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경 Nov 28. 2023

코로나 시대의 추억

“빵, 빵빵"

멀리서 경쾌한 자동차 경적이 울렸다. 집 앞 풀밭에서 벌레 잡던 아이는 벌떡 일어나 눈으로 소리를 좇았다.


2020년 3월 13일에 코비드-19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된 후 3주째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는 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해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자동차 퍼레이드를 기획했다. 온 동네 아이들이 길가에 서서 선생님들을 기다렸다. 가장 먼저 경찰차가 보였다. 자동차 행렬을 호위하고 있었다. 낯익은 선생님들이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담임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자 아이는 두 손을 흔들며 차를 따라갔다. 코로나 시대의 진풍경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니 마음이 저리고 코끝이 시큰해졌다. 멀어지는 자동차 경적이 ‘힘내자, 견디자'라는 응원으로 들렸다.


“엄마, 울어? 왜 울어?”


오랜만에 선생님들을 보니까 반가워서 눈물이 났다고 둘러댔지만, 사실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우주탐험이 가능한 21세기에 역병이 창궐해 세상이 마비되다니, 도대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제발 꿈이기를 바랐다.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기 두 달 전 팬데믹 상황을 맞았다. 그 기간 동안 매주 집에서 온라인으로 과제를 받아 제출하고 학기를 마쳤다. 가을에 2학년을 시작할 때는 학교에 가서 수업받거나 집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당시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것은 여전히 위험하다고 판단해 원격수업을 택했다. 아이는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컴퓨터 앞에 앉아 수업을 들으며 두 학기를 보낸 뒤 3학년이 되어서야 학교로 돌아갔다. 1년 반 동안 아이를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선생님 노릇을 하느라 매일 가슴에 ‘참을 인’ 자를 새겨야 했다. 아이에게 말할 때 점점 언성이 높아지다 보니 득음할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힘든 일이 있어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느긋한 성격이라고 자부했는데, 그것은 한계 상황을 겪어보지 못해서 한 착각이었다.


팬데믹 초기 미국에서는 코로나 확진자, 사망자 수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처음에는 놀랐고 두려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무뎌져 하루에 수만 명이 죽었다는 뉴스를 들어도 다른 세상 이야기인 것 같았다. 체감할 수 있었던 코로나의 영향은 남편이 재택근무를 하게 됐다는 것과 아이가 집에서 수업을 듣는다는 것, 그리고 성당 미사가 온라인으로 전환됐다는 정도였다. 얼마 후,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아이가 다니던 미술학원이 폐업했고, 지인의 가족이 코로나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코로나의 위험이 바짝 다가왔다는 위기감에 불안했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는 코로나 확진자의 동선을 추적해 접촉자를 자가 격리시키는 방역체계가 갖춰져 있어서 확진자 수가 크게 늘지 않았다. 한국과 미국의 상황이 대비되어 미국이 선진국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코로나 백신이 개발되자 미국 정부가 재빨리 백신을 확보해 시민들에게 보급하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미국 국경 가까이에 사는 멕시코 지인들이 그곳에서 보급하는 백신이 미덥지 않다며 미국에서 백신을 맞으려고 당일치기 백신투어를 다녀가기도 했다. 백신 덕분에 사람들의 일상이 점차 예전으로 돌아갔다.


2021년의 마지막 날, 한국은 새해 아침이었던 시간에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전화를 했다. 당시 나는 송년 모임에 참석한 후 감기 증상이 있어서 코로나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독한 감기에 걸렸다가 거의 다 나았다고 안부 인사 겸 새해 인사를 하고 통화를 마쳤는데, 잠시 후에 코로나 양성 결과를 알리는 문자가 날아왔다. 타이밍하고는. 연이은 통화로 피곤해진 상태라 동생에게만 연락해서 그 소식을 전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차를 고려해 내가 깰 때까지 기다렸음을 짐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걱정되어 연락한 게 분명하기에 엄마를 안심시킬 말을 떠올리며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엄마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로 나를 당황하게 했다.


“딸, 코로나 걸렸다면서.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몸 약하게 낳아줘서 미안해.”


엄마는 목이 메어 말을 잇기 힘들어하는데, 나는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산모가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속삭였을 것 같은 말을 칠순이 다 된 엄마에게서 듣다니, 중년의 나이에 졸지에 신생아가 된 기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평생 몸이 약했던 적이 없었다. 운동했냐는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을 만큼 튼튼한 체격인데 어떻게 약한 몸일 수가 있을까. 내게 저렇게 말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엄마 한 사람뿐일 것이다. 내가 코로나에 걸린 게 얼마나 걱정이 됐으면 생각하다 못해 내 출생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 자신을 탓했을까. 멀쩡히 통화하면서 다 나았다고 이야기했지만, 잔기침 한 번에도 엄마는 내가 죽을병에 걸린 것처럼 속절없이 눈물을 쏟았다.


엄마가 그처럼 코로나를 두려워하게 된 것은 한 달 전에 코로나로 이모부를 떠나보냈기 때문이었다. 이모부는 인도네시아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코로나에 걸리셨다. 이모, 사촌 동생 부부와 아기까지 온 가족이 다 코로나에 걸렸다가 회복했지만, 이모부는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가셨다. 멀리서나마 영상으로 이모부를 위한 추도식을 보면서 갈 곳이 정해져 있는 죽음은 평안한 안식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2023년 5월 11일에 코비드-19 국가 비상사태가 종료됐다. 지난 3년간 코로나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아이에게 선생님들의 자동차 퍼레이드가 특별한 추억으로 남았듯이, 내가 코로나를 앓고 나서 엄마의 깊은 사랑을 새삼 깨달았듯이, 코로나 시대의 고난을 이겨낸 사람들 모두 가슴 따뜻한 추억 하나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 그리고 엄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