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누가 그런 말을 해요?” “테레비에서도 다들 그렇게 말해” 조용한 시골에서 홀로 사시는 어머니는 TV를 밤낮으로 틀어 놓고 사시며 뉴스에 밝은 편이시다.
'아~ 우리 사회에 혼자 스스로 펙트 체크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내 속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팔순 노모의 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우리 사회의 이슈의 진실을 알아가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사실을 나는 절감하고 있다.
나 자신도 젊은 날부터 사실과 진실에 접근하는 어려움을 경험해 왔다. “진실이 무엇인가?” 는 나의 삶의 여정 밑바탕에 깔려 지워지지 않는 질문이며,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앎에 대한 목마름의 요인이며, 학이시습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교수님! 잠깐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80년대 초, 신학대학 교정에서 지나가는 교수님을 붙잡고 젊은 신학대학 학생이였던 내가 던진 말이다.
멈춰 선 교수님에게 나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교수님! 왜 우리 대학은 이런 시국의 정치상황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러한 태도가 성경적으로 맞는 것입니까?”
80년대 초, 당시는 5.18 광주사건 이후 군부가 정권을 잡은 혼란한 시기이다. 다른 대학들은 연일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경찰들이 무섭게 탄압하는 살벌한 시대였다. 그런데 내가 속해 있는 교회 목사, 신학교 교수, 신학대생 거의 모두가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의문에 답을 찾지 못해서 몹시 답답했다. 그래서 당시 학교에서 신학과 철학과 강의로 인지도가 있는 교수님을 붙들고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정치적인 문제에 직접 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할 수 없고... 우리는 세상과 한 걸음 떨어져서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자리에 있어야...” 지적인 교수님이 대답을 했다. “교수님! 그러면 성경에 세례 요한은 왜 정치자 헤롯 왕의 문제에 직접 개입하고 목숨까지 잃게 되었습니까?” 재차 질문을 하였다. 교수님은 다소 당황한 기색이셨고,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셨다.
그 후로 수 십 년의 세월이 흐른 또 다른 의문
나도 이제는 당시 교수님의 나이보다 훨씬 많아졌다. 그동안 수많은 지적, 정신적 여정을 거쳐 왔다. 되돌아보면 이로 인하여 도약과 도전으로 내 삶의 많은 변화가 있어왔다. 지금의 삶을 살아가게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굽이쳐온 긴 여정 속에 떨쳐 버릴 수 없는 화두는 역시 삶의 진실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근래는 또 다른 의문스러운 일이 있다. 80년도 당시에 정치 문제에 침묵하던 교회 목사들, 신학교 교수들이 지금에 와서는 정치적인 강력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물론 코로나19 상황에 예배의 자유를 침해받는 것에 대한 우려와 걱정도 있다. 나도 이 부분은 공감하는 부분도 있다. 순수하게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라는 소중한 가치를 지키려는 것이라면...
문제는 이것만이 본질이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실제 본질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닐지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측면에서는 간단치 않고 다소 복잡하긴 하다. 그럼에도 대다수 목사들의 전반적인 언행을 볼 때에 다분히 정치적인 것을 넘어 특정 정파적인 입장을 분명히 취하고 있다는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게 하고 있다.
다시금 나에게 의문이 찾아왔다.
80년대 당시 독재 권력과 폭압적인 정권에도 잠잠히 침묵하던 교회와 당시 신학생들이 목사가 된 지금에 와서는 이토록 노골적으로 강한 정치색을 드러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고민이 나로 하여금 성경을 다시 연구해 보는 것은 물론, 대한민국의 근대사와 한국 교회사 공부를 새롭게 하게 만들었다. 스스로의 학습을 통해 대한민국의 정치사와 한국교회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사실들을 알아가고 있다.
한 개인이 사실을 파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라는 말이 있듯이, 역사 왜곡도 능히 가능하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적 이슈의 펙트들도 정확히 아는 것도 역시 쉽지 않다.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뉴스들, 난무하는 상반된 논리와 주장들 속에 무엇이 사실이고 왜곡된 정보인지 가닥을 잡아가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기 경험, 자기 입장, 자기가 소속한 단체와 지역, 자기가 살아온 배경, 교육적 배경, 이해관계에 따라 편향된 사고를 가지고 판단을 하기 쉬운 것이 현실이다. 아니면 아예 무관심해질 수도 있다. 권력과 부를 끊임없이 탐욕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이용할 수도 있다.
사람이 진실을 안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내가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고, 우리 사회를 보다 안전하게 하는 기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왜곡되고 조작된 정보와 나 자신의 무지와 선입견으로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푸는 것과 같은 어려움이 있고...
마치 미지의 여행길에 수많은 갈림길을 통과하여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 같이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혼란스러운 정보와 휘두르는 말들 속에서 사실과 진실을 파악해 내고,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게 하는 지혜와 힘을 어디서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사람이 분별력을 가지려면,
스스로 펙트 체크할 수 있는 열정과 부지런함, 적정 수준의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파단할 수 있는 분별력이 요구된다. 누가 어떻게 이러한 분별력을 가질 수 있는가? 먼저는 진실에 대한 갈망을 가진 사람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는 존재” 대한 자각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알고 싶은 마음이며, 양심의 나침반이 지향하는 방향을 놓치지 않으려는 진실에 대한 갈망이기도 하다.
극점을 가리키는 나침판의 바늘 끝이 늘 떨리고 흔들리듯, 진실을 향하는 우리의 양심도 늘 흔들린다. 상황에 따라 이해관계에 따라 흔들린다. 이 흔들림은 인간 내면에 나약성과 부정직성으로 인한 흔들림이며, 동시에 진실을 향한 몸부림이며 진동이다. 양심은 진실에 대한 울림판과 같고, 진실이 울려질 때 마음에 떨림과 기쁨이 있는 것이 인간다움이요, 신앙에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분별력을 자라게 하기 위하여 더 필요한 것은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의 마음이다. 진실에 대한 갈망이 앎을 위한 공부를 스스로 계속하게 한다. 이 시간들과 날들이 쌓이면, 어느 순간부터 앎의 먼동이 트기 시작하고, 분별력도 함께 자라게 된다.
사람이 분별력이 가지게 되면,
정치, 사회 이슈에서 스스로 펙트를 집어낼 수 있는 안목이 생기고, 역사에서도 특정 사관이나 왜곡된 역사관에서 벗어나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역사의 진실을 차츰 알아 갈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삶의 자리에서도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지게 된다. 고전과 경전이 말하는 깊은 것들도 공명과 울림을 맛보는 즐거움도 있다. 이를 동양고전으로 표현을 하면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 할 수 있고, 서양 고전으로 표현하면 "주관적 보편타당성"이라 할 수도 있다.
“내년 3월에 대통령 선거에 너희들은 누구를 뽑을 거니?”
이미 장성한 딸들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다. 나는 누구를 뽑을지 이미 정해져 있다. 후보들의 삶의 궤적과 언행의 진위를 나 스스로 펙트 체크하고 검증한 결과이다. 딸들도 같은 후보를 뽑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하지만 요구하거나 강요할 수는 없다. 딸들이 스스로의 분별력을 가지고 판단해야 하는 일이다.
다가오는 내년 3월, 누구를 대통령으로 선택하느냐? 국가는 물론, 이 땅에서 나 보다 훨씬 많은 날들을 살아야 하는 우리 자식들의 미래가 달린 것이다. 또한 인간과 사회의 진실하고도 무관치 않은 것이기에 이 글을 쓰게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