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우린 계속 뭔가 엇나가는데
'플립'(flipped)은 고등학교 교사 경력의 작가 웬들린 밴 드라닌이 2001년에 발표했던 하이틴 청춘소설이었습니다. 미국 4개 주에서 청소년 독자들이 직접 선정한 도서상을 수상한 작품이었어요. 국내에선 의미가 잘 와닿지 않는 원제목을 버리고 '두근두근 첫사랑' 혹은 '플라타너스 나무 위의 줄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죠. 영화판 '플립'은 '스탠 바이 미',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미저리', '어 퓨 굿 맨', '버킷 리스트'와 같은 연출작들로 널리 알려진 로브 라이너 감독이 연출을 맡아 2010년 8월에 개봉했었습니다.
제작비는 비교적 저렴(?)했던 1400만 달러. 한데 개봉 당시 평론가들의 평이 좋지 않아 북미 흥행성적은 불과 175만 달러에 그쳤어요. 감독의 이름값이 무색할 정도의 그 저조한 흥행 성적에 곧바로 영화는 TV 및 넷플릭스로 직행해 버렸습니다. 2011년 우리나라에서도 극장 개봉 없이 DVD와 VOD로 바로 넘어갔었죠. 하지만 그런 형태로 뒤늦게 이 작품을 접하게 된 관객들의 입소문으로 인해 마치 '흙속의 진주'처럼 꽤 괜찮은 영화로 알음알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2017년 7월, 제작된 지 근 7년의 시간이 지나 롯데시네마 단독 개봉의 형태로 부활해서 극장 스크린을 통해 국내 열혈팬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던 작품이 바로 이 '플립'이에요.
개봉 당시 별다른 반향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던 북미 시장과는 달리, 많은 한국 관객들의 '인생영화'로까지 불리며 화려하게 재평가되었던 이 작품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서로 밀당을 주고받는 두 소년소녀의 풋풋한 모습들을 통해 누구에게나 있었을법한 그 '첫사랑'의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어서? 물론, 그것도 맞아요.
하지만 이 작품은 그 뽀샤시 했던 '첫사랑'의 에피소드들에서 더 나아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라는 의외로 가볍지 않은 주제를 밝고, 유쾌하고, 그리고 아주 건강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내내 미소 지으며 지켜보다가 어느새 알 수 없는 눈물 한 방울이 맺히고 영화가 끝난 후에도 그 기분 좋은 여운이 내도록 가슴속에 머무르는 그런 영화, 그게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이었던 것이죠.
항상 부분보다, 그 부분들이 만들어낸 전체를 바라봐야 한단다
그것이 그림이든 사람이든
감정 표현에 솔직한 줄리와, 그런 줄리의 '들이댐'이 부담스럽기만 한 브라이스의 일곱 살 시절 첫 만남으로부터 시작되는 영화는 특이하게도 서로를 바라보는 각자의 1인칭 시점으로 번갈아 진행됩니다. 여타 '첫사랑'류의 작품들에서 이미 봤음직한 일상적인 에피소드들이지만 상황을 완전히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두 아이의 그 시각 차이가 굉장히 코믹해요. 1960년대 미국 시골 마을의 분위기를 충실히 담아낸 그 서정적인 영상만큼이나 엇박자를 내는 이 두 아이의 '밀당'이 내내 절로 미소가 지어질 만큼 귀엽죠.
그렇게 줄리만의 짝사랑으로 6년이 지나고 두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게 되면서부터 영화는 조금 더 시야를 넓혀 '성장'과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특별히 좋아 보이거나 특별히 나빠 보이는 부분들만 부각해서 들여다보지 말고 그 부분들의 합인 전체를 큰 시야로 바라봐야 한다는 말. 처음으로 사랑이란 감정에 설레는 사춘기 딸에게 사람과 인생을 풍경화에 빗대어 부드럽게 전하는 줄리 아빠의 조언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선한 영향'이 얼마나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해요.
