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레이프 Apr 16. 2021

가슴이 비었다면, 머리는 소용없다

영화 "제리 맥과이어"











            " Fewer clients, Less money.'










  최고의 스포츠 에이전트 회사에서 72명의 선수를 관리하며 하루에만 246건의 전화 통화를 하는 협상의 귀재 제리 맥과이어(톰 크루즈).  부와 명예, 빛나는 미래, 매력적인 약혼녀까지 다 가진 그가 어느 날 스스로의 인생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공허함과 자책감, 직업에 대한 깊은 회의로 몸부림치던 어느 날 밤, 귀신에 홀린 듯 격정에 젖어 장장 25페이지의 업무 기획서 하나를 뚝딱 써 내려갔죠.  

더 이상 선수를 돈으로 보지 말고, 이익을 줄이더라도 그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지향하며 더 나아가 사회에 더 큰 이익을 환원해야 한다는 감동적인 내용들이 그 속에 가득했어요.  그 길로 회사에 출근해 밤 새 기획서를 복사합니다.  그리고 그 따뜻하고 인간적인 기획서를 출근하는 모든 들에게 공람시켰죠.  모든 동료들이 그에게 엄지를 치켜세우며 열렬한 박수를 보냅니다.  모두들 얼굴에 미소가 가득해요.  뭔가 달라지는 분위기.  그렇네요.  일주일 뒤 바로 효과가 나타납니다.  열렬히 박수받던 제리 맥과이어는... 깨끗이 해고되죠.  실업급여도 없이 바로 뎅강 짤렸습니다.  다름 아닌 그놈의 기획서 때문에.      


  보장된 출세를 향해 실은 더 가열차게 달려야 했어요.  한데 엉뚱하게도 그는 바로 그 타이밍에 멈춰 서서 스스로의 삶과 성공을 뒤돌아 봤습니다.  그 '뻘짓'의 대가는 가혹했죠.  호시탐탐 그의 자리를 노리던 경쟁자들의 비웃음과 조소를 등 뒤로 받으며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어요.  추락의 속도는 상승의 속도보다 곱절로 빠릅니다.  마치 손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수많은 고객들과 동료, 친구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졌죠.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샀던 매력적인 약혼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충격에 빠져 있는 그의 멍한 얼굴을 매섭게 후려갈기고 돌아서는 그녀도, 차갑게 한마디를 내뱉었어요.


"루저 새끼."





  













  프로 스포츠 선수들과 그들을 관리하는 에이전트들이 등장하지만 엄밀히 따져서 스포츠 영화는 아니었어요.  메이저리그 야구단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구단주 빌리 빈이 주인공이었던 영화 <머니볼>도 그랬습니다.  늘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하는 우리 인생에 관한 이야기였죠.  이 작품 <제리 맥과이어>도 따지고 보면 같은 맥락에 있지만 그보다는 좀 더 멜로적 요소가 강합니다.  훨씬 더 밝고 경쾌하게 그려졌어요.

  

  잘 나가는 최고의 에이전트였던 제리 맥과이어(톰 크루즈)가 어느 날 패배자로 내려앉은 뒤에 원점에서부터 일과 사랑, 성공과 행복에 관해 돌아보게 되죠.  비웃음의 대상이었던 그 '착한' 업무 기획서의 내용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바닥에서부터 다시 고군분투하는 내용입니다.  그 기획서의 인간적인 내용들에 매료되어 엉겁결에 함께 사표를 쓰고 따라나섰던 싱글맘 도로시(르네 젤위거)의 이야기와,  한물간 퇴물이지만 마지막까지 제리와 함께 하는 미식축구 선수 로드(쿠바 쿠딩 주니어)의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지죠.  꽤 눈에 익숙한 서사입니다.  따스한 멜로와 달달한 로맨스, 배꼽 잡는 유머와 위트가 버무려진.  그럼에도 늘 이 익숙한 스토리들을 한 번씩 눈으로 '확인'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당연한 것들과 익숙한 것들이 새삼 우리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러 올 때면... 실은 더욱 그러할 겁니다.


  물론, 우리의 현실은 '착하고 알흠답기만한' 멜로 영화는 아니죠.  최대한 팔아제끼고 실적을 쌓아도 살아남을까 말까 하는 저 치열한 싸움터에서 이익을 줄여서라도 배려와 신뢰로 인간관계에 열중하자니.  잘 나가는 제리 맥과이어처럼 잃을 것도 별로 없습니다만 회의석상에서 제가 저런 비슷한 소리를 늘어놓는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본 적이 있어요.  차디찬 냉소가 곧바로 돌아올 겁니다.  뭐 지금 잘못 먹었냐고도 하겠죠.  그 나이 먹고 개념이 그리 없냐고 면박을 들을지도 모르겠어요.

