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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프 Feb 16. 2021

당신이 이제 행복했으면 좋겠어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리 챈들러(케이시 애플렉)는 보스턴의 한 다세대주택 잡역부로 일하고 있습니다.  입에 겨우 풀칠할 정도의 최저임금으로 지하 쪽방에 기거하면서 건물 내 모든 세대들의 설비 수리에서부터 폐기물 수거 등 온갖 잡일들을 도맡고 있죠.  똥으로 막힌 변기들까지 싫은 내색 없이 다 처리해주는 성실한 사람인 듯한데 막상 그에게 이렇게 신세를 지고 있는 입주민들조차 모두들 그를 싫어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며 타인에게 무관심해요.  심지어 그에게 호의를 품고 다가서려는 사람들에게조차 냉담하고 무례하기까지 하죠.  낮엔 마치 감정이 없는 기계처럼 사람들과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일하고, 밤이 되면 술에 쩔어 지내다 시비 끝에 흠씬 두들겨 맞는 일도 종종 있어 보입니다.  그렇게 막 나가기엔 또 제대로 쌈박질도 못하는 약한 사람이거든요.


  영화 밖 우리 주위에 실제로 있는 사람이라면 한순간도 가까이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일 겁니다.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다기보다 어떤 형태로든 관계 그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아직 젊어 보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저 모습 그대로 어떤 꿈도 희망도 미래도 없이 골방 한구석에서 생을 마감할 거 같아요.  설령 그런 쓸쓸하고 비참한 삶의 마지막 순간이 닥쳐와도 기다렸다는 듯이 무표정하게 눈을 감을듯한 그를 지켜보고 있다 보면 점점 더 궁금해집니다.  대체 그는 어떤 사람인 걸까.  가족이나 친구라고는 없어 보였던 그에게 하나밖에 없는 친형의 부고 소식이 전해지면서 영화는, 주인공 리 챈들러의 이런 현재와 과거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서서히 풀어냅니다.






그에게도, 가족이 '있었습니다'



    







  특별할 거 없어 보이는 캐스팅, 특별할 거 없어 보이는 스토리.  둘러보면 주위에 한두 명쯤은 있어 보일듯한 한 사람의 인생과 그 속의 감정들.  외견상 굉장히 평범해 보이는 이 영화는 2016년 11월 개봉 이후 관객과 비평가들에게 수많은 찬사를 받으며 그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떠올랐습니다.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 6개 부문에 걸쳐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올랐었고 그중 각본상과 남우주연상을 차지했었죠.  거의 대다수의 영화제들에서 각본과 연출, 연기에 있어서 유력한 후보작으로 노미네이트 되었고 특히 리 챈들러 역할을 맡았던 배우 케이시 애플렉은 총 60여 개의 크고 작은 남우주연상 부분에 걸쳐 수상 혹은 후보가 되었던 걸로도 유명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분위기에도 이 작품을 그리 애써 서둘러 감상하지 않았던 건... 바로 '그 이유' 때문이기도 했어요.  


  당시 제89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라라랜드>, <문라이트>, 그리고 이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세 작품의 각축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라라랜드>와 <문라이트>의 작품상 번복은 이미 널리 유명해진 해프닝이었고 또 다른 큰 관심 사항은 바로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 부문이었죠.  그땐 개인적으로 <라라랜드>에 꽤 꽃혀 있었을 때라 내심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에게 트로피가 돌아가길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여우주연상은 최종 엠마 스톤 수상, 그런데 남우주연상은...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 내내 음울한 표정만 짓고 있어 보였던 배우 케이시 애플렉에게 주어졌었죠.  특히나 당시 케이시 애플렉은 자신의 이전 작품에서 여성 스태프를 성추행하고 왕따 시켰던 일로 인해 비난을 받고 있던 타이밍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작품 <맨체스터 바이 더 씨>로 그는 관련된 대부분의 남자 연기상을 독식하다시피 했습니다.  게다가 좋아하는 배우 라이언 고슬링을 제치면서까지.  이런.


  몇 년 전쯤, 배우 케이시 애플렉의 좀 한참 뒤늦은 사과에 대한 뉴스가 스쳐가긴 했었습니다.  한데 솔직히 그가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인지에는 아직도 별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대체 이 영화가 어떻길래 그의 당시 그런 '추문'을 뒤덮고도 남았을까, 그게 참 궁금했었죠.  이런저런 이유로 참 손이 가지 않았던 이 영화, 한데 막상 이 작품을 처음 감상하고 나서는 며칠간을 그 짙은 여운에 먹먹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합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었죠.  그 가슴 후벼 파는듯한 '연기'에 대한 모든 박수와 찬사는 솔직히 케이시 애플렉이라는 한 배우를 위한게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가 맡았던 영화 속 주인공 '리 챈들러'라는 캐릭터, 그 자체를 향한 거였죠.     






