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selle Riyoung Han Jun 19. 2017

파리 일상, 다양한 일들과 만나며 6월의 일상에도 적응

파리의 이방인, 한국의 국외 거주자의 모놀로그.


6월을 보내고 있다.
모르긴 해도 2017년이 지금껏 살아왔던 내 인생의 모양들을 뒤바꿔 놓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예감을 한다.
그러기에 지금 아픈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나의 삶과 인생이 지금보다 확장되고 멋진 세상으로 진입하고 있는 것일 뿐이고, 
나는 움직이는 그 지점에 홀로 서서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것일 뿐,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내게 주어질 삶과 인생 속의 또 다른 선물들을 기대하면서, 지금처럼 올곧게 걸어가면 된다.
 


C'est s'appelles "La Haine" 
5월이 끝나기 전에 누군가에게로부터 받은 화분.
매일 아침 창문을 열 때마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이 진분홍 꽃 화분에 '미움'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 " La Haine"
2017년, 화사하게 빛나는 계절의 5월.
그 찬란한 5월이 끝자락으로 향하던 어느 날,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해서 안 되는 누군가로부터 받았던
참으로 잔인했던 선물. "La Haine"
보기 싫은 흉물처럼만 여겨지던 저 화분을 버리지도 못하고 뽑아내기도 못한 채 창문 앞, 저 자리에 놓아두고 매일 아침 창문을 열 때마다 마음이 아파 울었더랬다.
햇빛에 바삭 말라 가도록 내버려 둘 만큼 미움과 분노를 내게 심어 주던 여린 생명체.
볼 때마다 집어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도 그러하지 못하고 방치해 둔 채, 
점점 마르고 바래가는 저 화분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쓰레기통에 내던지고 나면 마음이 지금보다 단순해질까.



작년에 심었던 해바라기의 화분들도 모두 거두어 내고, 2월에 싹이 오르던 튤립 화분들도 모두 걷어내 

버려 보기 싫게 빈 화분들을 겹겹이 쌓아 놓은 창문 앞 풍경. 
볼 때마다, 나 지금 사는 모습이 왜 이런 거지.. 싶을 만큼 마음이 아려온다. 
당분간, 꽃을 키우고 화초를 돌보는 일은 하지 않아야지.
그전에도 화분을 돌보는 일이 내 몫은 아니었으니까.



방치된 것들.
버려지고 방치된 것들에 대한 공포가 내 무의식에 자리하고 있다는 걸, 한국을 방문했던 작년, 
제주도를 여행하면서 알았었다.
사람이 떠나 방치되고 돌보아지지 않은 집 앞을 기웃 거리며 사진을 담다, 진정되기 힘들 만큼 

마음 무거워지던 그 순간의 느낌을 여전히 기억을 한다.
그때 알았었다, 스스로를 돌볼 여력이 없는 무생명 체적인 것들이 망가져 가고,
그 모습 속에서 전이되는 감정은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공포였다는 것을. 사람도 그렇다.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내게 마주하기 힘든 공포와도 같다.
그 이후부터였을까..
버려지고 방치된 것들에 눈이 간다.
예쁘고 밝은, 맑고 희망적인 것들에만 시선을 주고 내 삶 속에 담아 가고 싶건만.



5년을 살았을까? 지금의 아파트에서.
1층을 헤드쇼쎄 (hez-de-chaussee)라고 하며 2층부터 층을 매기는 프랑스식 방식이 납득하기 참 어려웠더랬는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을 만큼 적응이 되어 버렸다.
5년을 이곳에 살면서도 한국식의 1층, 헤드쇼세에 있는 내 공간을 올라서 아파트 층계를 올라가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여전히 내가 사는 공간을 벗어나 남이 사는 공간으로 채워져 있는 다른 층들을 올라가 볼 용기는 없지만
어느 날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다른 층들이 궁금하기에 카메라를 들고 이렇게 소심한 사진 한 장만 담아 놓았다.
남의 영역에 결코 침범하지 못하는 나의 짙은 고지식함, 이거 어쩌면 병인지 모르겠다. 



주체할 수 없이 우울한 감정이 채워지는 날이었다. 
집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바쁘게 움직이다가 초저녁에 있을 콘서트를 보기 위해 일찌감치 집을 나섰었다.
앵발리드 (Invalides) 부근에 있는 콘서트 장소에 도착하기 이전에 앵발리드와 알렉산더 다리의 풍경을 

담으려는 이유였지만 마음의 분쟁을 잠식시키려는 '길 걷기'가 주목적이었을 것이다.




