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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프 Dec 17. 2020

정말 내 샌드위치가 제일 맛있다고?

영화 "아메리칸 셰프"







내가 이래 봬도




일류 셰프야, 근데 푸드 트럭이라니








미안하지만, 아빠는 늘 바빠






  1966년 10월 19일 뉴욕 퀸즈 출신.  평범한 인상, 곱슬머리에다 살짝 뚱뚱해 보이는 체형의 이 남자 이름은 '존 파브로'였습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이런저런 TV 시리즈와 코미디 영화에서 조연으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었죠.  각본에도 재능이 남달랐던지 연기 활동과 함께 시나리오 쓰기를 계속 병행했던 모양이에요.  급기야 1996년, 자신이 쓴 각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더그 라이만 감독의 코미디 영화 'Swingers'에서 공동제작자, 각본가, 연기자로서의 멀티적 재능을 본격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기세를 몰아 2001년엔 범죄 코미디 영화 'Made'로 제작, 각본, 주연뿐 아니라 할리우드 첫 장편영화감독으로서의 데뷔 신고까지 무난하게 마쳤었죠.


  하지만 여전히 마이너적 입지에 그쳤던 그가 순식간에 영향력 있는 감독 겸 제작자로 급부상하게 된 건 바로 '아이언맨'(2008년)과 '아이언맨 2'(2010년)의 감독을 맡고 나서부터 였어요.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다름없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성공적인 첫출발은 명실상부 그 '아이언맨'에서부터였습니다.  장난감 팔아먹기 위한 단순한 스타일의 히어로 영화였지만 직접 그가 각본을 재창조하다시피 했었죠.  게다가 나락으로 떨어졌던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강력하게 천거한 장본인도 바로 존 파브로였습니다.  물론 극 중 토니 스타크의 경호원인 '해피 호건' 연기도 감초처럼 스스로 곁들였죠.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아이언맨' 두 작품을 통해 이렇게 MCU의 성공적인 토대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2016년 개봉작 '정글북' 실사영화 감독을 맡아 무려 10억 달러에 가까운 월드 와이드 흥행수입을 올렸어요.  그리고 이후 16억 달러의 수익을 거둔 또다른 디즈니 실사영화 '라이온 킹'(2019년)으로 무지막지한 흥행감독의 반열로 성큼 올라섰습니다.  직접 손댄 작품들의 이러한 연이은 대성공으로, 평범한 조연 연기자에 불과했던 그는 이제 무시못할 역량을 지닌 거물 제작자이자 연출자로 명실공히 인정받는 위치로 자리 잡았죠.


  2014년 5월에 개봉했었던 이 영화 '아메리칸 셰프'(원제: Chef)는, '아이언맨' 이후 주로 대규모 제작비가 투입되는 메이저 영화들에서 큰 성공을 거둬온 존 파브로에겐 다소 이례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제작에서부터 감독, 각본, 주연까지 순도 100% '존 파브로 영화'지만 제작비는 단돈 1,100만 달러.  위에서 언급했던 메이저 영화들에 비하면 거의 '저예산' 영화였죠.  이 당시 그는 메이저 영화 제작과정에서의 엄청난 압박과 간섭들에 꽤나 질려 있던 상태라고 해요.  연출을 맡았던 '아이언맨 2'(2010년)가 비평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이유도 제작 과정에서의 그 지긋지긋한 참견들로 인해 자신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아이언맨 3'은 스스로 감독직을 마다하고 다른 이에게 메가폰을 넘겼다고도 합니다.  2011년 연출작 '카우보이 VS 에일리언'의 촬영 당시에도 역시 그런 제작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나 봐요.

그래서 스스로 각본을 쓴 이 작품 '아메리칸 셰프'(2014년)는 작정하고 철저히 소규모 독립영화 스타일로 만들었죠.  직접 제작하고 저예산으로 자유롭게.  어떻게 보면 처음 영화계에 뛰어들었던 초심으로 돌아가는 마음으로 찍은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생각보다 작고 소소하지만 말 그대로 오롯이 존 파브로의, 존 파브로에 의한, 존 파브로를 위한 코미디 영화였습니다.  큰 홍보 없이 제작비 1,100만 달러에 개봉 후 총 흥행수입 4,800만 달러.  뭐 상업적으로도 그리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어요.  그뿐인가요, 지금까지도 관객들이 손꼽는 괜찮은 요리 영화의 순위 속엔 말입니다, 이 작품이 매번 빠지지 않고 상위권에 랭크되고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죠.





