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 없이
보아의 No.1이 처음 나왔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당시 우리 반에선 매일 점심시간마다 다 같이 교실의 거대한 TV로 가수들 뮤직비디오를 감상했는데, 뉴욕의 마천루 옥상에서 머리를 휘날리던 보아의 No.1 뮤비는 SES의 Just A Feeling과 더불어 단골 레퍼토리였다. 나는 이 노래를 좋아했다. 특히 보아의 오렌지색 5:5 긴 생머리가 너무 예뻐서, 대학에 가면 나도 꼭 저 머리를 하겠노라 다짐하기도 했다.
방금 전까지 나는 No.1 공연 영상을 틀어 놓고 열렬히 안무를 따고 있었다. 이 흥순이가 새벽에 막춤을 추며 흥을 부리는 것쯤이야 매일 있는 일이지만, 굳이 직접 안무를 따면서까지 누구의 춤을 출 것까진 없었다. 이게 다 작년에 괜히 보아의 No.1을 오마쥬한 독무 영상을 SNS에 올리겠다고 저 혼자 주변인들에게 선언한 탓이다. 왜 선언을 했느냐, 변변찮은 계기가 있다.
작년 봄이었다. 밤에 과외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대어 멍하니 창 밖을 바라 보는데,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다. 예쁘군. 내 눈은 카메라 렌즈가 초점을 맞추듯 흐릿해졌다, 또렷해졌다를 반복하며 달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때, 라디오에서 반가운 노래가 흘러 나온다. No.1이었다.
어둠 속에 니 얼굴을 보다가, 나도 몰래 눈물이 흘렀어. 소리 없이 날 따라오며 비춘 건, finally, 날 알고 감싸 준거니. 처음 내 사랑 비춰 주던 넌 나의 이별까지 본 거야.
You're still my No.1. 날 찾지 말아줘. 나의 슬픔 가려줘. 저 구름 뒤에 너를 숨겨 빛을 닫아줘. 그를 아는 이 길이 내 눈물 모르게.
변한 그를 욕하진 말아줘. 니 얼굴도 조금씩 변하니까. But I miss you. 널 잊을 수 있을까. I want you back in my life, 나의 사랑도, 지난 추억도 모두 다 사라져 가지만.
You're still my No.1. 보름이 지나면 작아지는 슬픈 빛, 날 대신해서 그의 길을 배웅해줄래? 못다 전한 내 사랑 나처럼 비춰줘. 가끔 잠든 나의 창에 찾아와 그의 안불 전해 줄래?
이 노래의 가사를 이렇게 집중해 들은 적이 없었다. 이렇게 슬픈 가사였다고? 이 청량한 노래가? 일전에 이소라가 <나는 가수다>에서 괜히 이 노래를 보름달에 늑대 울부짖듯 연출한 게 아녔다. No.1은 뜻밖에 매우 애수가 짙은, 어딘가 판소리적 향이 나는 노래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을 당하고 망연이 자실하여 어둠 속을 혼자 걷는데. 문득 하늘을 보니 보름달이 저기 잉네. 나를 계속 따라오며 비춰 주고 있던 거야? 참아 왔던 눈물이 와락…
쫓겨난 아씨가 의지할 수 있는 집사처럼 저 보름달은 비춰줄 곳을 비춰 주고, 또 가려 줄 곳을 가릴 줄 안다. 유일하게 그녀에게 그의 소식을 전해줄 수 있는 존재이며, 그녀 본인 대신 그를 지켜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주인공 아씨의 눈엔 저 달이 달로 보였다가, 우리 그이로 보였다가, 오락가락 하나 보다. 달이 고맙다가도, 모든 것을 다 지켜 봤을 달 앞에 울고 있는 자신이 부끄럽고.
너도 매일 모양 변하기로는 그놈이랑 똑같으니까 변한 그를 욕하지 말라며 달에게 시비를 걸기도 하고, 또 보름이 차면 작아지는 네 처지나, 언젠가 너처럼 작아져 사라질 내 사랑과 추억이 딱하기는 매한가지라며 한탄한다. 이 말을 하고 저 말을 해도, 달은 동요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다.
가사를 듣고 나니 어쩐지 사랑스럽고 애틋해져, 라디오가 끝나고서 십수 년 간 볼 일 없던 보아 영상을 검색했다.
가요 프로그램 썸네일에서 10대 보아의 상큼함이 액정 밖으로 터져 나왔다. 아주 가끔, 내가 저 춤을 추면 진짜 멋있을 것 같다 싶은 영상이 있다. 가만 보니 넘버 원의 안무가 그랬다. 어려운 기교 없이 대체로 그냥 태권도처럼 정직하게 지르고 뻗으면 되는 것처럼 보였다. 저 간지로 춤을 추고 있을 나 자신을 상상하니 너무 멋진데, 심지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게임 같았다. 영상을 올리겠다는 셀프 선언은 그렇게 뭣도 모른 덕에 이루어졌다.
쉬워 보였던 것은 역시 보아가 위대했기 때문이었고. 작년 12월 내로 올리기로 했던 것이 해가 바뀌고 절반이 훌쩍 넘은 지금에도 요원하다. 물론 작년 하반기부터 대학원을 다니게 되면서 엄청 바빠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욕망은 원대하고 역량은 미약한 내가 절반쯤 하다 나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이 셀프 과제에 대해 주변 몇몇 사람들에게 떠들어 놓은 게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다들 자기 삶도 바쁘니 이런 걸 다 기억하고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유독 한 명, 내 과외 제자 한 명이 심심하면 얘길 꺼내 날 재촉하고 있다. 언제 올리실 거냐고. 그저께도 물었다. Writing하라고 공유한 구글 닥스에 BoA 링크를 올려 날 괴롭힌다.
하, 괴롭다. 이 비 오는 밤에 굳이 짖고 있는 저 똥개의 소리에도 괴롭다. 나는 제자 앞에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인간이고 싶은데! 나는 왜 자꾸 아무도 시키지 않은 것으로 혼자 숙제 만들어 놓고 자신을 괴롭히는가! 이제 여기다 올리면 한 7배 더 마음이 불편하겠지?
바로 그게 이 포스팅의 요점이다.
진짜 올해 안엔 올린다.
올해 금방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