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내가 어떻게 죽을 지 이미 알고 있다든가
팀 버튼 감독의 'Big Fish (2003)'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왜 판타지인가'에 대한 팀 버튼 감독의 대답이다." 평론가 이동진씨가 이 영화를 이렇게 정리했는데, 꼭 맞다. 나는 원래 판타지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트와일라잇 등등 모두 지금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의외로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판타지 없이 인생을 살기 힘들다는 것, 판타지가 오히려 건조한 팩트보다 더 충실히 삶의 진실을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를 보면 느낄 수 있다. 이 영화도 역시 하나의 판타지물이다. 팀 버튼 특유의 감성으로 아주 기괴하고, 또 아름답게 그렸다. 보면 막 흐뭇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안 보셨다면 적극 강추다. (이동진이 별 5점 준 영화 101편에도 포함돼 있다) 이완 맥그리거 주연이다.
이 영화에서 특히 내 관심을 끌었던 테마는,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 주인공 에드워드 블룸은 친구들과 야밤에 동네의 한 폐가를 찾아간다. 여기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마녀가 살고 있는데. 들리는 얘기로 이 분은 말 안 듣는 아이를 잡아 먹고, 사람으로 비누를 만드는 전형적인 마녀다. 그런데 그는 매우 특별한 유리 눈깔을 갖고 있었다. 이 눈과 똑바로 마주치면 자신이 미래에 죽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섯 명의 아이들은 풀섶에 숨어 수근거리다, 용감한 에드워드를 대표로 세워 마녀의 눈을 가져 오기로 한다.
에드워드와 마녀의 만남은 어렵지 않게 성사된다. 용기 내 몇 번 두들기니 마녀가 문을 불쑥 열고 등장한다. 이런 모습이다.
"제 친구들이 당신의 눈을 보고 싶어 해요."
마녀는 말이 없다.
장면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풀섶으로 바뀌고, 에드워드가 돌아온다.
"마녀 눈 가져왔어?"
"응."
"어디?"
하자마자 에드워드 등 뒤에서 마녀가 불쑥! 아이들이 소리칠 틈도 없이, 마녀는 가리고 있던 자신의 안대를 벗어 아이들에게 자기 눈을 들이대고, 아이들은 졸지에 자신의 삶이 어떻게 마감하는지를 본다. 용기 내 마녀를 찾아왔던 에드워드에게만큼은 선택권이 있었다. 잠깐의 고민 끝에, 그도 역시 자신의 미래를 보기로 한다.
"Oh, that's how I go."
영화에서 그의 결말만은 비밀로 부친다.
에드워드는 아주 배짱 좋고 스태미너가 넘치는 야망남으로 성장했다. 그는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제 발로 온갖 모험을 찾아 다녔고, 당연하게도 위기의 순간에 봉착한다.
어느 날, 깜깜한 밤 숲에서 그는 길을 잃는다. 겁 없는 에드워드지만, 어둠 속에서 말벌의 떼공격을 받은 후부터(벌에 쏘인 분장이 귀엽다) 서서히 공포감에 휩싸이기 시작하는데. 숲을 빠져 나가려 걸음을 재촉하지만, 사방의 나뭇가지들이 망자의 팔처럼 길어지면서 그의 몸을 휘감기 시작한다. 공포는 점점 커져만 가고, 온 숲이 잡아 먹을 듯 그에게로 기운다. 바둥바둥 저항하던 에드워드가 '아,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체념할 찰나, 갑자기 그에게 문득 찾아오는 깨달음.
"어, 나 이렇게 안 죽는데?"
그의 마음 속에 공포가 걷힌다. 그러자 그를 친친 감싸고 있던 나뭇가지들이 그를 놓아주고, 그를 묻어 버릴 것만 같던 숲이 전부 언제 그랬냐는 듯 일제히 제자리로 돌아간다. 달빛이 밝아진다. 새 소리가 들리고, 숲은 이보다 더 평온할 수가 없다.
