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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 Oct 02. 2023

다시, 몬테레이로

“어쩌면 다시 멕시코로 가게 될 수도 있겠어.” 퇴근하고 집에 온 남편이 말했다.

“몬테레이?”

"응, 몬테레이."


9년 전, 남편이 주재원으로 파견되어 몬테레이에서 반년간 살았다. 몬테레이는 미국 국경에서 차로 3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멕시코 동북부의 산업도시이다. Walmart, Costco, HEB 같은 미국 체인 상점이 여럿 있어서 친숙했고, 언덕과 산이 있는 풍경은 한국을 연상케 했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높은 지대에 있어서 전면으로는 도시 전경이 보였고, 후면 거실 통창으로는 푸른 산을 배경으로 새파란 아파트 수영장이 내려다보였다.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풍광 좋은 리조트에 여행 와 있는 기분이었다. 바람이 자주, 세차게 불어서 폭풍의 언덕을 떠올리기도 했고, 장대비가 내리는 날에는 산에서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겨울의 산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는데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아쉬웠다.


그곳에 있던 동안은 날씨가 무더워서 밖에 잘 나가지 않고 주로 집안에서 아기를 돌보며 지냈다. 평일에는 남편 회사에서 보내준 개인 교사에게서 스페인어를 배웠고, 주일에는 한인 성당에 갔다. 당시 그곳 한인 성당은 신자가 열 가정 남짓 되는 작은 규모의 공동체였다. 파티마 성당 내 소성당을 빌려 멕시코인 신부님을 모시고 스페인어로 미사를 드렸다. 성당에 돌이 채 안된 아기는 우리 아기뿐이어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그곳 생활에 적응하는 동안 우리 집 근처 한인 마트의 사장님 부부와 성당 분들이 크게 의지가 되었다. 어느 날 아기가 열 경기를 일으켜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한인 마트 사장님이 아기를 병원에 데려다주셨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성당 자매님들이 한밤중에 문병을 와주셨다. 평생 잊지 못할 고마운 기억이다. 주변에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이웃이 있는지 세심하게 살피고 도와야겠다는 다짐을 한 계기가 됐다.


우리가 만난 멕시코 현지인들은 순박하고 친절했다. 인종차별은 체감하지 못했고, 오히려 동양인에게 호감을 느끼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미국 미시간주에서 텍사스주로 이주할 당시 텍사스 하면 떠오르는 거라곤 카우보이가 사는 곳, 조지 부시의 고향이자 공화당이 우세인 지역, 인종차별이 심할 것 같은 지역 정도였다. 위스콘신주와 미시간주의 백인 동네에서 동양인을 향한 낯선 시선을 종종 경험했기 때문에 텍사스에 가서 더 심한 인종차별을 겪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었다. 막상 텍사스에 가니 그곳 사람들은 동양인을 전혀 낯설어하지 않고 친근하게 대했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대도시라서 그런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멕시코에서 그곳 사람들을 겪어보니 텍사스 사람들이 친절하게 느껴진 이유가 멕시코에서 이주해 온 히스패닉이 다수이기 때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멕시코는 인건비가 저렴한 편이라 그곳 한인들은 대부분 집안일 도와주는 사람을 고용했다. 우리 가정도 내가 스페인어 공부하는 동안 아기를 봐주고 집안일을 도와줄 도우미를 고용했다. 


엘리사를 처음 만났던 날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날,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조카를 소개해서 면접했다. 엘리사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표정이 굳어있었고 말수가 적어서 무뚝뚝해 보였다. 아기를 돌봐 줄 사람이니 상냥하고 따뜻하기를 바랐는데 차가워 보여서 마음에 걸렸다. 그녀가 내내 경직된 표정이었던 이유가 면접에 진지한 태도로 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가볍게 웃는 사람들에 비해 얼마나 진실하고 솔직한 모습인가. 멕시코 사람들의 그런 순박한 성품이 좋았다. 굳은 표정의 얼굴을 마주해도 냉정한 사람이라 여기지 않고, 가식 없고 진실한 성향의 사람이라고 다시 생각해 보는 법을 그때 배웠다.


아기가 열 경기를 일으켰던 날, 내가 당황해서 굳어있었을 때 엘리사가 재빨리 응급조치를 해주었다. 엘리사는 나보다 어렸지만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여서 열 경기에 대처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아기 욕조에 미지근한 물을 받아 아기를 앉히고 물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열을 떨어뜨려 주었다. 엘리사는 우리 가족이 몬테레이에서 지낸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텍사스로 돌아갈 때 여러 사람이 아쉬운 마음을 표현해 주었지만, 엘리사는 누구보다도 더 이별을 슬퍼하며 뜨거운 눈물로 작별 인사를 해 주었다.


몬테레이에 있는 동안 다른 도시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거주 비자를 받기 위해 멕시코시티에 있는 관공서에 가야 했다. 멕시코시티에서 소칼로 광장, 차풀테펙 성, 과달루페 성당, 국립 인류학 박물관을 둘러보며 멕시코의 역사와 문화의 깊이에 큰 감명을 받았다. 미국의 거대한 자연에서 느꼈던 것과 또 다른 차원의 감동이었다. 인간의 손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결과물을 보며 멕시코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선진국은 아니지만 역사적, 문화적으로는 거대한 문명지임을 알 수 있었다. 멕시코 사람들에게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과 경외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족이 방문해 함께 칸쿤에 갔었다. 가슴 높이까지 물에 잠기도록 걸어 들어가도 발끝이 보이던 투명한 바닷물과 알록달록한 물고기들, 고운 모래사장이 기억에 남는다. 텍사스에 돌아온 후에도 종종 휴가를 그곳으로 갈 만큼 우리 가족이 아주 좋아하는 휴양지이다.


정말 몬테레이에 다시 가게 될까? 영국에 주재원으로 가게 되어 비자 신청까지 했는데 무산된 적이 있어서 이번에도 어찌 될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곳에 갈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설레는 건 그곳에 좋은 추억이 많아서일 거다. 이제는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젊은 부부와 아기가 살았던 그곳.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그곳. 이미 내 마음은 그곳에 가 있다. 다시, 몬테레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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