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읽기
읽는다. 이 말에는 묘한 매력이 숨어 있다.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다양하게 쓰이고 의미 또한 남다르다. ‘읽는다’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자연스럽게 '책'이 연상될 것이다. 우리에게 읽기란 분명 문자와 관련한 활동이기에 읽기에 책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읽기 자체는 독서가의 전유물처럼 비친다. 하지만 우리는 글로 기록한 것만이 읽기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우리는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려 할 때 ‘세상을' 읽는다고 말한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할 때도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고 한다. 여럿이 웃고 떠들다가도 어색한 일이 벌어지면 우리는 재빨리 그 ‘분위기를' 읽는다.
심지어 아이들의 ‘미래와 꿈’을 알아보는데도 읽기가 등장한다. 어떻게? 돌잔치에서다. 대부분의 돌잔치에는 어김없이 돌잡이 행사를 치른다. 이때 아이가 손에 쥐는 물건을 바라보며 부모는 아이의 꿈과 미래를 읽으려 한다. 물론, 이때의 읽기는 아이가 가진 재능을 확인한다거나 미래를 예측하는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아이가 자기의 꿈을 좇아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라는 부모의 소망과 애정이 담겨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많은 부모들은 아이의 무의식적인 선택에는 무언가 의미 있는 ‘단서’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읽기는 글과 책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글로 기록하는 것보다 더 크고 많은 의미를 갖는 것이 읽기다. 폭넓게 쓰이는 읽기의 모습을 탁월한 독서가 알베르토 망구엘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별들의 천체도를 읽는 천문학자,
집을 지을 때 악귀를 물리치기 위해 집터를 읽는 일본인 건축가,
숲 속에서 동물들의 발자국을 읽는 동물학자,
자신의 승리의 패를 내놓기 전에 상대방의 제스처를 읽는 도박꾼,
안무가의 메모나 기호를 해석해 내는 무용가,
무대 위에서 공연 중인 무용가의 동작을 읽는 관중,
한창 짜 내려가고 있는 카펫의 난해한 디자인을 읽어 내는 직공,
오케스트라용으로 작곡한 난해한 악보를 해독하는 오르간 연주자,
아기의 얼굴만 보고도 기뻐하는지 놀라고 있는지 아니면 감탄하고 있는지를 눈치채는 부모,
거북의 등딱지에 나타난 모양새를 보고 길흉을 점치는 중국 점쟁이,
밤에 침대 시트 아래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를 읽는 연인,
환자들을 상담하며 뒤숭숭한 꿈을 풀이하도록 돕는 정신과 의사,
바닷물에 손을 담가 보고 바닷물의 흐름을 읽어 내는 하와이의 어부,
하늘을 보고 날씨를 예견하는 농부...... *
이들 모두의 행동은 읽기를 나타낸다. 사람, 물체, 기호, 흔적, 암시, 단서 등 오로지 해독의 대상만 다르다. 이처럼 다양한 형태의 읽기가 가능하다는 것은 그 역사 또한 매우 오래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오랜 옛날 중국에는 거북의 등딱지로 미래를 읽은 점술가가 있었고, 그보다 훨씬 전에는 수렵과 채집을 위해 자연을 읽은 인류의 조상들이 있었다. 그들은 수풀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자신을 공격하려는 맹수인지 아니면 자신이 공격해야 할 사냥감인지 빠르게 읽어야 했다.
또한 해가 뜨고 지는 간격, 구름과 비의 관계, 달과 별로부터 시간과 공간을 읽어야만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 읽기란 생존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 발전의 시작이었다. 『읽기와 지식의 감추어진 역사』에서 한스 요하힘 그립 교수는 “이런 인류 최초의 읽기에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생겨나고, 종교와 천문학과 지리학이 생겨났다”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읽기는 익숙하지만 여전히 낯설다.
알베르토 망구엘은 읽기를 “신호를 판독하고 해석하는 기교(the craft of deciphering and translating signs)”라고 정의하였다. 읽기는 ‘의미와 정보를 획득’하는 행위이고 그 과정에서 발휘되는 일종의 ‘기술’이다. 읽기가 ‘기술’이라는 지적은 그것이 후천적 노력, 갈고닦아서 터득하는 하나의 개인 능력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읽는 사람의 행동은 쉽게 따라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느낌이나 생각마저 습득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경험을 통해 스스로 깨닫기 전까지는 알기 어려운 것이 읽기다.
그래서 그 기술을 잘 익힌 인류의 한 조상은 남보다 더 많이 사냥하고 채집할 수 있었다.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결정한 것은 주변 환경을 얼마나 잘 읽느냐 하는 이 읽기의 기술에 달려 있었다. 지금의 시대 역시 이 기술은 인간의 생존과 성공, 번영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요즘처럼 사회가 복잡하고 불확실해질수록 ‘신호를 판독하고 해석하는 기교’는 더욱더 필요한 능력이 되었다. 인류의 조상들은 자연만을 읽어도 충분했다. 하지만 6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이 문자를 발명하면서부터 이 기술은 매우 특별한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한 사회가 의사소통을 위해 선택한 공통의 기호’를 익혀야만 살아갈 수 있다. 요즘의 우리는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는 지식까지 포함시켜야 한다. 단순한 의사소통을 넘어 무언가를 생산해야 하는 지식 경제 사회에서는 수풀 속에서 들려오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 대신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정보를 제대로 해석해야 성공에 이를 수 있다.
지식 세계에서는 신호를 판독하고 해석하는데 뛰어난 사람, 즉 읽기에 탁월한 능력을 개발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기회를 얻는다. 지식은 앨빈 토플러가 주장한 혁명적 부를 창출하는 심층 기반이며, 피터 드러커가 제시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지식이 부와 생산 자원의 기반이라는 것은 지식이 권력의 속성을 띄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제 권력은 총구가 아니라 지식에서 나오고 있다. 미셸 푸코는 “지식 없이 권력이 행사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지식이 권력을 생성하지 않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것이 우리가 읽기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고 그 기교를 터득해야 할 이유이다. 읽지 못하면 기회를 잃는다. 기회를 얻지 못하면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읽는 능력은 세상과 나의 관계를 파악하여 위치를 정하는 것이고, 나의 존재를 드러내는 출발점이다. 그러니 잘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읽기라는 행위의 중요성을 알베르토 망구엘은 이렇게 강조하였다. “우리는 뭔가를 읽지 않고는 배겨 내지 못한다. 읽기는 숨 쉬는 행위만큼이나 필수적인 기능이다”
읽기가 인간의 본질적 기능이라는 망구엘의 지적은 우리 삶의 곳곳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는 하루 종일 읽으며 지낸다. 컴퓨터 화면에 띄워 놓은 문서와 스마트 폰에 담긴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횡단보도의 신호등, 버스 노선도, 길거리에서 받아 든 전단지, 간판, 진열장에 놓인 상품의 브랜드, 영수증, 보고서와 교재, 신문과 잡지, 텔레비전에 나타나는 자막에 이르기까지 쉴 새 없이 읽고, 읽고, 또 읽는다. 우리의 일상은 읽기 그 자체다. 읽기는 우리의 생활 방식이고 생존 방식이다. 우리는 읽는 인간, 호모 레겐스(Homo Legens)***다. 라틴어 legens는 reader를 가리킨다.
*알베르토 망구엘, 정명진 옮김,『독서의 역사』, 세종서적
**사라 밀스, 임경규 옮김,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 앨피
***티븐 로저, 신기식 옮김, 『읽기의 역사』, 지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