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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 Dec 19. 2023

롤렉스 시계와 시인

미국 회사 파티

미국에 살면 주말마다 파티를 할 줄 알았다. 파티가 흔하긴 하다. 티브이에서 봤던 화려한 파티가 아니었을 뿐. 여기서는 모든 사교모임을 파티라 칭한다. 학교 다닐 때는 한가한 주말에 대학원생들끼리 맥주나 와인 한 병씩 들고 모여 파스타와 피자에 곁들여 마시는 조촐한 파티를 했다. 학기 말에는 음식 하나씩 가져와서 나눠 먹는 팟럭 파티를 했고, 학회에 가면 학교마다 동문을 초대해서 이브닝 파티를 열었다. 아이 학교에서도 때맞춰 파티를 한다. 학기 말, 밸런타인데이, 핼러윈, 성탄절 등등 파티할 구실은 차고 넘친다. 차려입고 가야 하는 파티는 어쩌다 한 번씩 있었다. 그런 파티에 갈 때는 평소에 잘 안 입는 원피스 드레스를 입고 굽 있는 구두를 신고 화장도 정성 들여서 한다.


얼마 전에 차려입고 가야 할 파티에 초대받았다. 남편 회사는 5년마다 직원과 배우자를 근속 축하 만찬(Seniority Recognition Dinner)에 초대한다. 호텔 연회장이나 다운타운의 고급 식당에서 코스 요리를 대접한다. 남편은 10년 차여서 5년 전에 참석한 후 이번이 두 번째다.


쌀쌀한 날씨에 어울리는 체크무늬 원피스 드레스를 입고 화장하고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가 말했다.

"You look like a teacher."

선생님 같아 보인다고? 새로 산 옷이 파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파란색 원피스를 꺼내 보여줬다.

"이건 어때?"

"You will look like a dancer."

"댄서?" 고개를 끄덕이며 블랙 앤 화이트 컬러의 우아한 원피스를 보여줬다.

"Now you will look like a panda."

"판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이의 안목에 감탄하며 검은색 롱드레스를 꺼내 보여줬다.

"That will make you look like a ninja master."

선생님, 댄서, 판다, 닌자 마스터 중에 그나마 파티에서 겉돌지 않을 것 같은 댄서가 되기로 했다. 남편 회사 로고가 파란색이어서 충성심을 어필할 수 있는 최적의 선택인 것 같았다. '나 내조의 여왕 되는 거?' 센스 있음을 스스로 칭찬하며 즐거워했다. 다가올 일을 알지 못한 채.


어른만 참석할 수 있는 행사여서 아이를 친구 집에 내려주고 모임 장소로 향했다. 연회장에 들어선 순간, 넓은 공간에 펼쳐져 있는 파란색 테이블보가 눈에 확 들어왔다. 내 드레스 색과 똑같은 로열 블루였다. 둘러보니 파란색 옷을 입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사진사가 시키는 대로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스마~일!' 웃는 표정을 지으니 기분이 좋아지고 긍정 에너지가 솟아났다. 남이 해준 밥 먹는 날인데 걸어 다니는 테이블보가 된들 어떠하리. 이왕 이렇게 된 거 테이블에 딱 붙어서 눈에 띄지 않게 많이 먹기로 했다. 식전 샐러드에 화이트 와인을, 스테이크에 레드 와인을, 디저트에 다시 화이트 와인을 들이켰다.


시상식이 시작됐다. 5년 차, 10년 차, 15년 차 직원들이 상패를 들고 회사 임원과 기념사진을 찍고 자리에 앉았다. 20년 차부터는 연단에 서서 소감을 말했다. 한 남자는 아내가 20년 전 회사 파티에 애인으로 왔었다며 그때도 오늘처럼 45분쯤 늦었던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저 사람은 20년 차인데 젊어 보인다고 남편에게 말했더니 대학 졸업하고 바로 일을 시작했으면 우리 나이와 비슷할 거라고 했다. 그렇다. 아직은 젊어 보이는 꽃중년 40대이다. 유일하게 30년 차가 된 사람은 며칠 전이 결혼기념일이었다며 아내에게 각별한 애정을 표현했다. 미국에서는 이직이 흔하기에 30년 동안 한 회사에서 일했다는 게 참 대단해 보였다.


남편 회사에서는 20년 차가 되면 포상으로 직원 부부에게 롤렉스 시계를 준다. 남편이 이 회사에 10년 더 다니면 우리 팔목에 애플 워치 대신 롤렉스 시계가 채워질 것이다. 하지만 실속파인 우리는 롤렉스 대신 애플 워치 평생 이용권을 받고 싶다. 차액은 알뜰하게 현금으로 챙기고. 그런데 앞으로 10년을 채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남편과 같은 시기에 입사한 여러 동기 중 남편만 이 회사에 남았다. 다들 이직했거나 정리해고로 회사를 떠났다. 테슬라,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 이름만 들어도 주식을 사고 싶어지는 회사로 옮겼다.


올해 나는 대학 졸업한 지 20년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지난여름, 한 사이버대학 문예창작학과에 원서를 내기 위해 졸업한 대학 홈페이지에 접속해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를 신청했다. 미국 유학 나올 때 증명서 뗀 이후로 처음이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대학원에서 공부를 마쳤을 때, 이제 공부는 다 끝났다고, 다시 학생으로 학교 다닐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2023학번이 되어 수업을 듣고 중간, 기말 리포트를 쓰게 될 줄은 올해 초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8월 마지막 주에 사이버대학 합격증과 브런치 작가 승인 메일을 연달아 받았다. 감회가 남달랐다. 내 인생의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그 후로 어떤 운명적인 이끌림을 따라 그 길을 걸어왔다.


어릴 때는 하고 싶은 게 많다면 순서대로 다 하면 되지 않은가 하고 생각했다. 젊은 날의 교만이었음을 깨닫는다. 의지와 열정이란 게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건강, 시간, 비용 등의 여건이 새로운 도전을 허락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대학 졸업 후 20년이란 마일스톤은 누군가에게는 롤렉스 시계를 포상으로 받을 만한 성과를 이룬 지점이었다. 내게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열정이 찾아와 준 때다. 잃어버렸던 열정을 다시 찾게 되어 행복한 요즘이다.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스스로 보기에 만족스럽고 읽는 이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을 꾸준히 창작하고 싶다. 패기 넘치는 2023학번 새내기의 당찬 포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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