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에서 만난 로마의 거인들.
바티칸 시국은 로마 역사 지구 안에 들어 있는 도시 국가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다.
로마 여행을 하며 우리는 기실상 이탈리아와 바티칸, 두 국가를 여행했다고 할 수 있는 것.
로마 교황을 원수로 하는 바티칸은 면적이 0,44 제곱 킬로 미터밖에 되질 않는 독립국인데 천명도 되질 않는 인구가 살아가는 이 작은 국가가 세계 속에서 맡고 있는 책임이 적지 않다.
카톨릭의 성지로써 전 세계 카톨릭 신자들의 중심 중가인 바티칸은 전 세계 종교에도 막강한 힘을 미치고 있다.
르네상스의 예술혼이 살아 있는 장소로 문화 예술의 발전에 큰 영향르 주고 있는 이 나라는 대외적으로 밝힌적 없는 국가 재정이 비밀이라는데, 재미있는 일화로 미국 정부가 바티칸 재정을 알아내기 위한 시도를 했었어도 실패 했을 만큼 깊은 비밀로 덮혀 있다고 한다.
굳이 통계적인 액수를 알지 않아도 바티칸에 방문해 보니 관광 수입이나 기념품 판매 수입, 또 다른 기부를 받으며 국가 운영을 해나가도 바티칸은 부유한 국가 대열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천연 자원이 없어도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예술품만으로도 천문학적인 가치를 성과를 얻어 낼수 있는 국가. 소장되어 있는 예술 작품들을 보기 위해서나 종교적 의미로 바티칸을 찾아 드는 이들로 운영되는 이 나라를 방문해 보니 문화 자원 보유국이라는 느낌이 있었다.
10시 30분즘에 바티칸에 도착했더니 베드로 성당을 향한 관광객들의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두시간 이내에 베드로 성당에 입장할수 없다는건 너무 확연하게 집작이 되었고 오전부터 쏟아지는 무더위 속에서 허비하게 될 시간이 아까왔지만 언제 다시 오겠다며 바티칸 방문을 미룰 수는 없었다.
다시 로마 여행을 와도 바티칸을 방문하는 일은 숙제처럼 여겨질지 모를테니 바티칸 박물관이던가, 베드로 성당이던가, 어느 한군데는 끝내 놓고 가야 할것 같아 기다리기로 했다.
가늠이 안되도록 길게 늘어져 있는 사람들의 행렬속에서 한숨 밖에 안나오던 그때 우리 둘중 어느 한사람이 그냥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는게 낮겠다는 말을 했더라면 충분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바티칸 시국을 방문하기 전에 어떻게 그 장소를 이해하고 돌아볼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먼저 세웠었다.
워낙에 많은 작품들이 집중되어 있는 장소이기레 모두다 섭취할 욕심은 애초부터 없었고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티칸을 구성하고 있는 건축 구조를 먼저 이해하고 싶었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며 제일 먼저 분할해 갔던게, 산 피에트로 광장과 산 피에트로 성당, 바티칸 박물관과 그 안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이었다.
4개의 건축물들로 분할해서 그곳이 안고 있는 큼직한 것들을 차근히 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일단 우리는 바티칸에서 산 피에트로 광장과 산 피에트로 성당만을 보고 돌아왔다. 하지만 이야기는 우리가 보지 못한 바티칸 박물관과 바티칸 궁전 부터 해나가기로.
바티칸 박물관 (Musei Vaticani)에 관한 우리의 이야기.
산 피에트로 대성당 뒤, 16세기에 지어진 성벽으로 둘러싸인 바티칸 미술관에는 고대 그리스의 조상들과 걸작들을 수집해 왔던 교황들로 인해 놀라운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우린 한꺼번에 모든걸 관람할 자시니 없었어서 그날은 산 피에트로 성당만을 둘러 보고 로마를 떠나는날 하루 전날에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서 바티칸 박물관과 시스티나 성당을 관람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우리가 바티칸 박물관을 다시 찾았던 날은 주일날 오전이었고 주일은 바티칸 박물관이 개장되지 않는다는걸 생각지 못했었다.
