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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 Sep 12. 2023

영웅이 없어도 되는 세상

영화 <비상선언> 그리고 9.11 테러

‘비상선언’은 재난 상황에 직면한 항공기가 더 이상 정상적인 운항이 불가능하여 무조건적인 착륙을 요청하는 비상사태를 뜻하는 항공 용어다. 영화 <비상선언>에서는 인천발 하와이행 여객기 안에서 생화학 테러로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살포되어 사상자가 나오고 승객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하자 가까운 공항에 착륙을 시도한다. 미국과 일본은 정체 모를 바이러스의 위험으로부터 자국민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비상선언을 무시하고 자국의 영토에 여객기의 착륙을 불허한다. 받아줄 곳이라고는 내 나라 한국밖에 없는 상황에서 한국 사람들마저 치료제의 효과가 확실치 않다는 이유로 바이러스 감염자들이 탄 비행기의 착륙을 반대하는 시위를 한다. 비행기에 갇힌 승객들은 분노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가족과 친구를 지키기 위해 지상에 내려가지 않기를 선택한다.


내가 저 상황에 있다면 승객들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생존 욕구를 앞선 희생적 사랑은 영화이기에 가능한 걸까?


역사를 돌이켜보면 현실에서도 위기 상황에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다. 2001년 9.11 테러를 위해 납치된 비행기는 네 대였다. 첫 번째, 두 번째 비행기는 미국 경제의 상징인 제1 세계무역센터와 제2 세계무역센터에 충돌해 수천 명의 사상자를 초래했고, 세 번째 비행기는 국방부 청사, 펜타곤에 충돌해 백여 명의 사상자를 낳았다. 네 번째 비행기는 워싱턴 DC의 백악관 혹은 국회의사당을 공격할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승객들의 저항으로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들판에 추락했다. 위기 상황에서 공포심에 굴복하지 않고 테러리스트와 맞선 용감한 승객들은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는 없었지만, 더 큰 인명피해를 막은 영웅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을 증명하듯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것이다.


지상에 착륙하지 않기를 선택한 <비상선언>의 승객들 역시 극 중에서 숭고한 영웅으로 역사에 남는 걸까? 혼란스러운 상황이 어떻게 정리되는지 초조하게 지켜봤다. 그들은 다행히도 바이러스 치료제의 효력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자기 몸에 바이러스를 주입한 개인의 희생 덕분에, 그리고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비행기 운전대를 잡은 다른 시민의 용기 덕분에 살아남았다.


무사히 지상에 착륙해 환호하는 여객기 안의 사람들을 보고 안도하면서 한편으로는 극복되지 않은 현실 재난의 장면이 떠올라 가슴이 아렸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아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2014년 세월호 여객선에서 볼 수 있었더라면. 세월호 안에 있던 아이들이 저렇게 감격스럽게 울고 웃으며 평생 늘어놓을 무용담으로 공포의 시간을 추억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현실은 영화보다 잔혹해서 수많은 꽃 같은 청춘이 세월호와 함께 깊은 바닷속으로 아스라이 가라앉아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처참한 비극 속에서도 희망을 본다. 침몰하는 세월호 안에서 많은 생명을 구한 자기희생적, 이타적 영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승객들을 대피시키고 마지막까지 남은 승무원, 학생들을 구하고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선생님,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한 학생, 생업을 제쳐두고 실종자 수색에 나섰던 잠수사. 이런 평범한 시민의 모습을 한 영웅들이 우리 곁에, 우리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재난의 위험은 생각보다 가까이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 수학여행 가는 여객선에서, 출장길에 탄 비행기에서, 서울 강남 한복판에 홍수가 나서, 핼러윈 축제를 즐기러 간 이태원 골목에서, 예상치 못한 위험한 상황을 맞닥뜨릴 수 있다. 이불 밖은 정말 위험하다. 그런데도 내가 이불 밖 세상에 나가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 안에 영웅이 잠자고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내가 위험에 처하면 선량한 사람들이 영웅이 되어 나를 구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위험에 처한 타인을 구하는 영웅이 될 수 있을까?


두 사람이 물에 빠지면 누구를 먼저 구하겠느냐는 질문이 유행했었다. 엄마와 아빠, 부모와 애인, 배우자와 자녀, 두 사람 중 누구를 더 소중히 여기는지 시험하는 질문이다. 당연히 나는 살고 둘 중 누구를 살릴지 저울질시키는 문제다. 질문을 달리해 나와 다른 사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내 가족이라면 나도 <비상선언>에서처럼 나를 희생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생면부지의 남이라면, 나의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서 타인을 앞세우는 이타적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고민된다. 그에게서 내 부모, 배우자, 아이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어쩌면 그런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 안에 숨어있던 영웅이 튀어나와 복잡한 머리를 잠재우고 인간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행동을 하게 할 것도 같다.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영웅이 깨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평범한 소시민이 영웅이 되지 않아도 되는, 영웅이 없어도 되는 평화로운 세상이기를 바란다.


2022년 11월 12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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