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선배이자 대학원 동기인 K 선배를 15년 만에 만났다. 그는 미국 동부에 있는 한 대학의 교수인데 내가 사는 도시에 강연차 방문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건 2009년 5월 시카고 학회에서였다. 여럿이 한인타운 중식당에서 저녁을 먹다가 전직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선배와의 마지막 통화는 몇 년 뒤 내가 박사 학위 논문을 쓰고 있던 때였다. 내가 논문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하니 선배는 하루에 15분만 논문을 쓰라고 조언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냐면서. 조금씩이라도 논문을 진전시키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을 거다. 그때도 알고 있었다. 15분 쓸 수 있는 사람은 몇 시간이고 쓸 수 있다는 것을.
선배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다고 했다. 자기도 못 지키는 걸 나더러 하라고 했었냐며 웃었다. 사람들은 원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남에게 하는 거라고 했다. 우리는 같이 크게 웃었다.
15분 글쓰기의 효과를 실감한 것은 글쓰기 소모임 활동을 하면서부터였다. 2015년 겨울, 미국 거주 한인 여성을 위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논문 쓰기 모임에 참여할 사람을 모집하는 글을 보고 연락했다. 여덟 명 중 나처럼 박사과정을 마쳐가는 분이 네 명 더 있었고, 박사 후 연구원, 연구교수, 부교수로 일하는 분들이 있었다. 교수가 되고 나서도 꾸준히 논문을 쓰려면 지속적인 동기부여와 격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각각 단기, 장기 목표를 정해서 공유했다. 매일 아침 그날 할 일을 적어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렸다. 진전 상황을 틈틈이 업데이트했고 서로 댓글로 격려하고 응원했다. 매주 온라인 미팅으로 만나 논문 쓰는 법과 논문 출판하는 법에 관한 책을 읽고 토론했다. 각자 올린 글에 관해서도 문장 표현이나 논리 전개에 문제가 없는지 도움말을 주고받았다. 겨울에 시작한 그 모임 덕분에 계획대로 다음 여름에 졸업할 수 있었다.
모임을 주도한 H 님은 열정과 추진력이 대단한 분이었다. 한국에서 교사 생활을 할 때도 새벽에 일어나 영어 공부를 했고 밤늦게까지 논문을 읽으며 공부했다. 미국에 유학 나와 박사 과정을 마치고 연구교수로 일하는 동안 남편과 떨어져 살며 아이 둘을 낳아 길렀다. 그분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자신을 지나치게 혹사하는 게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빈틈이 없었다. 24시간을 15분 단위로 쪼개 계획을 세워 생활했고,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 적도 있었다. 모임을 시작한 지 1년 남짓 되었을 때 H 님은 서울의 한 대학에 교수로 임용됐다. 여전히 연구와 후학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H 님의 소개로 알게 되어 뽀모도로 기법(Pomodoro Technique)을 활용했었다. 뽀모도로는 이탈리아어로 토마토다. 뽀모도로 기법은 1980년대 후반 프란체스코 시릴로(Francesco Cirillo)가 개발한 시간 관리 방식으로 토마토 모양의 요리 타이머를 이용한 데서 유래됐다. 실행 방법은 간단하다. 25분 집중해서 일하고 5분 쉬기를 반복하면 된다. 꼭 25분이 아니어도 괜찮다. 스스로 정한 시간 동안 집중하고 틈틈이 쉬면서 작업의 효율을 높이는 방식으로 활용하면 된다.
알다시피 인터넷은 매우 위험한 공간이다. 논문 쓸 때 자료 찾느라 검색하다가 샛길로 새곤 했다. 그럴 때 뽀모도로 타이머 웹페이지를 띄우고 그 시간만큼은 글쓰기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정해진 시간 동안 인터넷 검색이 안 되게 막는 프로그램도 사용한 적이 있다. 별것이 다 나오는구나 싶었다. 유혹에 쉽게 빠지는 인간을 구하기 위한 도구가 꾸준히 개발되고 있었다.
모임에서 공유했던 글을 찾아봤다. "초안을 엉망으로 쓸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적절한 피드백을 받아서, 무수히 훈련할 것"이라고 요약한 문장이 눈에 띄었다. 논문뿐 아니라 문학적 글쓰기에도 적용되는 원칙이다.
'작가로서의 정체성'에 관해 쓴 글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8년 전에 쓴 글이다.
“Academic” writer가 꿈은 아니었지만, 늘 장래 희망은 “작가”였다. 학창 시절에는 수필과 시를 주로 썼고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경험과 연륜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제대로 시도하지 않았다. 나와 어둠의 세계를 공유했던 석사과정 때의 선배가 얼마 전에 작가가 됐다. 선배는 언론학 석사학위를 마치고 리서치회사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뭔가 준비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니 어느 방송사의 드라마 극본공모전에서 상을 받아 작가가 됐다. 누가 교수 됐다는 소식보다 그 선배가 작가가 됐다는 소식이 내게 훨씬 더 큰 울림을 주었다. (2016년 9월 16일)
그랬다. 논문 쓰면서도 교수보다 작가가 되고 싶었다. 이 글을 읽으며 문득, 그때 소망했던 바를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며 작가의 꿈을, 작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요즘 매일 시를 한 편 쓴다. 초고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무엇이든 적고, 전에 써둔 시들도 꾸준히 퇴고하고 있다. 시 한 편을 완성하고 나면 하루가 꽉 찬 기분이다.
이제는 뽀모도로 타이머를 쓰지 않아도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다. 써야 하는 글이 아니라 쓰고 싶은 글이어서 그렇다. 강제된 타이머가 아니라 내 마음의 시간에 맞춰 글을 쓴다. 15분만 써 보자고 가볍게 시작해도 곧 30분이 되고 1시간이 된다. 몇 시간이고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K 선배는 은퇴하고 나서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대학 다닐 때 완성한 소설이 몇 편 있다고도 했다. 지금도 시간을 내면 글을 쓸 수 있다는 걸 알지만 일하기 싫을 때만 글 쓰고 싶은 생각이 든다며 멋쩍게 웃었다. 연락이 닿았으니 종종 소식 전하자고 인사하고 그는 비행기 시간에 맞춰 떠났다. 멀어지는 선배를 보며 내가 선배에게 돌려준 말을 떠올렸다.
"하루에 15분만 글을 쓰면 될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