  

누가 내 욕을 하는 건데

               

  

    

그러면 잘난 니가 만들어보라고!!!




승질대로만 살 순 없는 거였어




잊었던 시간들, 잊었던 사람들, 잊었던 마음들






  이혼남인 칼 캐스퍼(존 파브로)는 LA 유명 레스토랑 '골루아즈'의 인정받는 총괄 셰프입니다.  순탄치 않았던 부부생활로 지금은 어린 아들과도 잠깐씩만 얼굴을 봐야 하는 처지지만 요리 실력으론 꽤나 인정받는 위치에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한 인터넷 요리 평론가가 그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시식하러 올 그 평론가 녀석에게 보란 듯이 자신의 예술적 감각을 내보이고 싶은데, 완고한 레스토랑 사장은 쌍심지를 켜며 결사반대하는 거예요.  예술 할 생각일랑 집어치우고 평소 하던 메뉴대로 요리를 내놓으랍니다.  총괄 셰프가 아무리 잘난들 사장 앞에선 결국 직원에 불과하잖아요.  홧김에, 아들에게 갓 배워 익힌 어설픈 트위터 실력으로 그 평론가에게 도발 메시지까지 공개적으로 날려 버렸습니다.  

일이 커졌죠.  결국 시식 중이었던 그 평론가의 면전에 오만 쌍욕을 퍼부어대는 모습이 인터넷에 쫙 퍼졌고, 그는 그 번듯한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짤렸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리 대단치 않았던 그 일로 인해 이 남자 칼 캐스퍼는 모든 걸 다 잃은 거였어요.  직장도, 명예도, 명성도, 자존심도, 우정도, 그리고 심지어 아빠를 우러러보던 어린 아들의 그 존경심마저... 심히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게 된 거였죠.


  이 영화는 일류 레스토랑 수석 셰프 자리에서 쫓겨난 칼 캐스퍼가 고물 푸드트럭에서 쿠바식 그릴 샌드위치 장사로 다시 재기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코미디 작품입니다.  무너지고 상처 받은 누군가가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성공하는 그런 이야기.  참 전형적이고 익숙한 흐름이지만, 그 익숙한 서사의 흐름을 풀어내가는 세부적인 디테일들이 굉장히 재치 있고 세련된 느낌이에요.  무엇보다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굉장히 밝고 유쾌합니다.  갈등은 보이고 있으나 작품 속 누구도 악역이라 할 만한 사람은 사실 없어요.  심지어 그와 심하게 다퉜던 그 음식 평론가나, 고집 센 레스토랑 사장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만의 입장이 분명히 있는 사람들입니다.  

영화는 그 갈등이나 다툼에 계속 집중하기보다는 그로 인해 초심으로 돌아가는 중년 남자 칼 캐스퍼의 미세한 변화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죠.  강렬한 햇살이 작렬하는 마이애미의 길거리에서부터 출발해 뉴올리언스의 번잡한 골목길, 황량하고 거친 텍사스, 그리고 다시 번화한 LA 거리로 이어지는 경쾌한 로드무비의 형식을 갖추기도 했어요.  출연하는 배우들의 면면도 꽤 화려(?)합니다.  메이저 영화 제작 과정에서의 스트레스에 질려서 만든 '저예산'급 영화라고는 하지만... 감독 존 파브로와의 개인적 친분으로 출연하는 조연 연기자들의 면면은 아이러니하게도 '메이저'급이죠.  존 레귀자모, 소피아 베르가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스칼렛 요한슨에다 무려 더스틴 호프만까지.  거의 이 정도면, 이건 독립영화가 아니잖아요 존 파브로 양반???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가 적잖은 관객들에게 '중독성'이 느껴질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는 건, 이렇게 유쾌한 코미디 영화의 기본 틀 내에서도 셰프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요리 영화의 '미덕'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었죠.  의외로 귀에 착착 휘감겨 어깨를 둠칫 거리게 만드는 라틴재즈, 뉴올리언스 재즈, 블루스풍의 흥겨운 배경음악들과 함께 클로즈업되어 쭉 비치는 음식 장면들이 꽤나 매혹적입니다.  배고플 때 보면 좀 곤혹스러울 정도죠.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기 힘들어 보이는 고급 레스토랑 메뉴들이 아니라 비교적 쉽게 먹어볼 수 있는 보통 음식들이라서 더 '현실적'으로 와닿아요.  주인공 칼이 집에서 아들에게 만들어줬던 치즈 듬뿍 들어간 토스트, 툭툭툭 만들어내던 맛깔나 보이던 파스타, 반드시 뉴올리언스에 가서 먹어봐야 한다는 프랑스식 도넛 베녜, 바삭하게 거의 태우다시피 한 텍사스식 바비큐, 무엇보다 영화 보는 내내 맛이 궁금해 미칠 거 같았던 그 쿠바식 그릴 샌드 위치까지... 빈속에 감상하는 게 꽤나 고역인 작품으로도 굉장히 유명하기도 하죠.  이 영화 감상할 때마다 매번 계속 혼자서 중얼거리곤 했어요.  '저놈의 샌드위치 땜에 결국 언젠가는, 저 지구 반대편 쿠바에 꼭 가봐야 하는 걸까'라고, 그렇게 구시렁구시렁.





