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이방인, 한국의 국외 거주자의 모놀로그.
샤를 마르빌 (Charles Marville). 1860년대 파리의 일상적 거리 풍경들을 담아온 사진작가.
판화 그림과 같은 분위기가 나는 그의 사진들, 분위기들을 나는 참 좋아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쩌면 나 스스로를 향한 주입인 거지도 모르겠다.
그의 사진집이 몇 년 동안 책꽂이에 꽂혀 있는데도 넘겨 본적은 5번이 채 되질 않으니까.
이런 걸, 지적 허영이고 스노브 기질이라고 하는 걸까?
그럴듯하게 고급스러운, 두툼하면서도 소장가치가 있는 사진집과 화집들을 책꽂이에 꽂아만 놓고
까맣게 잊고 지내는 일이 많은 사람, 나.
한 공간 속에서 동거 동락하며 나와 함께 같은 시간을 먹어 간다는 것에 위안을 얻을뿐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지내는 책들과 사물들로 둘러싸여 오늘도 산다.
아무튼.. 정말 좋아하는 건지, 세뇌인 건지, 헷갈리고 있는 포토그래퍼 '사를 마르빌'의 사진집으로 인해
19세기 파리의 일상적 거리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건 결코 나쁘지 않다. 허영에서 시작되었든 스노브 기질을 가졌든.
지금과 다른 모습인 2세기 이전의 파리를 다시 들춰 보았다.
종종 그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파리지엥의 모습도 21세기인 지금과 다른 차림새이며 파리를 채우고 있는 사물들도 지금은 사라져 버린 옛것들이다. 풍차라던가, 거리 위를 달리는 마차와 말이라던가.
더디게 변화하는 도시 'Paris'라 해도, 시대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변화하는 만큼 파리 역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지만 파리의 건축물들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가 않다. 건축물에 붙어 있는 창문의 형태들도, 지붕들도.
두 세기를 지나왔음에도 한결같은 파리의 건축과 창문과,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 지붕들을 보며 표정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건축이 만들어 놓은 도시의 표정, 그리고 그 표정으로 굳어진 파리의 이미지.
'샤를르 마빌'의 사진집을 넘겨보다 발견한 1851년, 파리의 식물 공원 풍경에서 잠시 서성였다.
단편적 한 부분만을 담아낸 사진일 테고 겨울철이라 나뭇가지들은 앙상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식물 정원을 산책할 때마다 17세기 왕의 정원에서 시작된 만큼 멋진 공간이라는 생각과는 많이 이질적이다.
19세기의 식물 정원에는 양의 오두막이 있었다는 걸 "Caban de Moutons au Jardin des plantes"라는 타이틀에서 알 수 있을 뿐.
이미 몇 주가 지나가 버린 6월의 어느 날,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덴마크 문화원에 방문을 했었다. 안데르센의 텍스트를 슈베르트 음악과 함께 낭독하는 공연을 보기 위해서.
생각보다 참 작고 단정했던 덴마크 문화원. 홀 한가운데에선 현대 예술가의 설치 미술이 전시되어 있었더랬는데 또 한 번 그곳에 방문할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그날은 일부러 감상하지 않았었다. 그 날, 시 낭송과 음악 연주만을 관람하다 돌아와 놓고 시간을 내지 못해 6월이 끝나가는 지금까지 다시 방문하지 않고 있다.
공연을 보던 그날, 내 바로 앞에 앉아 계시던 덴마크 할머니는 은발 머리를 단정하게 올리시고 코 끝에 가는 안경을 걸치신 분이셨는데 호화로운 액세서리나 가방을 들고 그곳을 찾으셨던 분들보다 멋스러웠다.
그날 공연을 보며 기타로 연주된 슈베르트의 음악에 시를 읊는 듯한 성악가의 노래가 그리도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슈베르트의 음악이 그리도 마음 아린 음악이라는 것도 새삼 확인하면서.