앵발리드 (Invalides)..
나폴레옹이 사후에 묻힌 프랑스의 군사 박물관.




앵발리드를 마주 보고 있는 알렉산더 3세 다리 (Pont Alexsandre III)를 향해서 걸어가며 생각 없이 담아 놓은 풍경.
이런 사진 이제 그만 찍어야지 싶으면서도..
한동안 계획하고 있는 일들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반복되겠지.




앵발리드와 마주 보고 있는 알렉산드르 다리 너머로는 파리의 그랑 팔레와 뿌띠 팔레가 마주 보고 있다.



파리에서도 아름다운 다리에 속하는 알렉산더 3세 다리.
19세기 벨 에포크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 다리 위의 풍경으로 인해 항상 여행자들의 방문으로 가득 채워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느 날의 아침 식사. 딸기와 유기농 꿀을 넣은 요거트.
버터와 누텔라를 바른 브리오슈, 요즘 들어 더 많이 마시게 되는 에스프레소를 그날 아침에도 스리 샷으로 들이켰었다.
요즘 먹는 일들이 전과 많이 달라졌다. 부실하다, 슬프게도.
내가 나를 더 챙겨 주어야 하는데.




올 10월에 만기 되는 여권 연장을 위해 프랑스 대사관을 방문했던 날.
대사관에서 여권 연장 신청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러 가던 중, 잠시 멈짖했다.
건물이 눈에 들어올 만큼 특이하다 싶어서.



건물 출입문 위에 조각된 모형이 예사롭지 않기에 어떠한 건축인 건가 기웃거려 보았더니
Societe Nationale d'Horticulture de France라는, 프랑스의 국가 원예 단체였다.



가던 길을 다시 돌려 그르넬 (rue grenelle) 거리를 걸어가고. 
이탈리아 대사관과 한국 대사관이 자리한 그르넬 거리는 잔잔한 파리적 풍경이 느껴져, 걷다 보면 참 차분해진다.
6월 13일이 지나면 다시 여권을 찾으러 대사관을 방문할 테고 이 길을 또 걸어 내려올 테지.



정신이 없는 요즈음, 발레를 하러 갔던 날 스튜디오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발레 스커트를 잊어버리고 돌아왔었다.
너무나 좋아하던 발레복이었어서 집으로 돌아와 발레복을 두고 왔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찾으러 집 밖으로 달려 나가고 버스가 도착하기를 조급해하며 기다리고, 다시 숨을 가쁘게 달려  댄스 스튜디오에 도착했었지만 찾지 못했었다.
스튜디오의 Information 데스크도 그날 저녁에는 문이 닫힌 상태였고 발레 스커트를 잊어버리고 나서야 3일 후에,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Information 데스크에 문의하고서야 다시 찾았는데, 그때엔 이미 똑같은 발레 스커트를 구입하고 난 이후였었다. 
성격도 참 급하게 움직였지만 마음을 주었던 발레복이 내 삶 속에서 빠져나갔다는 안타까움은 의외로 컸었고 그 사소한 분실이 나를 일상에서 우울하게 따라다녔었다. 
오랜 시간 나를 모르고 있었는데 마음을 주던 것을 내 삶 속에서 떠나보내야 할 때, 그리도 힘들어한다는 걸 그때 새삼 발견했었다.
어떻게 살아왔을까.. 사소한 일에까지 그리 힘들어하는 성격으로.




아무튼, 잊어버린 줄 알았던 발레 스커트, Jupette를 사러 Bloch 매장에 나갔던 길.
방돔 광장 주변에 명품 매장들 속에 자리한 Bloch 매장에 가려면 Concorde 역에서 내려 느릿느릿 산책을 하듯 걸어서 간다.
명품 매장이 가득한 거리인 만큼 명품을 사거나 구경하러 찾아든 관광객들과 여행객들이 많은데
명품을 두르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도 가지 각색이다.
명품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니라 누가 입느냐에 따라 시장 제품보다 제 몫을 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방돔 광장 주변의 Saint-Honore 거리를 걷다 보면 느끼게 된다.




콩코드 광장이 눈에 보이니 사진 몇 장 더 담아두고.
이곳을 지날 때마다 떠오르는 역사적 이야기들은 머지않은 날 포스팅으로든 다른 지면에서든 풀어 보기로 하고
오늘은 파리의 콩코드 광장의 사진으로만.



