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3대 첫사랑 영화로 손꼽히는 위 세 작품 중에서 지금껏 감상해본 건 두 작품이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은 블로그 초창기 시절에 리뷰를 쓰기도 했었죠. 화사한(?) 학창시절의 섬세한 심리묘사들뿐 아니라 배우 주걸륜이 직접 도맡았던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 장면들,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판타지적 구성이 더해져서 당시 국내에서도 꽤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어요. 저 3대 첫사랑 작품 모두, 빡세게 집과 학교를 오갔던 고등학교 학창시절을 주로 다루고 있는 학원 청춘물의 범주에 들어갈 겁니다.
하지만 엇비슷한 장르의 카테고리 내에 있긴 하지만 이 작품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주걸륜, 계륜미를 스타덤에 올려놓았던 그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과는 좀 다른 느낌이에요. 시간대를 교차하는 타임슬립 서사와 매혹적인 피아노 멜로디로 '첫사랑'이라는 주제를 판타지적 감성으로 극대화한 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면, 이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인 일상 그 속의 감정들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내내 아이돌 가수처럼 샤방샤방했던 주걸륜의 모습과는 달리 이 작품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속 캐릭터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라서... 몇몇 에피소드들에선 살짝 거부감이 느껴진다고 하는 의견들도 있었죠. 정말 저때 남자애들이 저렇다고? 라며 고개를 좀 갸웃거릴 수도 있습니다.
두 주인공 남녀와 친구들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각자 대학을 졸업하고 막 직장인이 되기까지 약 8년간의 시간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 속엔 시공간이 뒤집히는 샤랄라한 판타지, 기적들과 같은 그런 극적 전개들은 없어요. 그건 기본적으로 이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가 대만의 소설가이자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인 구파도의 자전적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청춘 기록들을 2005년부터 잡지에 연재했던 것이 큰 인기를 얻게 되자 2011년 여름에 단행본을 출간하고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를 동시에 개봉시키며 큰 히트를 치게 된 거였죠. 작가였던 구파도가 영화의 각본과 감독을 스스로 맡아 더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이 자전적 첫사랑 이야기에 보다 더 살아있는 '리얼리즘'을 불어넣기 위해서 감독은 실제 자신의 모교에서, 당시 입었던 교복까지 그대로 재현해 촬영에 임했다고도 해요. 주요 인물들의 이름에 실제 지인들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각 캐릭터들의 심리 변화와 감정 흐름들이 더 현실적으로 체감되죠. 누구에게나 충분히 있었을법한, 있음직했던 그런 '감정'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바로 이점에서 또 다른 첫사랑 히트작인 <말할 수 없는 비밀>과는 영화를 감상하며 전해져 오는 그 아련함들이 미묘한 차이를 갖기도 해요. 이 작품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누군가의 '첫사랑'을 알콩달콩한 에피소드들로 그려내고 있는 청춘 학원물이기도 합니다만 실은 그런 감정들로 울고 웃고 슬퍼하고 좌절하곤 했던 그때, '그 시절' 자체를... 어쩌면 더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분명 차이가 느껴지는 것이죠.
이런 모습들이
무용담처럼 느껴지던 그때,
'유치함'과 '멋짐'의 아슬아슬한 경계
1994년, 대만 장화시의 한 남녀공학 고등학교.
공부와는 아예 담쌓은듯한 문제아 커징텅(가진동)과 단짝 친구들이 하나씩 소개되며 영화가 시작됩니다. 늘 발기가 된 상태로 볼썽사나운 꼴로 돌아다니는 녀석, 전형적인 뚱보 캐릭에 은근히 여러모로 응큼한 구석이 있는 녀석, 운동 잘하는 훈남 스타일이자만 얼굴값 하느라 허세 작렬하는 녀석, 짓궂은 농담에다 항상 사타구니를 만져대서 별명이 '사타구니'인 녀석까지. 구파도 감독의 자전적 첫사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만큼 작품 속 저 친구들도 실제 친구들의 모습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굉장히 커 보이죠. 이 친구들의 '원초적인' 모습들만 보자면, 꽃미남 아이돌 연습생들로만 가득 채워놓은 듯한 전형적인 학원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들과는 그 때깔부터 달라 보입니다. 사실 수업 중에 여선생님을 보며 책상 아래로 못된 손장난(?)을 하는 에피소드를 굉장히 우스꽝스럽게 연출했던 그 도입부 장면 역시도,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반면에 또 비현실적이기도 해요. '성'에 한참 눈 뜨기 시작하고 그래서 걸어 다니는 '페로몬 덩어리'나 마찬가지였던 중학교 시절 친구들의 그 적잖은 '기행'들을 떠올려보면 말입니다, 실제로 목격하기도 했던 그 손장난뿐만 아니라 더 기상천외한무슨 짐승들인가 싶을 정도의그런 낯 뜨거운 기억들도... 분명 실화로 남아 있긴 하죠.
