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의 속도로 살아가야 하는가

"초속 5센티미터"

by 그레이프


'초속 5센티미터' OST.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












' 지금 돌아보면

저 사람도 틀림없이

돌아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그날처럼 흐드러지게 벚꽃잎이 떨어지는 철길 건널목.

문득 옆을 스쳐 지나간 한 여자의 모습에서 이제는 기억 속에서만 남겨진 그 '여자아이'를 느꼈습니다. 지금 내가 뒤돌아본다면 저 여자도 나를 뒤돌아볼까요. 이 순간 그녀도 나와 똑같은 생각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렇게 뒤돌아 서로의 눈이 마주치게 되면, 어떤 말을 할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녀를 바라볼 내 표정이 어떨지도 미처 생각해 본 적 없죠. 그대로 잠시 계속 서 있었어요. 흩날리는 벚꽃잎 하나가... 하늘하늘 흔들리며 내 어깨 위에 살며시, 내려앉을 때까지.
















'벚꽃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속도가 초속 5센티미터'라는 대사로 시작하는 극장판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네 번째 연출 작품이었습니다. 시나리오에서부터 작화, 연출, 음악 전반에 이르기까지 1인 제작 시스템으로 꽤 유명했던 감독이었죠. 거의 실사에 버금가는 극강의 작화 속에 그 특유의 쓸쓸함을 더 짙게 담아냈던 이 작품의 소재는 일본의 청춘물에서 흔히 다뤄지는 '첫사랑'이었어요.


유년기에서부터 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일상에 찌든 직장인으로서 현재를 살아가는 주인공 토오노 타카키의 관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의 독백에 가까운 나레이션들이 작품을 가득 채우고 있어요. 아련했던 첫사랑의 추억과 그 첫사랑의 상실로 인한 오랜 상처, 그리고 그 속에 흐르는 극히 미세한 감정 변화들을 세편의 독립된 옴니버스 단편들로 잔잔히 그려내고 있죠. 툭툭 끊기는 듯했던 그 세 개의 이야기가 다시 하나의 흐름으로 귀결되는 그 결말의 여운이 또한 굉장히 인상 깊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특히 두 주인공 타카키와 아카리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마지막 세 번째 에피소드의 그 쓸쓸한 결말과 연결되어져야 비로소 감정적으로 완벽히 완성되는 느낌이에요. 주제곡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와 함께 두 사람의 과거, 현재의 모습들이 마치 뮤직비디오처럼 교차 편집되던 그 5분여의 마무리가 주는 여운이 바로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나 다름없습니다. 굉장히 묘한 느낌이 들어요. 어느 순간 접점을 지나쳐 점점 더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먹먹하면서도 한편으로 가슴이 벅차오르죠. 굉장히 쓸쓸한데 또 동시에 아련히 설레게 만듭니다. 그 양가적 감정들이 신카이 마코토 감독 작품들에 묻어있는 독특한 시그니쳐예요. 그중에서도 이 <초속 5센티미터>는... 가장 독보적인 아우라를 풍기고 있습니다.