콩코드 광장의 역사 기념물인 (Monument Historique) 룩소스 오벨리스크( L'Obelisque de Louxor)




콩코드 광장의 사진을 조망하기 위해 잠시 올라갔던 튈르리 정원에서 Jeu de Paume의 전시 안내문도 

정보용으로 담아 놓았다.



빨간 원피스, 하얀 원피스를 입은 두 연인으로 인해 콩코드 광장이 살짝 20세기 초반의 분위기가 된 것 같다. 생각을 했던.





콩코드 광장의 사진들은 그만 담고 다시 bloch으로 향해서 걷기.
인터넷 사이트에서 세일을 한다고 해서 갔건만 사이트 정보와는 많이 다르게 대부분의 제품들이 신제품이고 더 비싸다는 함정.
세 번째의 방문이었는데 Bloch 매장의 매니저는 기억을 하고 지난번에 교환해 갔던 발레 슈즈가 발에 잘 맞느냐는 물음도 건넨다.
유난하게 친절한, 몹시도 클라시스트(Classist)라는 느낌이 짙어 살짝 불편한 감이 느껴지기는 해도 
웃는 얼굴에 따라 웃으며 잘 맞는다고, 고맙다고 했더랬다.
발레를 할 때 입는 얇고 작은 랩 스커트, Jupette 3벌을 구입하는데 85유로를 지불했다.
레오타드나 발레 타이즈, 발레 슈즈는 내가 만들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지만 Jupette 만큼은 살 때마다 과하게 비싸다 싶은 생각에 
적절한 원단을 구입해서 미싱으로 재봉을 하고 내가 만들어 입어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을 한다.
그런 날이 오기는 오려나?



새벽 예배를 드리고 난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대신 카메라를 들고 샹젤리제 거리로 향했다.
이른 아침이라 여행자들은 없고 출근길을 서두르는 파리지앵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던 그날 아침의 샹젤리제 거리.




명품 매장들로 가득한 샹젤리제 거리이기는 해도 좋은 각도와 풍경으로 이곳을 사진에 담는 건 늘 어렵다. 
그러고 보니 Saint-Honore 거리 이야기를 하다 곧이어 샹젤리제 거리로 넘어오니 
내가 꼭 명품 매장들만 찾아 나서는 것 같은 느낌이 드네?
그런 거 아닌데.
 


나폴레옹의 개선문까지 걷다 그날 아침은 집으로 돌아오고 하루를 시작했었다.



아마도 오래전부터였겠지만.. 뇌 구조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면서 살고 있다.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들은 비교적 어렵지 않게 파악을 한다.(스스로에 대한 맞는 관찰이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초현실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 해도 너무나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는 내 머릿속의 구조이니 
복잡한 구조여도  내겐 그리 어렵지 않다. 
비슷한 세계를 머릿속에 흡수하는 작업도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잔인하다던가 끔찍한 장면이 아니라면 이미지나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기억하는 일들에 대해선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서류 정리와 제출할 서류들이 끊임없이 주어지는 외국 생활이 지속되면서  
스스로가 그러한 일들을 해나가야 한다는 상황에서 캄캄해진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체 가닥이 잡히질 않은 채.
한국에서도 갈 일이 없었던 파리의 관공서와 가까워지고 각종 서류들과 친해질 방법을 찾아 나가야겠다.
서류 정보를 요구하는 프랑스 활자의 편지들과도 익숙해져야만 하는 것도.
프랑스의 서류 사랑은 유별날 정도다, 정말.



콘서트를 보러 갔던 파리의 미국인 교회, L'Eglise Americaine.
시작 시간보다 1시간 이전에 도착을 해서 주변을 조금 둘러보고 교회 내에 붙여진 광고문들을 모조리 읽어 보았는데도 시간이 많이 남았었다. 
잠겨진 홀 밖에서 리허설 하는 소리를 들으며 연주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렸었는데 그때 함께 기다리던 두 사람 중 한 명이 까맣게 긴 생머리의 동양 여자였었다.
20대 중반 정도의 당찬 동양 여자를 보며 중국계 미국인으로 살다가 파리로 유학을 온 게 아닐까, 

나 혼자 상상을 했었고 머릿속으론 그녀를 슬쩍 의식하면서 교회에 꽂혀 있던 매거진을 읽던 

그때의 나와 그녀는 예배당 앞의 대리석 벤치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연주회 시간을 20여분 앞두고 드디어 예배당 안으로 입장을 했다.
끝자락의 5월, 내리 쬐이던 늦봄의 햇살, 낮의 기운은 초저녁으로 이동해가며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었고, 
생생했던 늦봄의 향기가 봄밤으로 피어내는 아련한 빛깔로 물을 들여가던 그날의 기운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
그날의 공기 속에서 영자 매거진을 넘겨 보던 나의 모습도, 내 옆에서 지루함을 꾹 눌러 참고 사부작 움직이던 그녀의 모습도.


