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당신과 함께 한 순간들"
어느 한적한 해변가의 별장 저택.
깔끔히 정돈된 거실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85세의 할머니와 나긋나긋하며 친절한 말투의 40대 중년 신사였죠. 오랜 세월 이미 알고 지내온 듯 도란도란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오래전에 함께 봤던 영화, 할머니가 다시 먹게 된 땅콩버터, 바이올린 연주, 함께 키운 같은 이름의 두 마리 강아지에 대한 그런 얘기들.
가만히 들어보면 두 사람의 관계가 그냥 친한 지인의 정도가 아니란 걸 곧 알게 될 거예요. 80대 할머니와 40대 중년 남자,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부였어요. 할머니는 노인성 치매로 인해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고, 40대 중년 남자의 모습으로 앉아 있는 저 '존재'는 '프라임'이란 통칭으로 불리는 인공지능의 홀로그램 입체영상이죠.
연도를 알 수 없는 근 미래, 이미 사망한 누군가의 모습으로 복원될 수 있는 인공지능 '프라임'은 텅 빈 초기 상태로부터 사용자와의 지속적인 대화들을 통해 원래 그 사람을 닮아 갑니다. 첨엔 살아있던 시절의 홀로그램 영상으로만 구현되지만 고인의 '기억'들과 '추억'들을 계속 주입시키면 스스로 그 존재인 듯 인식하고 언제든 대화에 응해 오는 것이죠.
도입부 장면에서 이 '부부'의 다정한 대화가 왜인지 묘하게 언밸런스한 느낌이 드는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할머니 마조리가 40대 시절의 남편 월터의 모습으로 복원된 인공지능 프라임에게 함께 보낸 추억들을 대화를 통해 각인시켜주고 다시 그 기억들로 지난 추억들을 상기하고 있으니까요. 떠나보낸 그 누군가를 그 모습 그대로 마주 앉아 다시 함께 대화할 수 있다는 건 사뭇 낭만적으로까지 보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그 흔적들을 머릿속에 계속 떠올려본 적이 있다면 더욱 이 상황이 그렇게 느껴질 수 있을 거예요.
이 작품 '당신과 함께 한 순간들'(원제: Marjorie Prime)에는 총 세 개의 인공지능 '프라임'이 순차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 등장한 월터의 프라임은 80대 할머니 마조리의 남편 모습이었고, 두 번째는 이후 숙환으로 세상을 떠난 할머니 마조리의 프라임을 외동딸 테스가 복원시켜 마주하죠.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세 번째엔 그 테스의 프라임을 홀로 남겨진 남편 존이 불러냅니다.
이 기본 스토리로만 보면 인공지능 프라임이 주된 소재가 되는 본격 SF 장르가 아닐까 싶지만, 실은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엔딩에 이르기까지 등장인물들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심층적인 심리 드라마에 가까운 작품이에요. 그 대화들 마저도 우리가 일상에서 가족이나 지인들과 나누는 '평범한' 내용들과 크게 다를 바 없죠. 지극히도 정적이고 느린 호흡으로 진행되는 영화예요. 하지만 그 행간의 숨겨진 의미들을 통해 영화는 우리에게 굉장히 지적이고 섬세한 철학적 질문들을 던집니다. 우리가 가지는 기억들, 그 기억들로 만들어지는 추억들, 그리고 그 추억들이 마치 퇴적층처럼 켜켜이 쌓여 만들어지는 우리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말이에요.
" 기억이란, 우물이나 서랍장 같은 게 아냐.
무언가를 기억한 때는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한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는 것뿐이지.
복사본을 다시 복사하는 것처럼,
계속 희미해질 뿐
절대 생생해지거나 선명해지지 않아.
끊임없이 조금씩, 유실되거든. "
인공지능 월터, 할머니 마조리, 딸 테스, 사위 존.
1시간 40분의 러닝타임 중 거의 80프로 이상이, 이 등장인물 네 사람이 저 거실에서 주고받는 대화들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한된 공간, 제한된 인물들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연출 형식이 마치 '연극'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는 건... 실제로 이 영화가 퓰리처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던 연극 '마조리 프라임'을 그 원작으로 했기 때문이죠.
