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안대교를 통해 차를 몰아 출퇴근을 합니다. 마블 히어로인 블랙팬서가 영화 속에서 통행료도 안 내고 질주하며 차를 몇대나 박살 냈던 바로 그 광안리 바다 위의 랜드마크죠. 특히 아침 출근시간엔 징그러울 정도로 상습 정체되는 곳이라 저는 매일 바다 쪽 가장자리 차선에서 거의 기다시피 서행을 해요. 그냥 걸어가는 거나 마찬가지인 느린 속도로 앞 차 꽁무니만 보며 그렇게 졸졸졸 차를 몰다보면... 정말 멍하니 운전대만 붙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문득 차 운전석 창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대교의 난간 저 아래로 파란 바다가 눈에 훅 들어와요. 대교의 높이가 생각보다 꽤 높아서 햇살에 반짝거리며 넘실거리는 저 넓은 바다가 정말 거기에 있는 건지 종종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가끔씩은 그 비현실적인 바다를 내려다보다 홀린 듯이 연달아 비현실적인 생각에 빠져들곤 하죠. 마치 먼바다 남태평양의 풍경처럼, 물 밖으로 원을 그리며 수많은 돌고래들이 일제히 튀어 오르는 그런 상상들. 딱 그 순간에 맞춰서 재빨리 소원을 마음속으로 빌면 뭔가 특별한 일, '기적'이 일어나진 않을까라며 생각이 이어지다 피식 웃고만 적이 종종 있었어요. 기적이라... 당장 제게 필요한 기적은 뭘까하고 상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로또? 8백만분의 1이라는 그 기적적인 확률로 1등에 당첨된다면 진짜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 있을까요. 사업 할 체질은 못되니 어디 목 좋은데 건물을 하나 사서 임대료를 받으면 당장 생계 걱정은 덜겠지, 그래도 몰래 계속 회사는 다니는 게 나을까, 아니야 그래도 조금이라도 일찍 내 일을 시작해보는 게 낫지라며 혼자 중얼거리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죠. 점점 막 신나지고 있어요.
한데 해수욕장 인근, 그것도 길게 쭉 뻗은 대교 바로 아래에서 수많은 돌고래 떼가 물 위로 튀어 오를 확률은...
흐뭇해하며 상상했던 로또 1등 당첨의 그 확률만큼이나 일어나기 힘든 일입니다. 그리고 그걸 제 눈으로 설령 목격한들 그것과 복권 당첨이 뭔 상관이 있을까요. 그저 막히는 차 안에서 멍 때리고 있는 어느 월급쟁이 아저씨의 근거 없는 희망사항일 뿐.
그러니 특별한 일이 없다면 저는 여전히 매일 아침마다 정체되는 이 자동차의 긴 행렬 속에서 멍하니 앞 차 꽁무니만 따라가며 차를 서행하고 있을 겁니다. 제가 바라는 그 기약 없는 '기적'이 어느 날 그렇게 불쑥 찾아올리는 만무하잖아요.
할아버지, 도대체
이 떡은 무슨 맛으로 먹어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11년도 작품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선 일본 가고시마 지방의 특산물인 '가루칸'떡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왜 저렇게 저 떡에 관해 적잖은 장면들을 할애할까 싶을 정도로 꽤 비중 있는 소품으로 다뤄집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나라의 백설기를 떠올리는 그저 단순한 모양새예요. 그럼 맛은 뭔가 또 특출난 건가 싶은데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묘사에 따르면 그저 단순하고 밋밋한 맛, 혹은 자극 없이 심심한 맛에 불과하다고 해요.
어떻게 보면 이 작품 자체가 그 '가루칸'떡과 같은 느낌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걸어도 걸어도',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같은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감독 특유의 스타일을 충분히 감안한다고 해도 이 작품을 처음 접하신다면 중반부까지의 내용은 꽤 심심하고 단조로울 수 있어요. 몇 년 전에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때, 솔직히 살짝 졸음이 몰려와 몇몇 장면들을 놓쳐버리기도 했습니다. 전통 방식으로 가루칸 떡을 빚어오던 영화 속 외할아버지가 그 떡 맛이 어떤지 물어보면 아이들뿐 아니라 심지어 동년배 어르신들까지도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하죠.