파리에 거주하는 크리스천 미국인들의 교회.
프랑스의 개신교회들이 대부분 가난하고, 이민자들의 교회는 대부분 프랑스 교회에 세를 들어 예배를 드리는데 
미국 교회인 L'Eglise Americain은 뿌리를 내리고 잘 정착되어 파리 내에서도 제 역할을 잘 해나가고 있는 듯하다.
종종.. 한인교회와 프랑스 교회를 벗어나 미국인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내가 온전하게 발을 딛고 있지 못한 상태라 흔들림 없이 견고한 곳에 발을 딛고 싶은 바람 때문이기도 한데
이곳에서도 나는 더 짙은 이방인이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아직까지 예배에 참석했던 적은 없다.
크리스처들에게 있어 교회라는 장소는 너무나 중요하고 소중한 곳이다.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 또한 삶에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어느 한 사람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
오래전부터 교회는 늘 내게 혼돈과 아픔과 노여움을 함께 가져다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내 모든 생각들을 내려놓고, 오로지 하나님이 좋아서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사랑해서 섬길 수 있는 교회가
내겐 왜 그리 어려운 걸까.
기도해도 여전히 너무나 뾰죡하다, 내 자아가.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이중주 협연이었던 그날의 연주회 프로그램을 먼저 살펴보고.
연주회 중간에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 연주회가 끝나고 몇 장을 담았다.
내 전공은 플루트이지만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소리 많이 좋아한다.



그날 연주회에서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었다. 
그래 본 적이 있었을까?
중국계 미국인으로 파리에 음악 유학을 온 것이 아닐까 혼자 예상을 했었던 여자는
소르본 1 대학의 대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한다고 했다.
석사 2년을 끝내고 결과를 기다리는 단계이며 소르본 법률 대학원의 석사 과정은 한 번에 패스하지 못하면 
다시 1년을 공부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나누었었고, 파리에서 플루트를 전공했었다는 나의 이야기
5년 정도 바이올린을 배웠다는 그녀, Shanjun의 이야기도 오고 갔었다.
그리고 그녀는 법률 대학원을 마치고 난 7월부턴 파리에서 스타쥬를 시작할 거라는 말도 했었다.

새로운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고 의외치 않게 상대가 법률가를 준비하는 학생이라는 게 매력적이었다.
속물적인 근성일지도 모르나 그러한 상대의 매력이 낯선 대상을 대하는 설레임으로도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알았었다.
연주회가 시작되기 10여 분전, 그녀의 친구가 도착을 했고 그녀와의 대화는 잠시 멈추었다.
약학을 전공했다는 그녀의 친구는 작곡을 하며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라고 그녀로부터 소개를 받았었는데,
Phillipe이라는 그의 첫인사는 또박한 한국말의 "안녕하세요"였다.
반가움에 한국말을 아느냐 물었었는데 관심이 있어 아주 조금 몇 개의 단어를 알 뿐이라고 필립은 대답을 했었다.



Shanjun의 소개대로 그는 스스로를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며 현대 음악을 작곡한다고 했다.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을 해보고 싶다며 플루티스트와 첼리스트, 바이얼리니스트를 찾고 있었다고.
약학을 전공하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와의 작업이라면.. 어떻게 이루어질까. 
어쨌든 흥미로울 거 같다. 그도, 그와의 작업도.



연주회가 시작되고 중국인 두 남녀의 대화 소리가 조용조용하게 옆에서 들려왔었다.
그날, 중국어도 매력 있는 언어였다는 걸 처음 느꼈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엔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유난히도 아프고 쓸쓸했던 날, 예상치 못하게 알게 된 새로운 두 사람, 오래 이어갈 수 있을까?
파리에서 산지 3년 반 정도라고 했던 거 같은데 Shanjun의 프랑스어 구사력은 놀랍다.
왜 아니겠는가, 그녀가 공부하는 분야가 법률이거늘.
그날, Shanjun과의 파리에서의 삶과 자기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며 여러 갈래의 생각을 했었다.
나 또한 상대에게 매력 있는 사람이고 싶다는, 오랜 시간 동안의 바램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골방과도 같은 내면의 공간 속에 들어앉아 삶을 상상하는 일도 더는 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매거진의 이전글 파리(Paris)의 덴마크 문화원, 파리의 미국인 교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