세편의 에피소드들을 관통하는 주요한 키워드는 물론 '첫사랑'이에요. 그 '첫사랑'으로 인한 설렘이나 그리움 혹은 회한과 같은 감정들. 한데 그게 다가 아닌 듯해요. 좀 더 폭넓은 관점에서 우리가 보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들을 돌아보게 합니다. 느릿느릿 아주 천천히, 말 그대로 초속 5센티미터의 속도로 흘러가고 있지만 돌아보면 어느새 훌쩍 스쳐 지나가 버린 것들에 대한 애잔함과 아련함 들을 떠올리게 해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모든 작품들에 본질적으로 담긴 가치이자 미덕이기도 합니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이진 않아요. 잊고 지냈던 오래된 사진첩을 열어보는 느낌이죠. 그 빛바랜 사진들 속 정경들은, 그저 여러 색깔들의 단순한 이미지 조합만은 아니잖아요. 우리가 흘려보냈던 소중한 한때의 모습과, 그때의 풍광, 그리고 그때의 감정들이 그 한 장의 종이 안에 한데 어우러져 담겨 있습니다. 오히려 그땐 미처 알지 못했던 그 순간의 '의미'들이 그 사진들을 통해 다시 가슴에 와 닿곤 하죠. 그럴때가 있어요. 일상의 한 틈바구니 속에서 불현듯 나를 멈춰 세우게 하는 순간들. 이 작품 <초속 5센티미터>는... 무심히 늘 지나는 길, 늘 바라보던 풍경속에서 아련한 감정들이 일렁이는 바로 '그 순간'들을 담아내는 작품인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보기에 따라선, 이 작품이 언뜻 쓸쓸하고 허무하게만 보일지는 모르겠어요. 인물들의 나레이션들은 때론 감정이 흘러흘러 넘쳐 현학적으로 느껴질 법도 하고, 그 의식의 흐름들과 무관하게 나열되는 배경 이미지들은 그저 공허해 보이기도 합니다. 미완성으로 보이죠. 한데 바라보는 이의 감정들로 그 빈 공간들이 이내 채워져요. 지켜보는 이의 개인적인 기억과 경험들, 그리고 추억들이 함께 녹아들어가 비로소 감정적으로 완성되는 굉장히 독특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비록 불완전한 망상이나 몽상에 불과하다 해도 상관없어요. 극 중 타카키의 독백처럼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 살아가는 이 순간들에도 슬픔이 내 주위 여기저기에 층층이 쌓이는 걸 느껴본 적이 있다면... 분명 채워질 겁니다. 당신의 그 이야기로도 이 쓸쓸한 작품의 여백들이 메꿔지고 채워져, 비로소 완성되는 거니까요.














이 작품 속에서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 '초속 5센티미터'는 결국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설렘의 속도이면서 또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속도였습니다. 동시에 누군가를 서서히 놓아주고 잊어가는 속도이기도 해요. 그리고 어느새 꽃잎이 지고 난 쓸쓸한 벚꽃나무의 모습처럼, 아쉽게 흘려보내는 우리 삶의 속도 이기도 하죠. 생각해보면 그랬습니다. 천지가 개벽하는 일 없이 그저 비슷하게 되풀이되는 인생인 듯 싶지만 어느새 세월이 흘러 어떤 순간들과 그때의 감정들을 떠올려 보면... 그 평범했던 일상들과 작은 감정들이 오히려 '살아간다는 것'을 비로소 의미있게 만들어주곤 했으니까요. 활짝 핀 꽃잎들은 떨어지지만 시린 겨울 끝에 늘 봄은 다시 찾아오고, 우리 삶은 그렇게 초속 5센티미터로 변함없이 나아가고 있어요. 이별을 놓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버린 한 남자의 이 첫사랑 이야기 <초속 5센티미터>는 무심히 지나치고 살았던 것들에 대한 그리움, 무의미해 보이는 평범한 것들에 대한 아련함을 새삼 떠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잊은 채 멀어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나의 사람들과 감정들까지도 다시 고개 들어 돌아보게 해주기도 하죠.


마치 사진처럼 화사하게, 극사실적으로 그려지는 배경 이미지들과는 달리 '점점 더 멀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뤘던 신카이 마코토 작품답게, 이 작품의 결말 또한 관점에 따라선 지극히 현실적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 결말이... 불편하거나 안타깝게만 보이진 않아요. 오늘과 같은 내일을 계속 맞겠지만 더 이상 그가 그 짙은 슬픔들을 곁에 켜켜이 쌓아두진 않을 거니까. 그래도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의 모습처럼, 앞으로의 토오노 타카키도 그러할 겁니다.

마지막 순간에 그가 보여준 입가의 엷은 미소에서 느껴지듯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앞서지도 너무 쳐지지도 않는 가장 적당한 그 삶의 속도로, 그도 이젠 나아갈 거예요. 굳이 애써 결론 내리며 살진 않아도 될 겁니다. 아니 오히려 정확히 결론 내려지지 않아서 더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이 우리에겐 더 많잖아요. 굳이 그게 저 '첫사랑'만은 아닐지라도.










그 남자, 토오노 타카키가

철길 건널목을 지나쳐 와 뒤를 돌아본다면

반대편에 멈춰 서 있던 그녀도

과연 뒤를 함께 돌아볼까요.

하지만 이제 그건,

그에게 그다지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렇게 너를 잊어가고

그렇게 너를 떠나보내는 나의 속도,

초속 5센티미터.



















* 위 이미지들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며

모든 이미지들의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에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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