           


이 음식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힘을 얻는 걸 보는 게




내게도 행복한 일이야




아들, 난 이 일을 정말 사랑해




너도 니가 하게 될 일을, 사랑했음 좋겠다






  기본적으로 심플하고, 직선적으로 내내 이어지는 경쾌한 영화입니다.  주인공 일행의 흰색 푸드 트럭에 함께 올라타 즐겁게 여행하는 그런 기분으로 편하게 감상하다 보면,  결국 모두가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게 되죠.  몇 년간 계속 굵직굵직한 영화를 찍어오며 수많은 간섭과 참견에 시달렸을 존 파브로에겐, 어쩌면 진짜 휴식 같은 영화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한데 그런 관점으로 이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말이죠, 이 영화는 요리라는 '일'에 대한 의미를 다시 되찾아가는 어느 셰프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라는 '일'에서 한때 매너리즘에 빠졌을지도 모르는 존 파브로 자신에 대한 비유이자 어떤 다짐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해요.


  주인공 칼 캐스퍼(존 파브로)의 행적을 다시 돌이켜 볼까요.  고급 레스토랑의 총괄 셰프로 꽤 오래 명성을 쌓았지만 아마도 그의 첫출발은 분명히 마이애미의 길거리 푸드 트럭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지금은 이혼한 전처도 그때 만나 사랑하게 되었던 거 같아요.  인생이 대체로 다 그러하듯, 자리를 옮겨 유명 셰프가 되어 일해 오면서 얻은 것도 많았던 대신에 잃은 것들도 분명 있어 보이죠.  이혼남이 되었고, 사랑스러운 아들과의 시간은 바쁜 일 때문에 늘 형식적인 얼굴 보기에 그칠 뿐입니다.  아빠랑 같이 시간을 보내길 바라는 그 녀석도 곧 자라 그와 어색한 사이가 되겠죠.  그 와중에, '만들고 싶은 요리'와 '만들어야 하는 요리'의 큰 간극으로 일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점점 더 짜증과 염증으로 변해왔을 거예요.  그럼에도 밥줄을 위해선 늘 꾹꾹 참고 살아야 하는 게 월급쟁이의 숙명일 텐데, 욱 하는 감정을 못 참고 대판 사고를 치고 훅 짤렸던 거죠.  쌓아온 모든 게 송두리째 다 무너졌다고만 생각했던 그때, 자신을 아끼던 주위 사람들의 충고가 그제야 귀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한결같이 다 그에게 그렇게 말해요.  