요리하기가 점점 싫어지는 요즈음. 아침마다 누텔라를 바른 브리오슈를 먹는데 점심만큼은 건강식으로 잘 먹으려고 노력을 한다. 며칠 동안은 주구장창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더랬는데 샐러드는 정말 먹어도, 또 먹어도 질리지 않는 내 페이보릿 식단.
샐러드에 들어가는 재료들은 늘 엇비슷하지만 메인 재료 한 가지만 바꾸어 주어도 다른 느낌의 식사가 된다.
이날은 삶은 감자와 팥을 메인으로 한 샐러드로 드레싱은 양파와 호두를 첨가한 크림소스를 만들었었다.
삶은 감자와 양파 크림소스의 조화가 제법 어우러졌던 식단이었던.
클럽 샌드위치가 먹고 싶기도 했었지만 그전날에 샐러드를 만들기 위해서 삶아 두었던 감자가 조금 남았기에
계란을 삶아 으깬 감자와 함께 클럽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마요네즈와 케첩의 조화를 참 좋아하는데 일상적인 식사에선 먹지 않으려 한다.
그러다 감자튀김이나 햄버거를 먹을 때만 케첩과 마요네즈를 내게 허용하는데 그럴수록 건강식은 빼놓을 수가 없어서 미듐 볼안에 가득 담은 샐러드도 함께 식사를 한다.
샐러드 소스도 따로 준비하지 않고 그날은 호두 오일과 소금만을 살짝 뿌려 샐러드드레싱으로 대신했던.
혹시나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먹고 나서도 모자라면 더 먹을 생각으로 준비해 두었던
샌드위치 4분의 1조각과 소시지 페스츄리 롤.
샌드위치 작은 조각만 더 먹고 소세 지롤은 그날 늦은 오후의 간식으로 커피와 함께 했더랬지.
카루푸에서 장을 보면서 사 왔던 숙주가 냉장고 속에서만 계속 있다가 하루를 더 넘기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아 다급하게 요리한 야채밥. 비빔밥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고추장 소스로 비벼 먹는 밥보다는 간장 소스로 뿌려 먹는 야채 밥은 담백하고 가벼운 느낌이라 좋다.
밥을 지을 때 숙주와 호박 당근과 양파를 작게 잘라 전기밥통에 한꺼번에 넣어주고 그릇에 담을 때 피망과 김가루, 계란 프라이 반숙을 곁들여 간장 소스를 뿌려서 먹는 내 방식의 야채밥. 다른 사람들에겐 심심하고 싱거울 수 있는데 건강식이라 생각하기에 나는 종종해 먹는 요리이다.
샌드위치 재료들이 남아 냉장고 재료 정리를 하는 것처럼 이틀 후에도 다시 먹어야 했던 클럽 샌드위치.
그날은 샐러드와 함께가 아니라 케첩을 찍어 먹는 칩스와 함께 했는데 카페에서 사 먹는 분위기가 나기도.
콜라나 주스와 같은 음료수들을 좀처럼 마시지 않는 편이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긴 해도 카페오레와 함께
샌드위치를 먹었는데 유럽 친구들이 이러한 음식의 조화를 보면 놀란다. 커피와 칩스를 어떻게 함께 먹을 생각을 하느냐고. 나 역시 커피와 칩스를 같이 먹는 일은 하지 않는데 저 날은 어떻게 하다 보니 저렇게 놓고 사진을 찍었네?
3주 전부터 파리에 있는 미국 교회에서 주일 오전마다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모태 신앙이라고 이제는 나를 생각하지 못할 만큼 불규칙적이며 엉망으로 신앙생활을 해왔던 내가
요즘 하나님께 참 죄송하다.
하나님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내 인생과 삶 속에서 인정하고 존중하고 그분의 독생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당신의 핏값으로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도,
언제나 교회라는 집단 속에서는 적응을 하지 못하고 물에 낀 기름처럼 겉도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도.
참 마음이 아프다. 그런 내 기질이.