  

  한참 피 끓는 시절엔 세상이 원래 그래야 하지 않냐고 분노하기도 했을 겁니다.  한데 지금은 이리저리 생각들이 많아졌어요.  여간해선 줄지 않는 주택담보 대출금의 중도이자가 머릿속에 떠오를 때면, 이것저것 다 떼고 참 심플한 금액을 월급이라고 집에 부쳐줄 때면, 그리고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는 아이들의 모습에 벅찬 감정과 동시에 깊은 걱정이 더 앞 설 때면... 스스로 최면을 걸게 되죠.  배부른 소리 하지 말고 더욱더 계산적이고 영악하게, 닳고 닳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다 부질없어 보이기도 해요.  주위에 사람은 넘치는데 점점 더 외로워지고,  휴대폰 속 수백 명의 전화번호 목록이나 혹은 SNS 대문에 걸어 놓은 이웃수 조차도 문득 다 무의미해 보일 때.  

우린 종종 그런 상념들에 빠져 들 때 '과연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란 고민으로 잠 못 이루기도 하잖아요.   그렇게 밤을 꼴딱 새우며 어느 누군가저 '착한' 업무 기획서를 만들어 낸 겁니다.  그렇다면 저 역시, 인간미 풀풀 풍기는 그런 기획서를 그렇게 한번 턱 하니 써내 볼까요.  아직 꼬맹이들... 학비 대야 할 날들이 한참 까마득한데?







You



complete




me







  결국 이 '착하고 뻔한'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일과 사랑, 성공에 관한 정답은 뭘까요.  스스로 자처한 악조건 속에서 고군분투하던 제리 맥과이어는 결국 갖은 우여곡절을 극복하고 다시 성공도, 사랑도, 스스로 바라던 인간성의 회복도 이뤄내게 됩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싶은 딱, 그 모습들이죠.  필요와 이용가치로만 관계를 맺어왔던 제리 맥과이어가 진정한 신뢰와 공감, 배려로 주위 사람들과 어우러져 진짜 성공과 행복을 쌓아가는 과정들.  


  보기에 따라선 굉장히 원론적이고 교과서적인 전개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진부하다기보단 오히려 더 사랑스럽습니다.  흔히 말하는 좋은 작품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직접적인 삶의 정답 그 자체를 제시하거나 강요하진 않아요.  기준이나 척도를 그려내려 하기보단 관점이나 태도를 이야기하려 하죠.  그 관점들을 통한 개개인의 선택들을 떠올려보게 하는 겁니다.  절대적인 행복과 성공에 대한 척도는 그 누구도 자로 잰 듯 명확하게 말할 순 없어요.  누구나 저 높은 곳과 더 많은 것들을 원하며 적지 않은 것들을 희생하며 달려가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 되진 못하죠.  오히려 그럴 때,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이젠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 시선들에 따라 때론 우리들의 삶이 천국이 될 수도 혹은 지옥이 될 수도 있잖아요.  삶에 관한 수많은 담론들, 서점에 쌓이는 수많은 자기 계발서, 삶의 지침서들이 말하고자 하는 건 결국 늘 비슷한 맥락이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 변할 수 없는 것, 그리고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관점들에 대해서.







  

  당시 이 작품의 실제 롤모델로 유명했던 미국 스포츠 에이전트 레이 스타인버그(Reigh Steinberg)는 이후 본인의 알코올 중독과 자녀들의 건강 문제로 인해 2012년 1월 파산보호를 신청하고 법정에 서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랑과 성공을 다시 되찾는 주인공 제리 맥과이어의 이 지극히 낭만적인 해피 엔딩을 떠올려보면 한편으로 입맛이 씁쓸해지기도 하죠.  하지만 그때로부터도 이제 근 10여 년이 또 지났어요.  잘 나가던 탑 스포츠 에이전트로서의 삶이 멀어졌단 그 사실만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단지 '패배자'로 남겨진 건지 쉽게 속단하긴 힘듭니다.  부단한 열정과 노력으로도 깨뜨리기 힘든 현실의 그 높은 벽들을 때론 인정할 수 밖에도, 영화는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가다 잃어버리는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해요.  그렇게 주저앉았을 때 새삼스럽게 와닿는 소중한 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죠.  


  잡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열망으로 삶을 계속 야금야금 갊아먹고 싶진 않아요.  그것들이 나와 타인을 피폐하게 만들어야 얻어지는 거라면 이제 더욱 그러합니다.   렇게 철없이 꿈만 꾸며 살다간, 죽도 밥도 안될 거라며 또 넌지시 등 뒤로 비웃음을 살지도 모르죠.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바라고 꿈꾸는 성공과 행복이 이제 우리  각자 다르잖아요?  그러니 그 엄숙하고 무거운 회의 시간에 슬쩍 미소 지으며  그렇게 한번 이야기해보려고요.  

'가슴이 비었다면... 머리는 소용없는 거 아닌가요?'라고.  


아 물론 텔레파시로다가, 혼자 소곤소곤. 


















* 위 이미지들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며

  모든 이미지들의 저작권은 해당 제작사에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