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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 Sep 10. 2023

철부지

얼룩말 '세로'

서울 시내 한복판에 얼룩말이 나타났다.

지난 3월 23일, 얼룩말 ‘세로’가 어린이대공원 울타리를 부수고 탈출해 인근 도로와 주택가 골목을 누볐다. 2019년생 세로는 태어난 지 2년 만에 엄마 ‘루루’를 여의고, 그다음 해에는 아빠 ‘가로’를 잃었다. 그 후로 내내 홀로 지내면서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밥도 잘 안 먹고 옆 우리에 사는 캥거루 가족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다. 세로의 동물원 탈출 소동은 3시간 반 만에 세로가 마취총을 맞고 생포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동물원으로 돌아간 세로는 토라져서 평소 좋아하던 당근조차도 거부했지만, 점차 안정을 찾고 음식도 잘 먹게 됐다.  


활동 반경이 수백 킬로미터에 이른다는 얼룩말이 좁은 동물원 우리에 갇혀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언론을 통해 세로의 탈출극을 지켜본 사람들은 동물원에 사는 동물의 처우와 복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려보내 주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동물원에서 태어난 얼룩말은 야생으로 돌아가면 맹수와 밀렵꾼 때문에 살아남기 어렵다. 동물원 측은 세로가 외로워서 돌발행동을 했다고 보고 암컷 얼룩말을 짝으로 데려와서 함께 살도록 할 예정이다.


세로는 동물원 밖 거리를 활보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울타리 없는 곳에서 마음껏 달리고 싶었을까? 엄마, 아빠를 찾고 싶었던 걸까? 세로는 사람 나이로 치면 열 살 전후에 부모를 잃었다. 같은 또래인 아들내미를 떠올려 보니 아직 부모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철부지인데 홀로 남겨져 얼마나 힘들었을까 안쓰러웠다.


작년에 가까운 이웃의 아이가 몇 시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대학 기숙사에 들어갔다. 성인이 되면 집을 떠나 독립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우리 아이는 자기가 열여덟 살이 되어도 엄마, 아빠와 같이 살 수 있냐고 물었다. 순간 남편과 나는 동시에 서로 눈을 마주치고 둘만 아는 비밀이 있는 것처럼 살풋 웃었다. 그러고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아이에게 열여덟 살이 되어도 우리 집에서 같이 살도록 해주겠다고 크게 선심 쓰듯 말했다. 초조했던 아이의 표정이 안도감으로 밝아졌다. 그 나이가 되면 부모 품을 떠날 것을 알고 있지만, 아직 어려서 엄마, 아빠가 없는 삶이 마냥 두렵기만 한 아이가 귀여웠다.


열여덟 살이 채 되기도 전에 부모님 곁을 떠나 지냈던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중학교 졸업하고 나서 열다섯 살에 집을 떠나 다른 도시에서 고등학교에 다녔다. 내가 집을 떠난 그즈음에 가세가 기울고, 부모님의 다툼이 잦아졌다. 한 달에 한 번 집에 가서 주말을 보내는 것조차 마음이 편치 않았던 시기였다. 평지풍파를 겪으며 가혹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을 동생들이 안쓰러웠다. 나만 멀리서 태평하게 지내는 것 같아 미안했다. 그 상황에서 나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관해 고민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가정의 불화를 외면하려고 노력하면서 나 자신을 부모님에게서 분리하는 정서적 독립을 이뤘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홀로서기를 하면서 일찍 철이 든 바람에 사춘기가 따로 없었다. 누울 자리가 없고, 비빌 언덕이 없어서였을 거다. 어른이 되고 보니 제대로 투정도 부려보지 못하고 청소년기를 마감한 것이 아쉽고 억울하기도 했다. 부디 우리 아이는 천천히 여물어서 아동기를 최대한 길게 누리고, 고등학교까지 집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열여덟 살이 되어서도 우리 부부에게 같이 살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철부지로 자라면 좋겠다. 언제가 되든 아이가 독립할 힘을 기를 때까지 맘껏 눕고 뒹굴 수 있는 안전한 언덕이 되어주고 싶다.


동물원을 뛰쳐나간 세로에게서 철들지 않은 아이의 모습이 보여 한편으로 반갑고 다행스러웠다. 부모 없이 사춘기를 지나 청년기에 접어든 세로가 우울하게 지내지 않고 지금처럼 투정 부리고, 삐지고, 장난도 치며 밝게 성장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좋은 짝을 만나 가정을 이뤄 씩씩하게 살아가기를 엄마의 마음으로 응원한다.


2023년 4월 7일 작성


사진 출처 :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8/0004865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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