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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프 Feb 24. 2021

그 '우아함'속엔, 당신이 없다

영화 "우아한 세계"


(영화의 엔딩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 참 아름답다, 아름다워. "




  

  피투성이가 된 채 논두렁길로 개처럼 기다시피 도망치는 한 남자.  그리고 그 남자를 황급히 뒤쫓으며 들판에서 함께 엎어지고 뒤엉키는 자신의 똘마니들.  그 치열한 '체험, 삶의 현장'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던 들개파 중간보스 강인구(송강호)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참 아름답다 아름다워.

  



  


  애초에 이 장면에서의 대사는 '참 지랄들을 한다. 지랄들을 해'였습니다.  한데 당사자인 배우 송강호는 저렇게 비틀고 비꼬는 느낌으로 가야 영화의 주제와 맞아떨어진다고 한재림 감독을 설득했었죠.   실제로 이 도입부는 송강호의 저 애드리브 버전으로 결국 상영되었습니다.  피곤함이 얼굴에 가득한 조폭 강인구가 그 '개싸움'을 먼발치서 내려다보며 내뱉었던 저 대사는, 인상적이었던 엔딩과 어우러져 이 작품 전체의 독특한 뉘앙스를 그대로 담고 있어요.  

그저 흔한 조폭 코미디물인 줄 알았던 이 작품이 한재림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활 누아르', 혹은 '가족 누아르'로 연하게 와닿는것은 바로 그 뉘앙스와 무관하지 않죠.  '연애, 사랑, 이별'이란 감정의 민낯을 어설픈 미화 없이 건조한 시선으로 리얼하게 그려냈던 영화 <연애의 목적>처럼, 감독은 다음 작품이었던 이 <우아한 세계>를 통해 '먹고 산다는 것'의 민낯을 또한 그대로 드러냅니다.  우아하지 않게 살아야만 우아한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이 아이러니.  결국 그 모든 '수모'들을 견뎌내게 하는 궁극적 이유로서의 '가족'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라는 질문을 함께 던지기도 해요.




            










  김지운 감독 작품 <달콤한 인생>의 주인공 선우의 인생이 결코 달콤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 작품 <우아한 세계>의 주인공 강인구(송강호)의 삶도 '우아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아내와 아들, 딸 세 식구를 먹여 살리고 있는 그의 직업은 '조폭'이에요.  이젠 몸싸움도 체력이 달려 점점 버거워지는 40대 중후반의 나이지만 하늘처럼 모시고 있는 회장님의 지시에 따라 여전히 'X뺑이'를 치며 살고 있죠.  어떻게 하면 결과를 가로챌까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밉상 노상무(제문)도 늘 경계해야 해요.  조금만 약한 모습을 보이면 밟고 올라설 후배들도 견제해야 하는 고달픈 상황인데, 집에 들어가면 아내와 아이들은 '더러운 돈'을 벌어 온다며 막상 자신을 한심한 벌레처럼 차갑게 바라봅니다.  그게 40대 중년 '조폭'가장 강인구가 보내고 있는 하루하루였어요.


  이렇게 여기저기서 치이며 욕먹는 강인구의 일상들을 보여주는 영화의 전반부는... 지겨운 소재 중 하나인 '조폭 코미디' 영화의 전형적인 설정들을 보여주는 듯해요.  그러나 그게 단지 다인 영화라면 굳이 '송강호'라는 배우까진 필요하진 않을 겁니다.  영화 <반칙왕>에서 샐러리맨 양복에 타이거 마스크를 쓴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오히려 가슴을 깊게 저미는 페이소스를 느끼게 했듯이, 블랙 코미디 장르인 이 작품 역시도 그런 애잔한 연민들이 기저에 깊이 깔려 있죠.  가만히 계속 들여다볼까요.  송강호 특유의 그 '리얼'한 생활 연기들에 큭큭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한데 어느 시점에서부터... 위 아래 옆의 징글징글한 인간들, 심지어 가족들에게까지 까이는 그의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아 보여요.  한때는 남들보다 앞서가야 한다고 기를 쓰지만 시간이 흘러 어느샌가부턴, 맨 뒤로 쭉쭉 밀려나지 않으려고 매일을 아등바등할 때가 오게 되죠.  그러기 위해서 종종 비루하고 초라한 순간들을 감내해야 하는 다른 모든 중년 가장들의 모습이 그 장면장면들에서 슬슬 묘하게 겹쳐 보입니다.  강인구가 극 중에서 누군가에게 가하는, 혹은 당하는 '폭력'의 묘사들이 잔인한가요?  당연히, 잔인하죠.  피가 나고 부러지고 다칩니다.  하지만 그 형태를 달리할 뿐 '먹고살아야 하는' 우리 보통 사람들의 삶도 때론 눈에 보이지 않게 잔인했죠.  칼이나 각목, 쇠 파이프를 눈에 보이게 휘두르지만 않았다 뿐이지 실은 밥벌이 때문에 서로 주고받아야 했던 그 무형의 '폭력'들도 결코 가볍진 않았어요.  네, 맞습니다.  어쨌든 누구나 다 그렇게도 먹고살아야 하는 거니까.                         