"무슨 맛인지 모르겠어. 너무 밋밋한 맛이라."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처음 감상했던 그때, 거의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제가 받았던 이 작품의 첫인상도 솔직히 그랬었나 봐요. 극적인 서사나 갈등 구조, 명확한 기승전결 구조로 진행되는 내러티브라기보단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무덤덤한 일상의 단편들을 조금씩 떼어내 그대로 나열해놓은 느낌.
바로 그 느낌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쿠라 열차가 260km로 위쪽으로 달려가고
츠보미 열차도 260km 속도로 내려오고
두 열차가 처음 서로 마주 스치고 지나갈 때,
기적이 일어날 거야.
그걸 직접 보는 사람들은 별똥별처럼
소원이 이루어질 거야".
이 작품은 마주쳐 달려오는 두대의 신칸센 열차가 서로 양방향으로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 장소에서 직접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면 각자 꿈꾸는 '기적'이 일어날 거라 믿는 아이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일곱 명의 아이들 중에서도 이야기의 중심은 헤어진 아빠 엄마를 따라 제각각 먼 지방에 따로 떨어져 살고 있는 두 형제 코이치와 류노스케에 맞춰져 있죠. 두 아이는 가고시마 인근 활화산에 대폭발이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나면 그곳에서 살 수 없게 된 엄마가 후쿠오카의 아빠에게 찾아가 가족 모두가 합쳐질 거라 믿고 있어요. 그 '기적'을 위해선 두 열차가 정확히 서로 마주치는 그 장소를 찾아가야 합니다. 학교도 몰래 땡땡이쳐야 할 거고 비싼 왕복 기차 요금이나 밥값도 몰래 마련해야 하죠. 심지어 하룻밤 정도는 어디선가 길거리에서 노숙을 해야 할지도 몰라요.
근데 두 아이의 이 조마조마한 일탈에 각자 절실한 '기적'을 바라는 다른 친구 녀석들이 끼어들었습니다.
화산이 터져 아빠, 엄마, 가족들이 다시 함께 한집에서 살게 되는 것,
짝사랑하는 예쁜 선생님과 결혼하는 것,
이치로 선수 같은 훌륭한 야구 선수가 되는 것,
소심한 성격을 극복하고 여배우가 되는 것,
그림을 잘 그리게 되는 것,
그리고 세계 최고의 팽이 놀이 일인자가 되는 것.
언제나 걱정이 많고, 체념한 듯 무표정하게 살아가는 어른들에게는 모두 하찮고 시답잖은 '기적'들에 불과하겠지만 영화 속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이 '기적'들을 빌기 위해 진심을 다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거죠. 그 모습들은 마치 내내 등장하던 '가루칸' 떡처럼 극히 밋밋해 보이기도 합니다. 한데 아이들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영화의 중반부쯤에서부터 서서히 가슴속에서 뭔가 뜨겁고 벅찬 감정들이 슬슬 올라오기 시작해요. 마치 소리 없이 서서히 달궈진 물이 어느 시점에 이르러 보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것처럼, 그렇게 은근히 말입니다.
'기적'에 대한 간절함으로 그 장소까지 어렵사리 찾아간 아이들은 그럼 온전히 그 소원들을 제대로 빌었을까요? 어떤 아이는 자신의 원래 소원을 외쳤지만 또 어떤 아이는 그 순간 느닷없이 전혀 다른 내용의 소원을 외칩니다. 아빠엄마의 재결합을 위해 이 '기적 원정대'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형 코이치도 막상 아무것도 빌지 않고 그저 멀어져 가는 그 열차들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죠.