2014년부터 무대에 올려졌던 동명의 원작 연극에서 주인공 마조리 할머니 역할은 데뷔한 지 60년을 훌쩍 넘긴 관록파 여배우 로이스 스미스가 맡았습니다. 그 연극이 스크린으로 옮겨지면서 그녀는 연극에 이어 이 영화에서도 똑같이 주인공 '마조리'를 연기했어요. 오로지 인물들의 대화로만 서사를 진행하는 형식이라 당연히 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가 필수적이었단 점에서 보자면 스토리의 중심축이었던 노배우 로이스 스미스를 비롯한 존 햄, 지나 데이비스, 팀 로빈스의 연기 또한 모두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시종일관 절제된 톤으로 담담하게 끌어가는 네 배우들 각각의 대화씬들은 얼핏 보면 꽤나 평온하고 평화로워 보일 수도 있어요. 이별한 사람과의 소중했던 시간들을 되새김하는 장면들 자체만으로 생각해본다면 인공지능 '프라임'을 통해 상처를 다독이는 '치유'의 메시지로 가득한, 그런 맥락의 영화로 받아들여지죠.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확신을 은근히, 어떤 면에선 잔인할 정도로 비껴갑니다. 이 작품을 보고 난 후의 감상이나 견해가 서로 엇갈릴 여지들도 충분해요. 표면적으론 크나큰 감정의 격랑이나 격변이 거의 보이지 않음에도 이동진 평론가가 예의 '최고의 엔딩'중 하나라고 지칭했던 그 '아름답고도 기괴한' 결말을 지켜보고 나면, 슬픔에 가까운 쓸쓸함이 쓴 커피의 뒷맛처럼 가슴속에 머금어질 겁니다. 그리고 그가 개인적 관점으로 '걸작'으로 추천하는 대다수 작품들의 성향이 그러하듯, 엔딩 크레딧을 멍하니 지켜보는 그 순간부터 오히려 더 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하죠. 개개인의 추억들로 복원되는 인공지능을 통해 아픔을 씻어내는, '삶'과 '기억'에 관한 섬세하고도 따스한 고찰을 말하고 싶은 걸까요?
아니요, 이 영화는... 그게 정말 애초에 가능한 것일까를 되묻고 있습니다. 인물들의 감정적 흐름과 각각의 선택들을 통해서 이 모든 과정들의 근간이 되는 우리 개개인들의 '기억'이란 것이, 얼마만큼 유의미 할 수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고 있죠.
"이건 그저...
거울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똑같아. "
영화 속 인공지능 '프라임'의 나이와 외모는, 구매자의 바람이나 요구에 따라 설정됩니다. 85세의 할머니 마조리는 40대 젊은 시절 남편의 모습을 선택했어요. 할머니의 딸 테스는 돌아가시기 직전의 백발성성한 엄마의 모습을 선택했죠. 테스가 죽은 후에 남편 존 역시, 죽기 직전 아내 테스의 중년 모습으로 지정했어요. 세 사람이 마주 앉아 대화하고픈 떠나간 이의 외형을 제각각 원하는 해당 나이대로 지정했단 설정은 이 작품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원작 연극의 대본을 집필했던 조던 해리슨은 이 설정에 대해, 각 인물들이 지정한 인공지능 '프라임'의 나이는 그들이 생전의 그 사람과 끝내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었던 바로 그 특정 시점을 의미한다고 언급했었던 거죠.
당연히 가장 행복했었던 시기, 가장 아름답던 시절의 모습으로 쉽게 선택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끝내 풀지 못한 서로에 대한 오해나 갈등, 원망들이 '앙금'으로 남아 있는 바로 그 시기의 모습으로 떠나간 이를 불러내고 있습니다. 할머니 마조리에겐 남편이 40대였던 그 시절이 예기치 못한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할 무렵이었어요. 그런 할머니를 마지막까지 평생 돌봤던 딸 테스는 어땠을까요. 아들을 잃은 상처 때문에 끝까지 자신에겐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던 어머니로부터 받은 그 깊은 상실감이, 내도록 테스를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테스의 생전 모습에 함께 마음 아파했던 남편 존 역시 마찬가지였죠.
그렇게 해소되지 않은 감정들을 남기고 불현듯 떠난 누군가를, 그 시절 모습 그대로 내가 가진 '기억'들을 다시 주입해 마주 앉아 대화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게 바로 이 인공지능 '프라임'이었습니다. 만약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별의 아픔으로부터 '치유' 될 수도 있을 거라 이 영화는 말하고 싶었을까요? 수많은 희로애락의 감정들을 논리적이고 순차적인 데이터로 정렬시킨 이 인공지능과의 대화를 통해서 영화 속 인물들은 오히려 더 깊은 쓸쓸함과 허무함을 깨닫게 될 뿐입니다. 눈 앞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얼굴과 목소리는 그대로인 듯 하지만 나의 '기억'으로만 다시 만들어진 그 외형 속에 정작 그 '주체'는 빠져 있는 셈이니까요.