"너 십 년간 거기서 셰프로 일하면서, 사실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거든? "


  가만히 보면 그랬던 거 같아요.  '일'은 늘 그 '일'이었습니다.  원해서 시작했든, 어거지로 시작했든, 잘하든, 못하든, 결국 그 '일' 자체는 항상 그대로인데 그걸 받아들이는 칼 캐스퍼의 마음이, 제 마음이, 우리들 모두의 마음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곤 하는 거였잖아요.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 될지, 하고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일이 될지도 다 제각각 개인의 선택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거라 뭐라 단정 짓기 힘들겠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건 그 자체로 굉장히 즐겁고 유쾌한 일 일겁니다.  이 영화가 바로 그런 느낌을 내내 전해주고 있어요.  어느새 고역으로만 느껴지는 나의 '일'이 다시 즐거운 '일'이 되고, 늘 곁에 있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사람들이 오롯이 날 걱정하며 바라봐주고 있단 걸 깨닫는 잔잔한 감동들을 찐한 웃음과 허기(?) 속에 녹여놓고 있는 그런 작품인 거죠.  

모르긴 몰라도, '공짜로 얻어먹는 아저씨들한텐 그냥 대충 좀 탄 걸 줘도 된다'는 아들을 아빠 칼 캐스퍼가 정색하며 따끔히 혼내는 그 장면은... 사실 주인공 칼이 자신의 모습을 다잡는 맥락이기도 했지만, 실제 존 파브로 자신에게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푸드 트럭을 통해 '일'에 대한 열정을 다시 되찾아 셰프로 돌아가는 칼 캐스퍼처럼, 되짚어보면 존 파브로도 이 소규모 영화 '아메리칸 셰프' 작업 이후 메이저 작품들인 '정글북', '라이온 킹'에서 자신이 선택했던 그 영화라는 '일'에 더 뜨거운 열정을 불태워 넣은듯했으니까요.


  기분이 우울해지면, 오히려 더 감정이 극단까지 내려앉는 슬프고 먹먹한 영화를 골라 보는 '변태' 같은 취향이 제게 좀 있어요.  그럴 땐 또 희한하게 글빨이 더 잘 오르는 기현상을 보이기도 하죠.  하지만 기분이 좋아지고 싶을 때 예외적으로(?) 챙겨보는 밝고 유쾌한 영화가 바로 이 '아메리칸 셰프'입니다.  일 년에 최소 두 번 이상은 챙겨봐 왔으니 지금까지 아마 열댓 번 가까이 감상했을 거예요.  심지어 좋아하는 음악 틀어 놓고 딴 일 하듯이 이 영화를 재생시키고 소리만 들으며 다른 일을 하기도 합니다.  등장인물들의 귀에 익은 목소리들과 신나는 라틴음악, 그 속에 섞여 들리는 지글지글 요리하는 소리들, 탁탁탁탁 하는 그 도마질 소리만 듣고 있어도 늘 행복해지는 영화거든요.

도저히 풀리지 않을 듯 뭔가 골치 아픈 생각들이 이리저리 꼬일 때가 많지만... 또 그렇게 달리 생각해보면 사실 인생이 뭐 있나요?  함께 하면 즐거운 사람들, 즐거운 음악들, 그리고 함께 만들어 나눠 먹는 소박하지만 정성스러운 음식들.  찾아보면 기쁨과 행복들은 항상 우리 일상의 이런 틈바구니들 속에 다 깊이 스며져 있었습니다.  그걸 곧잘 잊곤 해서 문제였죠.


  오랜만에 이 작품을 꺼내 감상했던 지난 주말, 두 가지 작은 결심을 했어요.  일단 은근히 귀찮아서 계속 미루곤 했던 아들램과의 캐치볼을 이번 주말엔 꼭 다시 해줘야겠습니다.  한 시간가량 그렇게 둘이서 땀을 뻘뻘 흐리고, 따뜻하게 샤워를 하고, 그리곤 드디어!!!  저 '쿠바식 그릴 샌드위치'를 직접 한번 만들어 볼 생각이죠.  내내 궁금했거든요.  주인공 칼 캐스퍼가 '즐겁게' 만들어 사람들에게 건네주는 저 샌드위치 맛이.  아마 짐작컨대 분명 정통 쿠바의 맛이 아니라 비릿한 부산의 맛이 날 테지만... 가족들의 표정은 벌써 뜨거운 쿠바 길거리 한가운데로 우르르 가 있는듯해요.  아마 모두들 잘  견디고  먹어 줄 겁니다.  

어설프게 흉내내 만들어 올려질 그 샌드위치가,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말해줄테니까.



















* 위 이미지는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며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에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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