  이 전혀 우아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 때론 가해자이면서 또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한 중년 '조폭' 가장 강인구의 '버팀목'은 무얼까요.  그가 때리고 맞아가며 벌어다 주는 돈으로 먹고, 입고, 자고, 쓰고, 학교에 다니지만 아내는 '떳떳하게 돈 쓰고 싶다'며 깡패짓을 그만두라며 몰아붙입니다.  아빠를 슬슬 피하는 어린 딸은 '영화 속 조폭들처럼 칼침이나 맞고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늘 생각하고 있죠.  착잡한 심정의 강인구에게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하면 제대로, 잘, 사는 건지 아무도 가르쳐 주진 않습니다.  어쨌든 그는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누군가를 줘패고 멱살을 흔들어 수돗물이 콸콸 쏟아지는 '커다란 집'과 아이들이 그토록 원하는 '캐나다 유학'을 가족들에게 안겨주고 싶어 해요.  커다란 집과 캐나다 유학.  그거면 그도 분명히 우아한 남편이자 아빠가 될 거라 꿈꿉니다.


  자, 이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강인구의 인생에도 드디어 햇빛이 비치려나 봐요.  지쳐 헤어지려 했던 아내가 마음을 다시 다잡고, 그를 다른 눈으로 다시 바라보게 된 철없던 딸도 그에게 미소를 건네기 시작합니다.  꽤 '위험한 일' 끝에 이젠 커다란 집으로 이사도 했고, 두 아이 다 함께 캐나다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어요.  어깨가 으쓱으쓱 합니다.  그러니 이제 강인구는 그 '험한 일'을 그만두고 가족들에게 위로와 존경을 받으며 살 수 있는 건가요?

실은 그래야만 지극히 모범적이고 착한 결말이 될 텐데... 한재림 감독이 원하는 결말은 애당초 그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미 캐나다에 먼저 가 있는 아들도, 뒤따라 그곳으로 함께 떠나려는 아내와 딸 역시도 이젠 그에게 더 이상 '그 일을 그만두라'라고 말하진 않아요.  더 '많은 돈'이 들어야 할 테고, 누군가는 계속 '그 돈'을 벌어야 합니다.  뒤돌아 눈길도 주지 않는 딸과, 메마른 시선으로 슬쩍 눈인사를 하는 아내를 캐나다행 비행기에 실어 보내며 배웅하는 그 순간까지도 막상 강인구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가 꿈꾸던 삶의 방향이, 이제 어디로 어떻게 향하게 될지를 말이죠.

  



     










  우아한 세계.  

  널따란 거실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라면을 먹으려던 마지막 장면에서 강인구는 드디어 그 '우아한 세계'를 마주하게 됩니다.  캐나다에서 가족들이 녹화해 보내온 홈 비디오테이프.  천국의 풍경을 닮은듯한 그곳에서, 늘 어두운 표정이었던 아내와 아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밝게 웃고 장난치며 즐거워하고 있어요.  화사하고 활기가 넘칩니다.  그들의 모습을 따라 낄낄거리며 라면 면발을 씹고 있는 강인구가 그토록 바라왔던 바로 그 '우아함'이었죠.  

한데 비디오 영상을 지켜보던 강인구의 표정이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해요.  급기야 무언가를 깨닫게 된 듯 울음을 터뜨리죠.  행복해 보이는 가족들의 그 '우아한 세계'는 결국 자신의 부재로 완성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세계를 위해서, 여전히 누군가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손모가지를 부러뜨려야 하겠지만 그럴수록 그는 오히려 점점 더 가족들에게서 멀어지게 될 거예요.  맞습니다, 눈 앞의 그 '우아함'속에 그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 거죠.  북받쳐 오른 서글픔, 외로움, 분노로 인해 바닥에 내던져진 그 라면 면발에다가 대종상 연기 조연상을 주고 싶을 정도로 인상 깊었던 이 작품의 엔딩 장면은,  슬며시 걸레를 들고 쪼그리고 앉아 바닥을 닦아내던 그 모습에서 오히려 더 깊은 페이소스를 전해오고 있어요.  혼자 다시 치우는 게 더 초라해 보일까 봐 라면 그릇도 한번 제대로 힘껏 내던지기 힘든, 이 삶의 비루함들이란.  


  문득 이병헌이 출연했던 영화 <싱글 라이더>가 겹쳐 떠오릅니다.  모든 걸 잃고 바닥에 떨어진 한 남자가 뒤늦게 멀리 외국에 보내 놓았던 가족을 찾아가는 이야기.  '먹고 산다는 것의 비애'에 초점을 맞춘 이 블랙코미디 <우아한 세계>와는 장르도 분위기도 다른 고요하고 정적인 영화였지만 무작정 달려가다 놓쳐버리는 것들에 대한 물음은, 어딘가 닮아 있기도 해요.  

이 남자 강인구가 결국엔 '우아'할 수 있을지 솔직히 진지하게, 한재림 감독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지만...

왜일까요.  슬픈 눈으로 입을 굳게 다문채 호주의 낯선 거리를 쓸쓸히 걸어가던 영화 <싱글 라이더> 속 이병헌의 그 뒷모습이, 이 강인구에게 짙게 겹쳐 보이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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