여하튼 이런 류의 장면들이 없잖아 계속 중간중간 보이는 바람에 대만 현지에서나, 중국, 그리고 국내 개봉 시에는 일부 장면들이 편집되어 상영되기도 했어요. 이렇게만 보면 말입니다 이 작품은... 반짝반짝한'첫사랑' 영화라기보다는 대만판 '몽정기'에 더 가깝지 않나 싶지만 어쨌든 그로 인해 영화의 전체적 분위기는 한층 더 현실에 와닿게 느껴지는 효과가 분명 있긴 했죠. 저 나이 즈음에 감미롭게 피아노를 연주하며 사슴 같은 눈망울로 우수에 젖는 그런 미소년 남학생? 그런 외계 생물체는, 애당초 이 작품속엔 없으니까요.
하고 싶은 대로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세상은 신나고 즐거운 일이 더 많을 거라 생각했지만
실은 가슴 아플 일이 앞으로 더 많으리란 걸,
때론 시렸던 기억들이, 우릴 더 빛나게 하니까
미적분, 골치 아픈 관계대명사 따위 그런 거 몰라도 평생 살아가는데 별 지장 없을 거라 생각하는 커징텅(가진동)은, 자신의 '기행'들을 한심하게 보는 선생님이나 학급 친구들의 그 눈초리들마저도 마치 훈장처럼 여깁니다. 지금 떠올려보면 남에게 보이기 싫었던 불안함을 사실 그렇게 표출했던 경우들이 많았고, 그렇게 불안함이 지속될수록 더 '유치한 짓'들에 열중하기도 했을 거예요. 전교 상위권의 모범생에다 얌전한 여학생 션자이(천옌시)의 눈에 그런 커징텅의 모습이 눈에 찰리는 당연히 없겠죠. 반대로 그런 션자이의 모습이 재수 없기는, 커징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상반된 스타일의 두 사람이 우연히 서로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배우다 뭔가 썸 탈 듯 간질간질 밀당하고, 오해하고 싸우고 헤어져요. 뜨겁게 불타오르며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뺨 때리며 과격하게 확 헤어지는 것도 아닌 그런 둘의 모습이 고등학교 시절로부터 대학교, 그리고 사회 초년생 무렵까지 쭉 이어지죠. 꽤나 터프한 남학생으로 그려지던 커징텅이 마음 표현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무기력하게 션자이를 놓쳐 버리고 찔찔 짜는 걸 보고 있자니 '쟤가 왜 저 시점에 저렇게 참 바보 같냐'라는 탄식이 나오기도 합니다. 근데 나도 그랬잖아
물론 극 후반부, 헤어진 한참 후에 서로의 지난 마음을 확인하는 달달한 장면과 대사들이 이어지긴 합니다만... 전반적으로 이 작품은 실은 그동안 봐왔던 수많은 학원 청춘드라마의 한 에피소드에 불과해 보이기도 해요. '첫사랑'의 판타지를 더 극대화해 줄 수 있는 장치들, 가령 불치병, 급작스러운 죽음,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 출생의 비밀, 혹은 환상적인 시간여행과 같은 양념들이 전혀 없습니다. 엉성하고 어설프게 그 '첫사랑'은 명확히 시작되지도 못했고 그리고 칼로 무 베는 것처럼 정확하고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지지도 않아 보이죠.
이렇게만 보면 '내 얘기, 우리 친구들의 얘기도 뭐 이렇게 쓰겠는데?'라는 생각까지 들어요. 바로 이런 느낌이... 이 영화의 매력 포인트라고 봅니다. 비단 커징텅과 션자이, 둘의 꽁냥꽁냥한 그 '첫사랑'에만 국한되지 않죠. 뭘 위해서, 어떤 의미로 그렇게 교과서를 들여다봐야 하는지 잘은 몰랐지만 우린 모두 새벽과 밤하늘 별을 바라보며 열심히 학교를 오갔었습니다. 공부를 하든, 혹은 땡땡이치며 딴짓을 하든 그 뭔지 모를 막연한 불안감은 항상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었죠. 학교와 친구, 그리고 그 지긋지긋한 시험만이 세상의 전부로 여겨지기도 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전기에 감전되듯 누군가 가슴속에 슝하고 들어옵니다. 날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처음으로 다른 사람 때문에 잠 못 이루며 눈물 콧물 짜내며 아파하다가 정신 차려보면... 이미 그 사람에게 너무 미안할 정도로 수많은 '삽질'을 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거죠.