비단 그것이 '첫사랑'과 같은 감정에만 국한되진 않겠죠. 살아가면서 특정한 대상에게 느끼게 되는 가치 판단들이 '부분'만을 각인해 고착시켜버린 결과물인지 아니면 그 부분들의 합, '전체'를 폭넓게 바라보며 내린 결론인지 확신할 수 없을 때가 솔직히 더 많았습니다. 때로는 이미 틀린 결론에 다시 원인을 꿰맞추기도 했죠.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우리의 그때 그 시절은 그렇다면 어땠을까요. '첫사랑'이란 이름으로 모든 걸 내어주고도 때론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하는 '세상 쓴맛'(?)을 처음으로 배우기도 했었죠. 한살 두살 어른이 되어가며 생각이 다른 많은 사람들을 접하게 되고, 그렇게 지지고 볶고 싸워가며 그놈의 '사랑'뿐 아니라 더욱더 수많은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깨우쳐야 했습니다. 관계했던 많은 이들과 그리고 접해왔던 많은 것들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지금 우리 각자의 '색깔'들에 다양한 채도로 뒤섞여 들어와 지금의 '나'라는 존재를 완성시키고 있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이 작품은 오히려 끝나고 난 뒤 그 후일담을 더 궁금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귀여운 두 소년 소녀가 결국 작은 오해를 풀고 '첫사랑'으로 맺어질지에 대한 궁금증뿐만 아니라, 이들이 주위 사람들로부터 받은 그 '선한 영향'들을 통해 어떤 어른으로 제각각 성장하게 될지 상상해보게 만들죠. 어떤 시선과 태도로 세상과 그 속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각기 살아가게 될지 넌지시 떠올려보게도 하니까요.
이런저런 경로들을 통해 입소문이 참 좋다고 들었던 작품이었는데도 여간해선 손이 가질 않던 작품이었습니다. 한때 로맨스 코미디와 휴먼 드라마들로 꽤 이름을 날리던 로브 라이너 감독도 이젠 그 재능이 다 소진된 느낌이었죠. 출연진들은 이름 모를 어린 배우들인 데다 심지어 여주인공 줄리의 얼굴이... 개인적으로 불편한 사이였던 어떤 누군가를 많이 닮아보여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어요. 흠흠. 대략적인 시놉시스나 예고편을 통해 예상했던 작품 전반의 느낌도 어릴 적 즐겨봤던 드라마 '케빈은 12살', 혹은 '반올림'과 같은 청춘 드라마의 한 에피소드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히 VOD 영화 채널의 편성표를 이리저리 돌려보다 '드디어' 이 작품을 늦은 밤 혼자 감상하게 되었어요. 복고적이고 서정적인 따스함이 가득한 이 작품에 순식간에 빠져들어 버렸습니다. 전형적인 성장영화의 클리셰들이 엿보이긴 했지만 작품 전반에 듬뿍 담겨 있는 그 '관계'들에 대한 착하고 선한 시선들에 감상하는 동안 내도록 마치 몸속에서 독소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죠. 이렇게 유쾌하고도 잔잔하게 맑은 행복감을 주는 영화를 만난 게 참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더 인물들의 숨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싶은 순간에 영화는 너무나도 아쉽게 마무리되지만 그 착한 여운이 그 뒤로도 며칠간 쭉 가슴에 남겨져 신기할 정도였어요.
이 작품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모두들 분명히 공감하실 겁니다. 이 영화는 브라이스와 줄리의 설레는 그 '첫사랑'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성장'해가는 과정 속의 깨달음들을 통해 사람을,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지를 다시금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고 말이죠.
누구 하나 눈에 띄는 이 없는 낯선 출연진들, 제작비 1400만 달러에 개봉 당시 흥행성적은 고작 175만 달러. 수입도 제대로 되지 못하고 곧바로 TV와 유선, DVD로만 직행해야 했던 영화. 7년 만의 국내 개봉에서도 관객 동원은 '불과' 35만 명. 이 영화 자체도 하나의 그림이라면 이렇듯 작품의 부분 부분들은 그리 빛나지 않아 보이죠. 실은 실패작에 가까워 보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평범한 두 아이의 사랑스러운 성장기를 통해 부분보다 전체의 합이 더 빛나고 가치 있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담담히 보여 주고 있어요. 그런 사람이 되는 것, 그런 사람을 알아보는 깊은 혜안을 키워가는 것, 그리고 좀 더 높은 시선에서 이 팍팍한 삶을 멀리 내다보는 마음을 잊지 않는 것, 그런 관점에서 이 작품을 접해보시면 좋겠어요. 좋은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그 따스한 행복감과, 작은 일상들에서 자연스럽게 전해져 오는 그 커다란 감정의 울림까지. 소년 브라이스가 소녀 줄리의 그 진면목을 결국 발견해냈듯이 이 평범해 보이는 청춘영화의 그 진면목들이 제대로 보이실 거예요. 꼭, 분명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