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경 Nov 07. 2023

엄마, 그리고 엄마

아이의 탄생과 나의 졸업

기온이 뚝 떨어져 체감상 눈이 올 것만 같은 날씨지만 텍사스의 온도계는 영상을 가리킨다. 갑자기 쌀쌀해지니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눈이 내리던 미시간이 생각난다.


밤새 눈이 내린 겨울 아침이면 차 위에 두껍게 쌓인 눈을 한참 동안 쓸어내려야 했다. 눈 치우는 동안 시동을 걸고 히터를 켜놓아도 차 안의 냉기가 가시지 않아 운전할 때 늘 코가 빨갰고, 장갑을 껴도 손이 시렸다. 추위는 코끝, 손, 발의 신경 말초부터 시작해 가슴속, 머릿속까지 침투하여 마음과 정신을 얼어붙게 했다. 흔히들 말하는 인생의 쓴맛보다 인생의 찬 맛이 훨씬 더 괴로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쓴맛은 알사탕 하나 녹여 먹으면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추위에 얼어 죽은 세포는 아무리 따뜻하게 감싸도 살려낼 수가 없으니 말이다. 


학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북극에서 열대로 순간이동을 한 것 같은 온도 차를 느꼈다. 연구실의 온풍기 바람에 몸이 데워질 때쯤이면 눈이 뻑뻑해졌다. 미시간의 차갑고 건조한 겨울은 정서적으로 메마른 내 대학원 생활과 닮아 있었다. 우중충한 하늘이 익숙한 삶은 차갑고, 황량하고, 우울했다.


남편이 먼저 박사 학위를 마치고 텍사스주에 있는 회사에 취직했다. 추위를 많이 타서 여름이 긴 동네로 간다니 반가웠다. 여름이 아무리 길고 덥다고 해도 겨울에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다고 하니 곧 태어날 아기가 추위를 겪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2013년 5월, 그때까지도 눈이 쌓여있던 미시간에서 따뜻한 텍사스로 이주했다. 따스한 날씨를 즐길 새도 없이 곧 무더운 여름이 시작됐고, 한증막 같은 더위에 익숙해질 무렵 아기가 태어났다. 


출산예정일 일주일 전에 친정엄마가 오셔서 함께 아기 맞을 준비를 할 계획이었지만, 아기가 예상보다 일찍 응급수술로 세상에 나오게 됐다. 36주 차 검진날, 양수가 거의 없고 아기의 성장이 정상적이지 않아 당장 뱃속에서 꺼내야 한다고 했다. 아기 신장에 문제가 있거나 다른 장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다. 입원수속을 하고 수술을 기다리는 동안 마음이 지옥 같았다. 남편은 애써 괜찮은 척하며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진통도 산고도 겪지 않고 아기를 품에 안았다.


아기는 2kg이 채 안 되는 미숙아로 태어나 신생아집중치료실로 갔다. 다행히 아픈 곳은 없었다. 하지만 눈도 잘 못 뜨고 소리 내 울 기운조차 없던 아기가 가여워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흘렸다. 간호사는 산후우울증이 아닌지 살폈으나, 호르몬 때문이 아니라 측은지심 때문이었다. 어른 주먹보다 작은 아기의 머리와 만지면 부러질 것 같은 손가락, 발가락을 보고 괜찮은 엄마는 없을 것이다. 나이 많은 엄마에게 와서 제대로 크지 못한 것 같아 미안했다. 


면회하러 가니 옆에 있는 아기는 우리 아기보다 몇 배는 크고 포동포동했다. 그만큼 커도 퇴원을 못 하는 건지, 도대체 얼마나 오래 병원에 있어야 할지 걱정되어 간호사에게 물었더니, 그 아기는 500g으로 태어나 6개월 동안 입원 중이라고 했다. 아기의 부모가 감내했을 고통을 생각하니 순간 숙연해졌다. 내 아기 소식을 들은 친구는 초음파로나 볼 수 있는 월령의 아기가 세상에 나와 작고 귀여운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지 못한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열흘 후에 아기가 퇴원해 집으로 데려왔다. 아기는 잘 먹고 잘 자며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그 사이 엄마가 비행기 일정을 당겨서 오셨다.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 고생하던 남편이 안쓰러웠는데, 마음이 놓였다. 음식솜씨 좋은 엄마 덕에 남편은 살이 올랐고, 나는 임신으로 불어난 체중을 줄일 수 없었다. 엄마는 손주가 예쁘면서도 내가 아기 키우느라 공부를 마치지 못할까 봐 걱정이 컸다. 엄마는 두 달 넘게 우리를 돌봐주고 한국으로 떠나셨다. 비행기에서 아기가 눈에 밟혀 얼마나 우셨는지 눈이 안 보일 정도였다고 공항에 마중 나왔던 이모에게 들었다.


몇 달 뒤, 남편이 멕시코에 주재원으로 가게 되어 그곳에서 아기의 첫돌을 맞이했다. 우리가 텍사스로 돌아왔을 때 엄마가 한국에서 오셨다. 내가 아기를 돌보느라 논문은 들춰보지도 않고 있다고 하니 아기를 봐주러 오신 거였다. 그즈음 남편이 엄마와 자주 통화했던 이유였다. 나는 그제야 근처 대학 도서관에 가서 묵혀놓았던 논문을 꺼내 쓰기 시작했다. 공부만 하면 됐던 학창 시절처럼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논문에 매진했다. 엄마는 석 달을 꽉 채우고 떠나셨고, 내가 미시간에 졸업 논문 발표를 하러 갈 때쯤 한 번 더 와서 아기를 봐주셨다.


나보다 가족이 더 바랐던 졸업은 아기가 세 돌이 됐을 때 이루어졌다. 엄마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은 교회 입구에 나의 박사졸업을 알리는 현수막을 걸어주셨다. 부모님께 나는 자랑스러운 훈장 같은 딸이었다.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 우여곡절 많은 박사과정을 보내며 미련 없이 다 접고 싶던 때가 있었지만, 아이를 생각하며 힘을 냈다. 졸업 논문을 마쳤을 때, 엄마에게 어려움이 있었지만 참고 이겨냈다고, 포기하지 않으면 해낼 수 있다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내게 박사 학위는 독립적인 연구자가 되어 배운 지식을 활용할 수 있음을 인증받은 자격증의 의미보다는 아이에게 떳떳한 엄마가 되기 위한 자격시험의 의미가 더 컸다. 그렇게, 학위를 마쳤다.


쌀쌀한 저녁 무렵 산책하러 나가면 지는 해와 뜨는 달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 해가 지기도 전에 달이 모습을 드러내 세상을 밝힐 준비를 하고 있다. 세상 만물이 자기 직분에 충실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내 인생의 해와 달이 되어준 엄마와 아이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몬테레이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