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하는 작업의 성실성'을 다시 읽으며
2019년 1월, 새해를 맞아 새 노트를 펼쳤다. 첫 페이지에 이런 글을 옮겨 적었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163절, ‘손으로 하는 작업의 성실성’에 나오는 문장이다. 글쓰기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마주쳤을 구절이다. 나는 이 문장을 옮겨 적으며 ‘좋은 글을 쓰자’ 다짐했다. 동시에 그 다짐이 얼마나 많은 조건과 시간을 요구하는지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문장만 읽으면 ‘훌륭한 소설가가 되는 법’에 대한 조언처럼 들린다. 그래서 소설가를 지향하지 않는 사람, 그저 글을 좀 더 잘 쓰고 싶은 사람에게는 거리감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니체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소설가와 일반인을 나누지 않는다. 재능과 타고난 능력을 탓하지 말라고도 말한다.
“어떻게 하여 훌륭한 소설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방법은 쉽게 제공할 수 있으나, ‘나에게는 재능이 충분치 않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질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그 자질을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니체가 보기에 ‘재능이 부족하다’는 말은 겸손이 아니다. 그것은 특별한 자질이라는 고정된 실체를 먼저 설정한 뒤, 그 자질을 직접 확인하는 작업을 시작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무능이 아니라 회피다. 소설가와 일반인, 이 둘의 차이는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작업 속에서 시험해 보려는 태도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소설가’는 특정 직업군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니체는 소설가를 예로 들었을 뿐, 그의 관심은 언제나 인간 일반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형성하는가에 있었다.
글을 직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 삶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그래서 이 글의 요구는 소설가 지망생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그저 글을 더 잘 쓰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니체가 문제 삼는 것은 직업이 아니라 태도와 순서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제시하는 다음의 긴 목록은 그 태도를 구체화한 조건들이다. 가독성을 위해 항목별로 정리했으니, 원문을 함께 읽기를 권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분명하다. 이 글 어디에도 영감이나 천재성이 등장하지 않는다. 니체에게 창작은 감각의 폭발이 아니라, 반복된 노동의 결과일 뿐이다.
글쓰기 훈련
•짧고 필연적인 소설을 써보라
2페이지를 넘지 않되, 포함된 모든 단어가 필연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명확한 소설을 백 편이상 습작하라.
•일화를 쓰며 압축을 배워라
가장 함축적이고 효과적인 일화의 형식을 익힐 때까지, 매일 일화를 써라.
보고, 듣고, 수집하는 훈련
•인간의 유형과 성격을 수집하라.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관찰하고, 말하고, 귀 기울여 들어라.
•풍경화가와 의상 디자이너처럼 여행하라.
•다른 학문에서 예술적 효과를 낼 수 있는 요소를 발췌하라.
•인간 행위의 동기를 탐구하고, 어떤 가르침도 냉대하지 말고 밤낮으로 수집하라.
니체가 이처럼 구체적인 디테일을 제시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에게 창작은 작은 연습에서 시작되어, 부분을 거쳐 전체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순서를 거꾸로 택한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에서 시작한다. 처음부터 완성된 전체를 말하려 한다. 그 선택은 한 번쯤 주목을 끌 수는 있어도, 반복을 견디지 못한다.
니체는 이 실패를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순서의 오류로 진단한다. 우리의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다. 보고, 듣고, 수집하는 훈련 없이 곧장 결과부터 생산하려 할 때, 실험은 실패한다.
니체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다. 위대함은 전체에서 나오지 않는다. 부분을 완성하는 성실성이 오랜 시간 누적된 결과일 뿐이다.
“그들은 부분을 완성하기 위하여 시간을 부여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혹시키는 전체의 효과보다 작은 것, 지엽적인 것을 잘 만드는 일에 더 많은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이 물러선다. 인공지능 시대에 이런 지난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으면 하품부터 나올 것이다. 특히 다음 문장이 사람들의 기를 꺾는다. 이 글에서 가장 잔인한 문장이다.
“이와 같은 다양한 훈련으로 2,30년을 보내라;
그 후에는 작업실에서 창작된 것이 거리의 빛 속으로 나가도 좋다.”
니체가 언급한 조건들은 빠른 성취에 대한 환상을 거부한다. 창작을 단기 프로젝트가 아니라 장기적인 형성 과정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이 글은 친절한 글쓰기 안내서라기보다, 이 길에 들어설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는 선별 장치처럼 작동한다.
지금까지의 글을 정리하면 답은 단순하다.
소설가라는 이름을 붙이든 붙이지 않든, 글을 쓰는 우리는 재능을 단정해서 포기할 존재가 아니다. 오랜 시간, 작은 훈련과 관찰을 반복하며 삶 전체를 통해 만들어지는 존재다.
결국 핵심은 하나다. 20~30년이라는 시간을 감당할 수 있는가. 꾸준히 반복할 수 있는가. 이는 누구도 대신 확인해 줄 수 없다.
글쓰기 인생 50년을 살아온 조정래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배고픔처럼, 목마름처럼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동해야 한다.” 하고 싶어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전업작가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우리 역시 글을 쓰고 있고, 그 마음이 자꾸 동한다. 그러니 니체의 도움을 받고, 작가들의 길 안내를 참고하며, 자기를 표현하는 방식을 20년이고 30년이고 계속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 시간을 살아왔다. 보고, 듣고, 수집하고, 말하며 20~30년을 보냈다. 읽기의 재료는 충분하다는 말이다. 이제 할 일은 그것을 이 자리로 불러내 깎고, 다듬고, 짓는 것이다. 삶 자체가 예술이 아니라면 무엇이 예술이겠는가. 그러니 내게 주어진 삶을 작품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삶의 작가로서 우리가 할 일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 글을 쓰려한다. 매일의 일화를 남길 것이다. 설명 없이도 한 사람이 보이는, 한 장면의 기록을. 다만 그것을 매일 발행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제 그럴 시간도 부족하다. 공개보다 비공개의 비중이 늘어날 것이다. 지난해에는 A4 기준 433페이지를 썼고, 그중 대부분을 공개했다. 올해는 그보다 줄어들 것이다.
이는 플랫폼의 요구에 맞춘 글쓰기를 벗어나겠다는 뜻이다. 검색 가능성을 배제하고, 좋아요와 조회수는 통계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1일 1 포스팅 같은 규칙적 생산에서도 벗어나려 한다. 플랫폼의 속도보다 내 글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서다.
내가 택한 것은 부분을 완성할 시간을 확보하는 쪽이다. 혹자는 양이 질을 낳는다고 말한다. 자연선택의 관점에서는 맞는 말이다. 변이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쓰기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글에 변이가 생기려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아래 문장을 열어볼 생각이다.
“때때로 이러한 예술적 삶의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이성과 성격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에는 운명과 필요가 그 자리를 물려받아 미래의 거장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여 그의 손으로 하는 작업의 모든 조건을 거쳐 단계적으로 이끌어 간다.”
이 글 역시 위로는 아니다. 우연조차 단계를 생략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위대함은 손으로 하는 작업을 통과한 뒤에만 도달한다.
노력을 이기는 재능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