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들, 행복한 이유가 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by 이강헌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만의 방식으로 불행하다."

(Happy families are all alike; every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


‘나의 노후는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까?’

나는 가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지금도 노후에 해당하는 나이다. 하지만 9 순이 다된 노모가 가까이 계시고, 아직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나의 노후는 더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살아오면서 우리나라의 노인 분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쉽게 보지 못하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다. 물론 과거 어르신들이 살아온 시대적 상황, 경제적 문제와 건강문제가 크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외로움의 문제이다.


외로움은 사람들과의 관계이지만 자식들과의 관계가 가장 크게 작용한다. 거의 모든 자식들이 멀리 나가 살고 있다. 현대인들의 바쁜 삶은 원하는 만큼 노부모님을 찾아뵙거나 연락을 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이로 인하여 자식들 만을 바라보고 살기 쉬운 노부모님들의 마음에 외로움이 항상 자리하고 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나이 드신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많이 들 때에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자식을 키울 때에 모든 정성과 노력을 다 쏟아붓는다. 나는 요즘 결혼한 딸이 아이를 키우는 힘든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 해본다. ‘내게 다시 젊음을 돌려받고, 3명의 아이들을 다시 키워 보겠느냐?’ 고 한다면 나는 ‘NO'라고 대답을 하고 싶은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만큼 그 세월이 만만치 않게 힘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시간들이 내 인생에 소중하고 행복한 날들이었다. 예쁘고 하루하루 귀엽게 자라는 모습이 너무 어여뻤던 기억들은 지금도 입가의 미소를 띠게 할 정도로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아이들에 대한 무한 애정과 사랑이 힘든 것들을 상쇄시켜, 힘든 것을 잘 모르며 살았던 것 같다. 지금은 힘든 날들은 다 지나갔고, 행복했던 기억은 아직 남아 있는 지금이 나는 더 좋다.


사실 출가한 자녀들이 자주 찾아뵙지 못함으로 노부모님들이 외로움을 느끼는 데는 더 깊은 문제가 있다. 자식들이 부모님을 찾아 뵐 때에 마음속에 어떤 부담 같은 것들이 있다. 더 잘해 드려야 한다는 부담과 함께 부모님의 바람에 다 부응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 부담으로 작용한다.


분가한 자식들이 부모님 댁으로 가는 길이 어린아이처럼 즐거운 가정이 얼마나 될까 싶다. 자식들이 부모님을 바빠서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이면에 말 못 할 복합적인 심정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며느리들이 느끼는 부담은 상당히 크고 깊다. 대한민국의 많은 며느리들이 명절 증후군을 겪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남편이 가족 나들이를 시댁으로 가자 하면 좋아할 아내들이 얼마나 될까? 물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시부모님들은 결혼한 자기 아들들에 대한 서운함의 원인을 며느리에서 찾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시어머니들은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 결혼 후에는 예전 같지 않은 것은 며느리 때문인 것으로 생각을 한다. 이런 심리가 고부간에 갈등 요소가 되어 서로의 행복을 잠식하고 있다.


대한민국 아들들은 자기 엄마와 아내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자칫 발을 잘못 헛디디면 집안에 평지풍파가 일어날 수 다는 것을 알기에 고민이 있다. 한 여자의 아들과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지혜롭게 하지 않으면 항상 가정이 힘들 수도 있다는 긴장감이 있다.


이러한 상황 자체가 노부모님들의 마음은 서운하고 섭섭함이 될 수 있다. 때론 분노감까지 들게 하여 노후의 행복이 자꾸만 상실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원인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자기 자녀에 대한 마음 때문이다. 자식을 모든 정성과 수고를 다해서 키운 부모들의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보상심리로 남게 될 수 있다. 곧 채권심리 같은 것이 마음에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당신이 나에게 해준 것이 뭔데?”

부부간에도 이러한 말들을 자주 한다면, 행복한 가정이 되는데 어려움이 있다. 물론 부부가 서로의 기대에 못 미칠 수 있다. 서로 서툴고 미숙하고, 성격과 기질까지 달라 서운하고 화가 나는 경우는 무수히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배우자를 대하는 기본자세가 나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부부간에도 “도대체 당신이 나에게 해준 것이 뭔데?”라는 마음은 나이 드신 분들이 자식에게 가진 채권 심리가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부부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수많은 사람 중에 유일한 나의 평생의 동반자가 되어준 한 사람, 그 존재 자체에 소중함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다.


평생을 고와 락을 함께 해준 고맙고 소중한 존재, 내가 이 사람을 결코 불행하게 할 수 없고, 끝까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시대에 뒤떨어진 너무 순진한 생각이라는 사람들도 있을까?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여보! 당신이 있어 고마웠고, 그동안 행복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채권 심리 vs 채무 심정

나도 나의 자녀들에게 채권자의 심리를 가지고 살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고 있다. 자녀들을 내가 낳고 애쓰고 고생해서 키웠다고 해서 내게 무슨 특별한 권리가 주어졌다는 생각보다, 자녀들은 우리 가정으로 선물처럼 찾아와 준 소중한 존재, 그동안 귀여움과 애정을 만끽하게 해 준 고마운 존재에 대한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정치지도자들도 채권 심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우리 사회에 좋은 사람이 되기 어렵다고 본다. 자신이 잘나서,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고,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남보다 머리가 뛰어나서 공부도 힘들게 많이 했기 때문에, 나는 우리 사회에서 많은 부분에 권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 소위 특권의식이 된다. 이 또한 동일한 채권 심리이다.


역사상 존경받는 인물들은 자신이 가진 지위와 재산, 능력들을 자신의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정의와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진 마음 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가진 것들과 지금의 삶의 영위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땀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즉 채무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러한 채무 심정들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자발적 채무 심정, 기독교 영성

이러한 채권 의식과 채무의식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 같은 기독교인임에도 너무 다른 생각과 다른 삶의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회 안에서는 매우 열심이고 신앙이 좋다고 인정받는 직분자들도

사회에서는 상식적이지 못한 모습으로 자주 비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종교와 상관없이 타고난 성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기독교 안에도 서로 다른 형태의 신앙과 다른 종류의 영성이 있다.

이는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냐는 차이에서도 많이 발생한다.

그 결과에 따라 기독교 신앙과 영성에도 채권 심리와 채무 심정이 각각 작동이 된다.


기도, 헌금, 봉사 같은 모든 신앙행위들을 하면 어떤 축복들받을 수 있다는 조건 의식이 작동하고,

신에게 드리는 만큼 받을 수 있다는 마음은 채권심리와도 같다.

소위 기복신앙과 율법적 신앙은 여기서 나오는 영성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복음 진리를 믿는 신앙의 특성은 마음에 채무 심정을 가지게 한다.

자발적인 채무 심정으로 삶을 살아가게 하는 마음은 기독교의 대표적 속성이다.

자발적 채무 심정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서 나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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