네, 분명 그 '첫사랑'만이 아니었어요. 채 준비되지 않은 채 하나씩 맞부딪쳐야 했던 '그 시절'의 모든 감정들, 고민들, 관계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유치함'과 '짓궂음'이 그렇게 영원히 방어막이 되어주진 못한다는 사실과, 하나를 얻기 위해선 대신 다른 여러 개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단 걸 조금씩 깨쳐갔었죠. 그래서 이 작품은 알려진 바와 같이 구파도 감독 본인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영화를 지켜보는 우리들 모두의 '실제 이야기'이기도 한 거예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그 소녀'에 관한 영화로만 보이지만, 실은 그 소녀를 좋아했던 '그 시절' 전체를 살며시 다시 그려내게 하는 바로 그런 이야기인 셈이죠.
그 '첫사랑' 만큼이나 그리워지기도 하는
따분하고 지긋지긋했던, 저 시간들
그때만큼 다시 한번, '유치'해져 볼 수 있을까
영화 속 주인공 커징텅과 친구들의 뻘짓들이 참 '유치하다'라고 수차례 이야기했습니다만 실은 '그 시절' 저와 제 친구 녀석들의 모습도... 크게 다르진 않았을 거예요. 지금은 부실한 건강들 챙기느라 모두 다 끊었지만 그땐 '쎄보이려고' 이빨 사이로 찍찍 침 뱉는 소리를 내며 골목길에 둘러앉아 줄담배를 피워댔습니다. 구름도넛을 누가 더 잘 만드는지, 누가 주윤발처럼 라이터불을 잘 들이마시는지 겨루기도 했죠. 하늘색 교복 와이셔츠가 구려 보인다고 각자 아버지의 흰색 양복 와이셔츠를 가방에 숨겨 뒀다가 방과 후 담벼락 밑에서 후다닥 갈아입고 인근 여고 앞을 어슬렁거리기도 했어요. 용돈 쪼개 모은 돈으로 부산 서면 뒷길 모 나이트를 들락거리면서 그곳 화장실에서 향수 뿌려주고 만원 팁 달라고 서 있던 웨이터 형아들이 무서워 마칠 때까지 소변을 참으며 토끼춤을 쳐댔던 때가, 바로 저와 제 친구들의 '그 시절'이었으니까요. 영화 속 커징텅과 그 일당들처럼 동시에 한 여학생을 똑같이 좋아해서 서로 마음 상하기도 했고, 때론 서로 잘 되라고 밀어준답시고 한 몸 바쳐 희생해주는 신사도(?)를 발휘하기도 했었습니다. 뻥 차이고 며칠을 질질 짜기도 했을 테고 세상에 여자는 얼마든지 또 많다며 우는 녀석 등 두르려 주기도 했을 겁니다. 과연 철들고 진지해질 날이 올 수 있을까 싶었던 저를 비롯한 그 친구 녀석들 모두... 지금은 어떨까요. 특허청 사무관, 데이터 분석가, 무역업자, 전기회사 팀장, 금융회사 부장, 세무 공무원 등등. 웃음끼 쫙 뺀 근엄한 얼굴로 어쩌면 지금쯤 꼰대 소리 들어가며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빠로 그 나름 잘 버티고들 살아가고 있을 거예요.
이 작품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청춘'들도 그러해 보입니다. 세상에 오로지 단 하나의 길, 단 하나의 정답만 있어 보였지만 오히려 견고한 울타리를 벗어나 겪어 왔던 진짜 세상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첫사랑', '첫시험', '첫도전'들이 무너진다고 세상이 그렇게 함께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도 결코 아니었죠. 아쉬움과 후회, 서글픔, 애잔함. 그것만이 '첫사랑'의 본질일까요. 어버버 하다가 놓쳐버리게 되는 그 '첫사랑'으로 인해 말입니다, 정말 귀하고 소중한 걸 그렇게 다시 잃지 않으려면 대체 뭘 하고, 또 뭘 하지 말아야 할지 '뼈저리게' 배웠던 셈이에요. 돌아보면 그 시절 겪었던 많은 감정들이, 많은 고민들이 다 그러했던 거 같습니다. 심지어는 그 시절 그 찬란했던 '유치함'과 '시답잖음'들이 실은 평생을 살아가며 함께 장착해야 할 이 무거운 진지함과 엄숙함의 귀중한 양분이 되기도 한다는 것 또한... 그땐 전혀 몰랐었지만 말이죠.
무겁게, 깊은 의미 부여해가며 심각히 볼 영화는 전혀 아니에요. '사랑이 아니면 죽음이야'를 외치는 가슴 미어지는 애절한 순애보나, 몇몇 캐릭터 죽어 나갈 만큼 뜨거운 활화산 같은 그런 첫사랑 이야기도 아닙니다. 유치하고 서투르고 어설펐던, 아련한 '그 시절'에 관한 떠올림으로 감상하시면 의외로 꽤마음에 드실 거예요. 한편으론, 나이 먹고 언제든 다시 만나도 예전의 그 '유치찬란함'으로 순식간에 돌아가게 만드는 그런 친구들이 그리워지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