공포에 대한 숲의 비유가 재밌다. 숲이 주인공을 괴롭히기 시작한 건 에드워드 마음에 공포가 싹트기 시작하고서 부터다. 공포가 커지니 숲이 무섭게 굴고, 그래서 더 무서워 하니 숲이 그를 잡아 먹으려 한다. 그런데 그가 공포에서 벗어나는 순간, 숲은 거짓말처럼 원상복귀한다. 결국 공포스런 현실을 만들어 내는 건 공포에 찬 자기의 마음이었다. 그리고 공포는 언제나 더 큰 공포심을 불러 일으킨다.
주인공의 공포심을 한 큐에 날려 버린 깨달음.
This isn't how I die.
난 이 영화를 볼 때 마다 이 대목이 정말 부러웠다. '믿는 구석'. 최소한 눈알에서 본 그 장소, 그 시각이 아니라면야 어떤 위기 상황이라도 살아남을 거라 확신할 수 있다는 것. 꼭 위기 상황이 아녀도 좋다. 어찌 죽을 지를 이미 알고 있다면, 평상시에도 더 과감한 선택을 내리고 배짱을 부려볼 수 있지 않을까? 정말 탐나는 능력이다.
그래서, 지금 내 앞에 마녀가 있다면. 나는 눈을 보여달라 할까?
그런데 아주 신경 쓰이는 문제가 있다. 만일, 유리 눈깔로 본 내 마지막 가는 모습이 너무나 끔찍하거나, 또는 너무 하찮다면?
에드워드의 친구들이 그런 경우다. 눈알이 보여주는 바로는, 한 명은 늙고 뚱뚱한 모습으로 전구를 갈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죽는다. 한 명은 많지도 않은 나이에 대변을 보다가 죽는다.
만약 내가 정말 큰 결심을 해서 유리 눈깔을 들여다 보는데, 그 안에서 미래의 내가 똥을 싸다 죽어 버린다면? 글쎄, 나는 그것을 목격한 직후부터 모든 삶의 의욕을 잃고, 식욕도 잃고, 두문불출하며 집에만 쳐 박혀 있다가 만성 변비에 걸려 정말 항문에 힘을 주다가 죽을 것 같다.
이전에 이 영화를 볼 때 나는 무조건 마녀에게 내 미래를 보여달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젠 좀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 내 맘 속에선 보고서 좋아질 기대보다, 본 결과로 패망할 것에 대한 공포가 더 크다.
그리고 실은, 그 사이에 나에게도 믿는 구석이 생겼다! 어떤 오묘한 역술인한테 기가 막힌 얘기를 들었거든. 나의 시간은 천천하고 꾸준히, 거꾸로 간다고. 겨울에서 가을, 여름, 그리고 봄으로.
표현도 아름답지 않은가? (전성기 60세 이후)
이 한 마디 들은 것이 생각 이상으로 내게 엄청나게 큰 힘을 준다. 본디 내가 참 겁이 많은데, 삽질에 대한 두려움과 자책이 현저히 줄었다. 난감한 시츄에이션이 와도 삼 일 패닉할 게 하루면 끝난다. 불현듯 만사에 대한 현자타임이 오면서 산다는 게 급 두려워질 때가 있다. 그럴 때도 난 저 말을 떠올린다. 지금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다 봄으로 향해 가는 과정인걸? 지금 이 실수와 방황으로부터 배우는 것들 다 거름 삼아 봄으로 나아가는 것 아니겠어?
난 저 동추하춘 설을 정말 믿는다. 왜냐면 실제로 탄생 이후 내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좋거든. 지금도 좋은데, 아직 가을 중순 정도 밖에 안 왔으니. 봄은 어떻겠어? WOW
이거 자랑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중대한 선택을 앞두고(휴학을 할까 말까) 스스로 기합 좀 넣어 봤습니다.
그대에게도 생에 믿는 구석 있으시길! 축원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