결국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화들도 라파엘로의 작품들도 감상하지 못한채 우리는 로마 시내를 돌아 다니게 되었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부득이한 선택이 내게 더 반가왔던 것도 같다. 로마의 모든 길은 산책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왔기에.
그렇게 바티칸 박물관 관람을 하지 못했으니 다시 로마에 가야할 명목 하나도 뚜렷하게 남겨져 버렸다.
사진은 시스티나 성당과 관련이 없이 피에트로 성당 입장을 기다리면서 찍은 산 피에트로 광장의 성인상들 일부이다.
Cappelle Sistina (시스티나 성당)
다음번ㅡ로마 방문을 위해 미리 몇줄 정리해 놓는 샤펠 시스티나는 교황 식스토 4세가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한 성당으로 바티칸 미술관 안에 자리하고 있다. 시스티나 예배당을 중심으로 라파엘로의 방, 바티칸 박물관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곳은 교황을 선출할때 추기경들이 모여 선거를 하는 장소이며 추기경이 종종 미사를 집전하는 곳이다.
1481년, 건축가 '존 데반니'에 의해 완공되었었지만 1508년 '율리오 2세'로 인해 성당은 내부 장식 보수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당시의 유명한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는 율리오 2세로 부터 천장의 프레스코화를 주문 받는다.
천재 미켈란젤로도 그 예술의 경지가 너무 넓고 깊어 늘 궁금한 인물이지만 천재의 숨겨진 재능을 예감하고 끌어내었던 율리오 2세도 내겐 참 흥미롭고 궁금한 인물이다.
당대의 가장 유명했던 조각가에게 천장의 프레스코화를 요구했었다니....!
미켈란젤로도 조각가인 자신에게 프레스코화를 요구한 율리오 2세에게 심하게 당황을 하고 실망을 해서 편지만을 남겨 놓고 피렌체로 도망을 갔었지만 다시 불려와 프레스코화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시스티나 성당을 두고 미켈란젤로와 율리오 2세에 관한 이야기들, 시스티나 성당과 관련해 빼놓을수 없는 인물들은 라파엘로를 비롯해 더 많이 있지만 오늘은 더 나아가지 않기로.
아무튼 시스티나 성당의 프레스코화를 작업했던 미켈란젤로는 조수 한명을 두지 않았었고 거의 모든 작업을 혼자서 해나갈 만큼 열정적으로 집중해 있는 상태였었다고 한다.
높이 21미터, 폭 13미터, 길이가 40미터 규모인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매달려 1508년 부터 1512년 까지 혼자 그 작업을 이어갔다고 하니 마음이 짠하다.
남겨진 그의 작품들을 감상하게 되는 후세들은 뛰어나도록 경이로운 그의 작품들을 보며 경탄하는 마음을 갖겠지만 그 거대한 작품들을 현실화 시켜 나가던 과정 속에서 얼마나 고독해 했을 테고 얼마나 고되었을까 싶어서.
천재 예술가의 놀라운 열정과 고도의 집중력으로 탄생되어진 이 장대한 규모의 프레스코 천장화는 창세기를 축으로 성경상의 9가지 주제를 그림으로 풀어낸 작품이라고 한다.
워낙에 그 규모가 방대한 작품이라 한 작품마다 품고 있는 이야기의 호흡이 꽤 길것 같다.
#바티칸 궁전
바티칸 궁전은 베드로 성당과 함께 바티칸 시국을 가장 많이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찾아본 한 자료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이라는데 안을 들여다 보지 못했기에 주관적인 평가는 덧붙이지 못하겠다
하지만 외관을 보고 개인적인 취향의 잣대로 말한다면 무엇이 더 최고라고 순위를 매길수는 없는것 아닐까 싶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의 기준서 부터 모호하고 주관적인 판단이 들어간 것이니까.
