 30년을 살아온 사회와 문화가 나에게는 때때로 족쇄, 벗어나야만 하는 굴레같이 느껴질 때도 많았다. 한국사람과 한국말로 대화를 할 때보다, 어설프게라도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나 자신이 더 좋고 대화의 내용 또한 나를 확장시켜 주는 느낌이었다. 그리하여 일 년여간의 준비기간 이후 나는 적지 않은 나이에 많은 사람들의 염려와 걱정 섞인 응원을 뒤로하고 나는 캐나다로 떠났다. 2016년 3월이었다.
지난 8년간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참으로 많은 일들을 매해 해쳐온 것 같다. 캐나다에서 워킹 홀리데이로 와서 어떤 연고 없이 직접 그래픽 디자이너로 취업해 일을 시작했고, 캐나다에 온 지 1년 10개월 만에 영주권자가 되었다. 이후 2년 간은 EA 밴쿠버 캠퍼스의 FIFA MOBILE 팀에서 그래픽 아티스트로, 2020년 이후로는 본래 꿈이었던 애니메이션 스토리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스토리 아티스트는 캐나다로 오기 전엔 스스로 "언어장벽과 유학의 연줄이 없는 외국인 노동자"로서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직업이었다.
가족도 생겼다. 게임회사 EA에서 사내연애로 캐나다인 남편 데이비드(David)를 만나 3년여의 연애 후 결혼했다. 우리의 관계를 이어줬던 노견 허스키를 급작스럽게 떠나보낸 뒤, 작년에는 한국에서 유기된 사모예드 믹스 강아지 클라우드(Cloud)와 함께 삶을 살고 있다. 삼십 대 후반 노산의 나이에 심지어 난소 호르몬까지 극도로 낮아 자연임신이 힘들 것이라는 몇 년 전 진단이 무색하게, 올해 초에 천사가 찾아와 뱃속에 품고 있다.
한국에서 스물 둘부터 스물 여덟살까지 흡연을 하던 나는, 영주권을 받은 뒤 꾸준히 달리기 훈련을 했고, 이후 네 번의 풀코스 마라톤(Sub-4)을 통해 체력과 정신력 또한 엄청나게 향상했다. 임신한 이후로도 하프 마라톤 다섯 번을 완주했고, 32주차를 향해가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달리고 있다.
8년간의 해외생활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나는 특별한 능력자이거나 대단한 영어실력을 가져서 모든 성공을 확신하고 캐나다에서의 삶을 시작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서툴렀고 어설펐다. 그렇지만 주변의 따뜻한 사람들의 조건 없는 도움으로 이렇게 여기까지 오게 됐다. 솔직히 나의 경우는 이전에 어학연수나 유학, 친척, 지인 등의 도움 없이 비교적 늦은 나이에 해외에 온 사람 중 꽤 성공적으로 정착해 온 케이스라고 생각한다.
혹시 당신의 내면의 목소리도 종종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럴 때 당신은 어떤 기분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 목소리에 응답할 생각인가?
앞으로 써나갈 이야기는 단순히 실용적 정보공유가 아니다. 나는 20대 후반까지 나답게 사는 방법에 대한 고민과 방황을 했고, 서른이 되어서야 진정한 나의 본 성향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용기를 냈다. 그리고 그 불확실성 속에 나를 던져 헤쳐가야 했던 무모한 도전들이 내 삶에 준 변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나의 세계를 바꾸는 건 결코 쉽지 않고 오랜 시간 꾸준하게 걸리는 작업이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면, 그 간절함에 진실한 힘이 있다면 언제나 누구나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은 과거를 돌아보았을 때 당신의 내면의 힘이 만든 경이로운 삶의 변화에 놀라게 될 것이다.
8년 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해왔던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브런치를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