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무빙>, 내가 아이에게 물려준 능력은?
아이가 다섯 살 때 한글학교 교지에 적은 장래 희망은 “터닝메카드"였다. 그때 한참 빠져있던 변신 로봇 자동차의 이름이다. 아이 반 친구들이 적어놓은 장래 희망을 보니 수의사, 치과의사, 과학자, 야구선수, 비행사, 요리사가 있었다. 아이를 너무 현실감각 없이 해맑게만 키웠나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그 나이가 아니면 언제 변신 로봇을 꿈꿔보나.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빛났다.
여섯 살 때 학교 교실 벽에 붙어있던 아이의 장래 희망은 “Snake Catcher”였다. 한국말로 “땅꾼"인가. 동네 애완동물 가게에서 뱀 한 마리에 100불 넘게 파는 것을 떠올리며 벌이가 꽤 괜찮은 직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뱀 잡기가 쉽지 않겠지만, 몇 마리 잡아서 번식시키는 방식으로 뱀 농장 사업을 하면 해볼 만할 것 같았다. 그때는 아이가 자꾸 뱀을 키우자고 졸랐었는데, 엄마는 뱀과 한집에 같이 살 수 없으니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고 했더니 의리 있게 엄마를 택했다.
뱀을 못 키우게 해서 그랬는지 얼마 후 아이는 “곤충학자"가 되겠다고 했다. 덕분에 곤충학자가 영어로 “Entomologist”라는 걸 알게 됐다. 터닝메카드나 땅꾼과는 달리 고등 교육이 필요한 장래 희망이라 바람직해 보였다. 영화 <설국열차>의 단백질 블록을 떠올리며 미래 식량의 주원료가 곤충이 되기를 바랐다. 역시 예상대로 아이는 곤충을 키우고 싶다고 했다. 그건 허락했다. 뱀만 아니면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거절 후 양보” 전략이 이렇게 통하는구나 싶었다. 나비, 나방을 애벌레부터 키워서 날려 보내줬고, 무당벌레, 귀뚜라미, 장수풍뎅이, 사슴벌레, 사마귀를 키웠다. 곤충을 실컷 키워봐서인지 아이는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번엔 다시 고등 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꿈이었다.
아이의 일곱 살 때 꿈은 “하늘을 나는 것”이었다. <캡틴 언더팬츠 (Captain Underpants)>라는 책을 보더니 거기 나오는 캐릭터처럼 빨간 망토를 두르고 날기 위해 연습했다. 바닥에 요가 매트를 깔아놓고 계단 위에서 최대한 높이 뛰어오르려고 노력했다. 지치지 않고 뛰고 또 뛰었다. 부단히 노력한 덕분에 0.8초 정도 거뜬히 날 수 있게 됐다. 그 모습을 슬로모션 동영상으로 찍어서 공중에 떠 있는 장면을 길게 늘여 보여주면 그렇게 좋아하면서 보고 또 봤다. 그때는 동영상을 찍어달라고 하더니 이제 열 살이라 사리 분별이라는 것을 하게 되어 제발 그것 좀 지워달라고 애원한다. 아이가 나 몰래 그 동영상을 전화기에서 찾아 지울 때를 대비해 웹하드에 저장해 놨다.
최근 화제인 드라마 <무빙>에서 하늘을 나는 김두식(조인성)과 아들 봉석(이정하)을 보면서 빨간 망토를 두르고 뛰어오르던 아이를 떠올렸다. 내게 비행 능력이 있었더라면 아이도 날 수 있었을 텐데.
<무빙>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은 초능력이 유전된다는 것이다. 비행, 괴력, 전기, 투시, 재생, 초인적인 오감 능력이 그 능력자들의 자녀에게서 발현된다. 국가정보원은 2세대 초능력자들을 어릴 때부터 관리해 요원으로 육성하려는 목적으로 아이들을 같은 고등학교에 소집하고, 북한에서도 아이들을 주시한다. 초능력자 부모들은 그들로부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이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흥행하고 있는 이유는 기존의 슈퍼히어로 액션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초능력자와 악당의 대결 구도에서 더 나아가 한국적인 청춘, 로맨스, 가족 드라마의 색을 입혔기 때문이다. 각 인물의 서사를 찬찬히 풀어내 그들의 행동에 개연성과 정당성을 주는 구성 역시 집중도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무빙>을 보면서 우리 부부가 아이에게 어떤 유전자를 물려줬는지 생각해 봤다. 일단, 아이 얼굴에 아빠랑 똑같은 위치에 점이 있다. 운동신경은 못 하는 운동이 없는 아빠 대신 순발력이 부족한 엄마를 닮았다. 거의 모든 운동에 순발력이 필요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음악적 감각은 엄마를 닮아 피아노를 곧잘 친다. 엄마, 아빠 둘 다 키가 크니 키는 남부럽지 않게 클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내가 아이에게 물려준 중요한 능력이 하나 있다. 아이가 말도 잘 못하는 아기였을 때, 장난감 블록을 쌓다가 무너져서 자지러지게 우는 걸 보고 이거 하나는 꼭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있었다. 좌절하지 않는 법. 아이가 무언가 자기 맘대로 되지 않아 울거나, 소리 지르거나, 물건을 던지거나 하면 항상 이 말을 하면서 다독였다. “괜찮아. 다시 하면 되지.” 수십 번 같은 반응을 경험한 아이는 점점 달라졌다. 실망스러운 일이 생겨도 무너지지 않고 차분히 스스로 다독이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날아보겠다고 뛰고 또 뛰던 아이의 모습은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순수한 마음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이 예뻐 보였다. 내가 동영상으로 남긴 것은 아이의 흑역사가 아니라 도전의 기록이다. 아이에게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은 물려주지 못했지만, 날지 못해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마음가짐은 가르쳐 준 것 같다.
"괜찮아. 다시 하면 되지."
그게 내가 아이에게 물려준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