파리에서 5년 이상을 섬기던 한인 교회에서 나는 물 위에 떠있는 기름처럼 떠돌며 그 교회의 사람들과 가까워지지도 어우러지지도 못한다는 걸 확신하게 되던 어느 해,
그 교회와의 인연은 더 갈 이유와 목적이 없을 만큼 내게 상처로 남겨졌었고 그 이후로 3년 동안
섬기는 교회를 따로 두지 않은 채 방문자처럼 프랑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곤 했었다.
그러한 불규칙적이고 내 멋대로의 신앙생활이 나 자신을 얼마나 힘들고 불안하게 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다시 전에 섬기던 한인 교회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돌아가 봤자 또 같은 이유로 나는 그 교회에서 겉돌고 상처만 누적이 된 채 혼자 신앙생활을 해갈 거라는 걸 알았기에.
3년이 넘는 교회와의 공백 동안 내가 느끼게 된 건
매 주일마다 자신들이 섬기는 교회에 성경책을 들고 자연스럽게 예배를 드리러 가고
교회의 성도들과 자연스럽게 교제하며 지난 주간의 안부를 물으며 지낼 수 있다는 게 작은 축복이 아니라는 것.
크게 감사할 만한 큰 축복이었다.
교회로 인해 맺어진 관계가 가족들 만큼이나 삶과 인생,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존재들이라는 것도 알겠더라.
아무튼 미국인 교회에서도 나는 여전히 이방인이지만 상처도 차가움도 느껴지지 않기에
좀 더 오랜 시간 그 교회에 ㅊㄹ석해 보기로 결정을 했다.
파리 사회에서 이미 단단하게 정착을 한 미국인 교회.
이날은 중국인 남성들로 구성된 성가대가 찬양을 했었는데 동양인들의 보이스가 그리 듣기 좋다는 걸
그날 처음 느꼈었다.
예배가 끝나고 교회를 나오던 길, 교회 앞 버스 정류장에서 담은 교회 앞 풍경.
교회 바로 앞에서 집으로 향하는 버스가 있다는 것도 참 좋은데 매주 주일 오후마다 이곳에서 콘서트 연주회가 열린다.
여름 바캉스 기간 동안은 멈추겠지만 9월부터 교회에서의 콘서트는 다시 시작될 테니
아쉽더라도 9월을 기다려야지.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식물 정원 앞에서 내려 정원을 산책하며 집으로 오기.
똑같은 풍경을 걷는데도 매일 다른 느낌이 드는 장소인 식물 정원.
그리스 친구인 '미르토'와 함께 식물 정원을 산책했었는데 집 부근에 이러한 산책 장소가 있다는 걸
'미르토'는 많이 부러워했었다.
'미르토'의 집 부근에도 볼로뉴 숲이 있는데 너무나 큰 숲이라 아기자기한 산책의 느낌은 잘 갖질 못한다면서.
블로뉴 숲은 '마네;의 그림 속에서도 보게 되는 배경이라 사람들에겐 식물 정원보다 인지도가 높을 것 같은데
사람들이 마음을 끄는 건 정작 인지도와 반비례하는 듯.
햇살이 만들어 내는 사진의 느낌은 언제나 특별할 정도로 생생하다.
6월도 마무리되어가고 있는 2017년 여름날, 지금의 파리는 서늘한 기온에 비마저 내린다.
지난 한 주간, 그리도 무더운 여름날의 햇살이 이글거리더니 이 무슨 변덕인가 싶다.
한 두 해를 파리에서 살았던 것도 아니건만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프랑스의 기온 변화에 끌려 다니는 일상적 감정.
우중충 흐린 날은 흐려서 우울하고, 반짝반짝 햇살 가득 내리는 날은 눈이 부셔서 마음 아리고.
구실 갖다 대며 감정의 기복을 정당화시키는 나도 참..
한 해 두 해, 다섯 해 여덟 해, 그리고 또 한 해 두 해..
긴긴 해로 누적된 시간들을 한결같이 감정적 변덕 부리며 변함없이 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