인물들이 극 중에서 이야기하듯이 그 '기억'이라는 것들이 실은 오랜 시간이 지날수록 마치 복사본을 계속 재복사하는 일에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나의 입장과 해석으로 덧입혀져 점점 유실되거나 흐려지고 심지어 왜곡되기도 하는 게 우리의 '기억'이라면, 이 인공지능 '프라임'은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인 또 다른 불완전한 '나'에 결국 불과할 수도 있죠. 결국 내가 듣고 싶은 얘기만 그대로 따라 들려주고 있는 앵무새나 다름없어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떠드는... 쓸쓸한 '혼잣말'이나 같을 뿐인 겁니다.
특히나 그 '기억'들이 아프고 민감하며 또한 차마 드러내기 부끄럽거나 불편했던 것들에 가까웠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나의 주관적 재해석들로 변질되기 쉽단걸 우린 은연중에 느끼며 살아갑니다. 행복이나 즐거움의 감정들보다도 실상 슬픔, 실망, 억울함, 외로움, 분노들과 같은 감정들에 관련된 '기억'들이 더 생생하고 오래 지속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일, 미련을 갖게 되는 일, 해소되지 못하고 남겨지는 것들에 더 강한 잔상을 갖기 때문이라고 해요. 따지고 보면 사무치는 그리움의 감정조차도... 그렇게 보입니다. 그런 강한 잔상에 가까운 상념들이 해소되지 못한 채 오랜 시간 '기억'으로 변해가게 되면 종종 그러하듯이 우린 특정한 자신만의 잣대로 그것들을 고착화하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원래의 본질이었다고 믿게 되기도 하니까요.
인물들과 프라임들의 서로 점점 묘하게 '어긋나가는' 대화들을 가만히 지켜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인간의 '기억'과, 그 '기억'의 총합체인 삶이, 저렇듯 유한한 것이라 해도 점점 탁해지는 그 기억들이나마 붙잡으려고 애쓰는 게 자연스러운 것일지... 아니면 움켜쥐고 있어도 손에서 흘러 서서히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그 상실마저도 무덤덤히 받아들이는 게 의미 있는 건지를 말입니다.
사실 굉장히 지루한 영화에 가깝습니다. 위기나 갈등을 점점 고조시키다 절정의 순간에 빵 터뜨리는 정형적인 내러티브 구조의 작품은 아니니까요. 무심한 듯 시작되고 일직선을 그리며 아주 느리게 나아가다 그렇게 무심하게 끝맺어집니다. 이 영화 속 인물들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들도 특정 구간을 따로 떼놓고 이렇게 관찰자의 시점에서 담담히 지켜본다면, 선으로 마치 그래프를 그리듯 명확한 기승전결로 구분 짓긴 힘들 거예요. 심지어는 지금의 순간순간들이 그 기승전결의 어느 부분에 정확히 해당되는지도 우린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실은 영원히 불가능한 건지도 몰라요. 내 삶을 통째로 좌지우지한다고 느껴질 만큼 중차대하게 보였던 그 희로애락의 감정들, 기억들, 심지어 단 하나뿐인 이 '생명'마저도 종국엔 모두 다 '무'(無)로 돌아갈 뿐이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
하지만 산다는 게 이리도 무상하고 허무한 걸까라는 그런 쓸쓸함만이 가득한 영화라고 결코 결론짓고 싶지 않아요. 비어있는 여백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한 편의 수묵화나 시처럼, 오히려 별 의미 없어 보이던 이 작품 속 스쳐가는 찰나의 순간들이 더 인상 깊게 남겨졌습니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시원한 바람결, 손잡고 걸으며 발끝으로 느껴지는 따뜻한 모래의 촉감, 마주 앉아 얘기하며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의 두 눈동자와 그 엷은 미소... 실상 그 장면들의 '의미'를 깨닫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어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건 말이죠. 훗날 남겨질 어떤 '기억'이나 '추억'들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찰나의 순간'들입니다. 그러니 지금을 놓치면, 영원을 놓쳐버리는 것과 다름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