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04_베르시아노스-렐리에고스
출발부터 좋지 않았다. 몸이 천근만근인 것이 느껴졌다. 하필 이날은 배낭을 메고 걷기로 한 날이었다. 뭔가 몸상태가 이전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이날의 기억은 거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오전에 지나가게 되는 마을에 한국 라면을 파는 바르가 있었다. 평소 한국에서도 라면을 잘 먹지 않는데, 이상하게 계속 라면 생각이 났다. 그때는 몰랐는데, 나는 힘들거나 몸이 아프면 라면 그러니까 매콤한 것이 생각난다. 오전 시간이었는데, 아침부터 라면을 주문했다.
라면을 기다리다 아침에 길에서 만나 인사를 텄던 부자 순례객과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앉아 있던 키 큰 장발의 청년은 해병대를 나왔다고 했던 것 같다. 짐이 엄청 컸고 더 멀리 가야해서 금방 먼저 일어났다. 기다리던 내 라면이 나오자 아저씨는 깜짝 놀랐다. 여기서 라면을 파는 줄 모르고 다른 것만 주문했던 것이었다. 매콤한 라면 국물 냄새는 한국인이라면 참을 수 없지. 아저씨는 아들을 설득해서 라면을 하나 주문했다.
후루룩, 라면을 먹고나니 힘이 조금 정말 1%정도 나는 것 같았다. 다시 길 위에 섰다. 힘들어서 그랬는지 이날은 찍은 사진도 별로 없다. 그리고 간신히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다음은 레온이었다. 발을 질질 끌며 알베르게에 도착했고, 나는 2층 침대에 배정 받았다. 이르게 도착한 터라 빨래를 널어놓고 내 몸도 2층 침대에 널어놓았다.
그때 에밀리아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이미 힘듦과 아픔에 마비되어서 얼마나 힘든지, 아픈지 생각하거나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냥 만사 치워두고 침대에서 그대로 잠만 자고 싶었다. 언니에게 내일은 못 걸을 것 같다, 버스 점프를 해얄 것 같다고 토로했다.
내 상황을 들은 언니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톡을 주더니, 잠시 후 전화를 했다. 전화의 요지는 내가 부르고스에서 만났던 언니의 대부모님 내외분이 지금 레온에 계시다는 것이었다. 두 분은 에어비엔비로 아파트를 대여하여 지내시는데, 내일 떠난다고 하셨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서 다음 날 체크아웃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러니 지금 레온으로 택시 타고 가서 두 분과 함께 지내며 쉬라는 것이었다. 두 분도 흔쾌히 저보고 오라고 했다며. 그런데도 나는 갈 힘이 없었다. 다시 짐을 챙기고 뭐고, 또 택시를 부르고 뭐고...... 그것을 통화로 읽었는지, 언니는 서울에서 내가 있는 알베르게로 택시를 불러주었다. 택시비 걱정하지 말고 일단 타라며. 널어둔 빨래를 가방에 쑤셔넣고, 리셉션에 주인이 자리를 비워서 간단히 메모를 남겨두고 택시를 탔다. (알베르게는 선지급으로 이미 결제가 끝났고, 나는 환불 없이 그대로 레온에 친구가 있어서 급히 가게 되었다고 메모를 남겨두었다.)
레온에 도착하니 두 분이 정말 부모님처럼 나를 챙겨 주셨다. 내 발이 퉁퉁 부은 것은 물론이고, 물집(발 뒤꿈치에 크게 나서 뒤가 다 벗겨지고 헐었다.)으로 만신창이였다. 그런데 대모님은 내 발을 맨손으로 붙잡고 자신이 가져온 약을 발라주시고 또 미리 챙겨놓은 음식과 약을 주셨다. 너무 감동해서일까 너무 힘들어서였을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바람이 빠져가는 풍선 인형처럼 그 손길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저녁까지 쉬라며 침실을 내어 주셨다. 정말 기절하듯 잠들었다. 잠결인지 꿈결인지 두 분이 저녁은 먹어야지 라며 깨우셨던 것 같은데, 세상 모르고 잠을 잤다.
한참 자다가 주섬주섬 깨어나보니 두 분은 내가 눈에 밟히셨는지 저녁거리를 사오셨다. 솜씨 좋은 대모님께서 음식을 해주시고 약과 잠으로 기운을 차린 나는 그제야 좀 웃었다. 그 밤은 정말 두 분께 너무 감사한 날이었다. 에밀리아 언니에게 정말 감사한 날이었다. 그날의 쉼이 없었더라면, 레온에서 더 쉬어야 한다는 내 상태를 잘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나와 대화하고 서로를 알아간다는 것에 미숙하기만 한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