뭐가 달라졌을까요. 두 대의 기차는 그렇게 총알 같은 속도로 스쳐 지나갔고 아이들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바뀐 게 없어요. 냉정히 말해서 이 영화의 장르가 판타지나 SF가 아닌 한, 지나가는 기차에다 대고 시답잖아 보이는 소원들을 외쳤던 아이들의 행동은 아무 의미 없는 바보 같은 짓에 불과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그저 그런 걸까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작품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기적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적이 없다고 깨닫고 돌아오면서, 일상이 기적임을 깨닫는 과정"이라고 말이죠. 무심히 각자의 가방을 챙겨 함께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모습들은 예전과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 보이지만... 막상 그런 아이들을 지켜보는 우리의 마음이 뭔가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달려오던 두 신칸센 열차가 스쳐 지나가던 순간, 정지된 화면 속에 쭉 되짚어지던 스쳐간 일상의 작은 '기적'들에 서서히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하죠. 이윽고 아이들이 거기다 외치던 그 간절한 '소원'들 하나하나가 울컥 가슴을 차오르게 만드는 겁니다.
대체 '어른이 되어간다'는건, 어떤 걸까요.
나이를 먹어가며 더 많은 걸 얻고 이뤄왔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반대로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동시에 잃어버리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각자 집으로 돌아간 영화 속 아이들의 현실은 예전 그대로인 듯 담담하지만 분명히 이 작품을 바라보던 우리들의 시선은 아이들의 그 미세한 '변화'만큼이나 분명히 처음과는 다른 느낌입니다. 그리고 다시 굉장히 궁금해지죠. 영화의 말미에서 두 형제가 꼬깃꼬깃 다정히 나눠 먹던 하얀 '가루칸' 떡의 맛. 아이들 표현대로라면 진짜 '어른'만이 제대로 알 수 있다는... 바로 그 맛 말이에요.
형은 이 떡이, 맛있어?
그럼, 이건 어른들만이 알 수 있는 거거든
"아빠, 무슨 영화 봐요?"
여느 때처럼 멍하니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던 어느 날 밤, 문득 이 영화가 떠올라 혼자서 거실에서 DVD를 틀어놓고 감상 중이었습니다. 영화 속 아이들이 소원을 외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끝 장면쯤에서 아들램이 방에서 나와 화면을 힐끗 바라보며 제게 뭐 보고 있냐고 물었었죠.
'쟤들이 저기서 각자 바라던 기적을 빌고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라며 간단히 말해줬더니 '아 그렇구나'하고 별 흥미 없다는 듯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 하더군요. 그때 제가 문득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니가 저기 같이 갔다면, 무슨 기적을 빌었을 거 같아?"
그러자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들램은 그렇게 대답했어요.
"당연히, 우리 고양이 많이 아픈 거 다 낫는 거죠."
영화 속 꼬마들과 영화 밖 아들램에게 동시에 한방씩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광안대교 아래에서 수많은 돌고래 떼가 물밖으로 튀어 오르는 순간에도 제가 막상 떠올릴 '기적'은 그놈의 '로또 1등'이 다였는데... 이 아이들에게 '기적'은 전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시선 자체가 다르죠. 사실 천지가 개벽하는 '기적' 그 자체보다도, 그 '기적'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들이 우리에겐 더 '기적'처럼 와 닿는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이 작품은 무심히 흘려보냈던 바로 그 순간들을 서서히 스며들듯 다시 떠올리게 하고 있는거죠.
지금도 여전히 매일 아침 출근길 광안대교는 마치 거북이 기어가듯 정체 중입니다. 그 맨 가장자리 끝 차선에 저도 늘 그대로 끼어 있어요. 한데 가끔씩은,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그 바다가 유독 파랗게 빛나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저 멀리 파도 한가운데 돌고래 같은 뭔가가 살짝 튀어 오른 거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해요. 그런 날엔 또 신기하게도, 아직 먹어보지 못한 그 맛이 입속에 머금어지는 느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