    









  친형의 사망 소식에 고향인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 내려온 리 챈들러(케이시 애플렉).  그의 무심한 표정만큼이나 영화의 흐름도 굉장히 무뚝뚝하고 불친절합니다.  실제로 미국 보스턴에서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다는 작은 어촌마을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황량하고 싸늘한 겨울 풍경도 그의 모습과 꼭 닮았어요.  조카의 후견인이 되어 달라는 형의 남겨진 유언에 그는 대놓고 난색을 표합니다.  막상 그 조카 패트릭(루카스 헤지스)도 아버지가 죽은 날에 여자 친구를 집에 불러 섹스하기 바쁜 그런 녀석이죠.  가뜩이나 대사가 그리 많지 않은 작품인 데다 그나마 오랜만에 마주친 이 삼촌과 조카가 서로에게 내뱉는 말들도 거친 욕설과 비난이 대부분이라 공감은커녕 사실 더 인상이 찌푸려지기도 해요.  도대체 이 사람들, 왜 이렇게들 사는 건가요.


  절대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곳.  

  고향인 '맨체스타 바이 더 씨'에 내려와 형의 장례식을 처리하는 그 메마른 순간들 틈새로 아주 잠깐씩, 리 챈들러의 과거가 조금씩 눈앞에 스쳐 지나갑니다.  왁자지껄하게 친구들과 술 마시며 떠드는 걸 좋아했던 평범한 보통 사람.  그에게도 우애가 넘치는 형제, 사랑스러운 아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 아이가 있었죠.  그랬던 그가 어느 날 '끔찍한 실수' 한 번으로 인해 모든 걸 잃게 된 그 과정들을 이 작품은... 하나하나 구구절절하게 자세히 들려주거나 보여주진 않습니다.  살아가며 잊히지 않는 어떤 일들이 어느 순간순간 불현듯 떠오르듯, 지켜보는 우리로 하여금 리 챈들러의 아픈 그 사연을 서서히 '짐작'하게끔 하는 것이죠.  과거의 조각들이 마치 정교한 퍼즐처럼 현재와 교차되는 영화의 섬세한 연출들을 통해 아주 조금씩, 그의 감정들이 가슴속에 젖어 들어오는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자세를 고쳐 앉으며 이 영화 속으로 본격적으로 빨려 들게 될 거예요.  제가 그랬었거든요.  


  저 사람 정말 힘들었겠구나, 하며

별 뜻 없이 지나간 등장인물들의 모든 무심했던 행동들과 건조한 대사들이 영화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가슴을 쥐어짜듯 새삼 먹먹하게 다가옵니다.  당장 칼로 손목을 긋거나, 머리에 총을 쏴도 이상할 거 없는 그런 상황에서 지금처럼 '숨만 쉬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건... 그것이 그가 스스로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형벌'이 때문이겠죠.  마지막 눈 감는 순간까지 그때 '그 일'을 떠올리며 슬픔과 고통, 죄의식의 심연으로 점점 더 깊이 빨려 들어가는 것.  

맞습니다.  리 챈들러가 지금껏 살아 있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고통받기 위해서였어요.       





      

누군가 그를 안아줬듯이



그도 이젠 누군가를 안아 주기를



당신이 이제, 행복해지면 좋겠어






  ' 그 일' 이후 지옥 같은 순간들을 함께 보내야 했을 옛 아내가 바라는 대로 이 남자 리 챈들러가 다시 예전처럼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전형적인 할리우드 가족영화의 법칙을 따르자면... 그는 다시 돌아온 이곳 고향 마을에서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이들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이루겠죠.  솔직히 뻔해도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그에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조카의 친권과 후견인으로서의 권리를 모두 다 고향 이웃들에게 넘겨주고 그는 보스턴의 그 눅눅한 지하 골방에서 여전히 고립된 섬처럼 살아갈지도 몰라요.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슬픔의 '정도'라는 것이 얼마만큼일지 쉽게 가늠할 수 없기에 그런 그의 선택에 대한 옳고 그름을 쉽게 판단하긴 힘들죠.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서 '그만하면 됐다'라는 말을 우린 결코 쉽게 건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한 인물의 상처와 고통, 트라우마 그 자체만을 그리는데 단순히 그치지 않았어요.  어쩌면 우리 모두는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건드리면 툭하고 터져버릴 듯한 크고 작은 상처들을 제각각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몰라요.  치유될 수 있는 상처들도 있지만 영원히 끌어안고 가져가야 할 멍에들도 분명히 있죠.  인생은... 두세 시간짜리 할리우드 영화들처럼 명확한 기승전결을 가진 것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면 우리는 대체 어느 누구에게, 어떤 것들에 대해, 어떤 의미들을 두며 이렇게 계속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 결국 리 챈들러라는 인물이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한 존재인가에만 국한되었다면 이렇게 많은 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적시진 못했을 겁니다.  오히려 그랬던 그가, 그 고통의 장소로 돌아와 사람들과 마주하며 다시 느끼게 되는 현재의 감정들이 이 작품의 진짜 핵심이었던 거죠.  깊은 고통과 슬픔 그 자체에만 매몰되어 그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 느끼지 못했던 것들, 그리고 듣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그의 모습을 다시 한번 들여다볼까요.  고향을 떠나 보스턴의 지하 골방으로 돌아가게 될 무심한 리 챈들러의 뒷모습이 영화의 시작과는 아주 미세하게 다르게 느껴질 거예요.  그리고 그 뒷모습은 영화 밖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리 챈들러와 우리가 그래도 계속 살아갈 이유는, 어쩌면 같은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 위 이미지들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며

  이미지들의 모든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에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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