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사랑은 언제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또 마음은 말처럼 늘 쉽지 않았던 시절”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남자 주인공의 서사를 보여줄 때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일종의 고백>이란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첫 소절부터 마지막 소절까지 가사를 음미하며 듣다 보면 시 한 편을 노래로 듣는 것 같다. 16부작 드라마 한 편, 한 편이 각각 책 한 권이 될 수 있을 만큼, 대사 한 마디에 열 마디 이상의 감상이 떠오를 만큼 깊이 있는 드라마에 걸맞은 노래다.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드라마 <또, 오해영>, <나의 아저씨>를 쓴 박해영 작가의 작품이어서 시작 전부터 기대가 컸다. 그의 작품에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성찰과 믿음, 위로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또, 오해영>에서는 운명에 잠식당하지 않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감명 깊었고, <나의 아저씨>는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예의와 선의가 감동을 주었다.
<나의 해방일지> 첫 방영 날, 과연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하면서 티브이 앞에 앉았다.
경기도 끝자락의 시골집과 서울 도심의 일터를 잇는 마을버스와 지하철 통근길, 오로지 생존에 필요한 음식을 섭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둘러앉은 듯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밥상, 그리고 사람 말소리보다 풀벌레 소리가 더 기억에 남는 첫 화였다.
출퇴근 장면 분량이 많아서 본격 출퇴근 드라마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잘 나가는 손석구 배우를 데려와서 이름 석 자도 제대로 안 알려주고 구 씨라고 부르며 대사 한 마디 없는 연기를 하게 했다. 소금 안 넣은 설렁탕같이 맹숭맹숭한 분위기가 당혹스러우면서도 느린 속도와 여유로운 호흡이 편안하게 다가왔다. 범상치 않은 시작에서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했고 내 인생에 손꼽히는 명작 드라마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결국 나는 책 한 권을 읽고 또 읽듯이 이 드라마의 모든 에피소드를 서, 너 번씩 반복해서 보게 됐다.
모든 시청자가 처음부터 이 드라마에 열광한 것은 아니다. 2회 차에 성경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추앙"이라는 단어가 나온 직후 시청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이들도 있었다.
남자친구에게 배신당하고 회사에서의 인간관계도 견딜 수 없이 힘들어 지친 미정은 외지에서 흘러들어와 낮에는 아버지의 농사일과 공장일을 거들고 밤은 술로 보내는 일꾼 구 씨에게 자신을 추앙하라고 말한다. 사랑으로는 안 되니 추앙하라며 자기도 그를 추앙하겠다고 이야기한다. 사이비 교주같이 추앙하라니. 시청자에게 생소한 단어라는 것을 작가도 알고 있었던 듯이 극 중에서 구 씨가 "추앙"의 의미를 검색해 찾아보는 장면이 나온다.
“높이 받들어 우러러봄."
조건 없는 숭배와 찬양을 떠올리게 하는 "추앙"은 이성 간의 사랑보다 고매한, 인격을 가진 존재에 대한 존중, 인정, 응원을 뜻하는 말로 이해했다.
나이가 들면서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나인 것과 내가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고, 내가 아닌 모습으로는 살지 않겠다는 결심이 굳건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타인을 대할 때 쓰게 되는 억지웃음의 가면을 벗고 담담하게 진실한 자아를 대면하는 일. 그런 자신을 온전히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는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작가는 추앙을 통해 서로를 구원하는 것이 진정한 해방의 길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 번도 채워진 적 없었던 미정이 구 씨를 만나 추앙하고 추앙받으며 “마음에 사랑밖에 없어서 느낄 게 사랑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미정의 추앙은 구 씨를 고통스러운 과거로부터 구원한다.
험난한 과거를 뒤로하고 시골에서의 삶을 선택한 구 씨가 밤마다 술에 의지하며 잊으려 했던 얼굴들, 아침마다 찾아와 괴롭히는 과거의 환영을 피하지 말고 환대하라는 미정의 말에 그는 술병을 내려놓고 어려운 발걸음을 내디딘다. 추앙을 통한 구원에서 시작해 용서와 속죄의 또 다른 표현인 환대로 완성되는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의 해방일지>는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갈망하는 현대인들에게 바치는 위로이며, 사랑이 마음대로 되지 않고 그 마음도 어찌할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한 일종의 고백이다. 많은 것을 담았기에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어서 “일종의”라는 수식어를 붙이게 되는 그런 고백이다.
사랑은 언제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또 마음은 늘 말처럼 늘
쉽지 않았던 시절
나는 가끔씩
이를테면 계절 같은 것에 취해
나를 속이며 순간의 진심 같은 말로
사랑한다고 널 사랑한다고
나는 너를
또 어떤 날에는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나를 좀 안아줬으면
다 사라져 버릴 말이라도
서로 다른 마음은
어디로든 다시 흘러갈 테니
마음은 말처럼 늘
쉽지 않았던 시절
2015년 이영훈이 작사, 작곡, 노래한 일종의 고백을 2022년 <나의 해방일지> 삽입곡으로 곽진언이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