16세기 초반, 1503년 부터 1513년 까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는 바티칸 궁전 장식에 동시에 참여를 했었고 1659년에는 건축가 '베르니니'가 계단을 증축하며 수세기동안 증축과 확장을 해나간 건축물, 바티칸 궁전.
어쩌면 세기의 뛰어난 예술가들의 합작품으로 완결되어진 건축물이기에 바티칸 궁전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이라는 수식에 토를 달수 없는게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산피에트로 광장
이 광장은 베드로가 순교한 곳으로 1655녀 부터 12년에 걸쳐 '베르니니'에 의해 설계되었고 그의 인생 최고의 역작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성 베드로 광장'이라고 불리는 이 광장은 1666년에 완성이 되어, 교황 '알렉산드르 7세' 때에 착공식이 시행되었다. 예술의 장려에 힘쓴 교황으로 알려져 있는 교황 알렉산드르 7세는 개신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하며 로마로 망명한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를 환영한 로마의 교황이었는데, 절대 왕정을 펼쳐간 프랑스의 루이 14세와는 불편한 관계 였다고도 전해진다.
#카리쿨라의 오벨리스크
고대 이비트인들이 가장 숭배했던 태양신 (Ra)를 상징하는 25.5미터의 오벨리스크가 산 피에트로 광장 중앙에 서있었다. 로마의 3대 황제였던 카리쿨라가 고대 이집트에서 가져왔다는 오벨리스크 '카리큘라'.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장소와 대상이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생각을 한다.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 광장에 서있는 오벨리스크라니.
유물적 가치와 예술성이 뛰어난 것들의 조합일지라도 결코 융합되어선 안될 신앙적 사상적 상징들이 공존하고 있는 장소처럼 느껴지는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겨야 할 카톨릭의 성지 바티칸의 앞 마당, 산 피에트로 광장 중앙에 서있는게 태양신 숭배 사상의 상징물 오벨리스크라니.
경기장에서 죽은 순교자를 기념하기 위해 1586년에 산 피에트로 광장으로 옮겨졌다지만 당위성 없는 해명일뿐 산 피에트로 광장의 오벨리스크를 바라보는 나는 여전히 떨떠름 할 뿐이다.
광장 끝에서 부터 산 피에트로 성당 까지는 284개의 기둥들이 반원형으로 둥그렇게 세워져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인류를 향해 팔을 벌린 모습을 의인화 한것 이라고 한다.
기둥 위에는 140명의 성인이 대리석으로 조각되어져 있는데 이 많은 조각품들은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만든것이라고.
#카를로 마데르나 (Carlo Maderno)와 카를로 폰타나 (Carlo Fontana)의 분수
카를로 마데르나 (155601629)는 이탈리아와 스위스 건축가로 바로크 건축의 거장중 한분이다.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경계 타치노에서 태어나 삼촌의 대리석 채석장에서 일을 시작하며 조각을 배웠다는데 그의 첫 작품은 산타 수산나 성당의 파스드 였다고 한다.
고전주의 양식을 따라 활기찬 개성으로 지어진 이 파사드에 관심을 갖게된 교황 바오로 5세는 1603년에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재건할 당시 수석 건축가로 그를 임명하지만 전적인 건축가로서의 권한마저 위임했던 것은 아니었던것 같다.
미켈란젤로가 건축한 평면을 수정하고 리모델링 하는 것이 마데르나에게 요구 되었을땐 얼마나 부담이 컸을테고 매번 자신의 설계안을 교황 앞에서 펼쳐 보일때의 위축감은 얼마나 컸을까 싶다.
그에 의하여 1612년에 완성된 대성당의 정면부는 문 위에 발코니가 달리는 걸로 증축이 되었고 그 위에서 교황은 사람들에게 축복할수 있는 새로운 장소가 설치된다.
하지만 마데르나의 수정된 대성당의 정면은 돔을 시야에서 가리고 건물의 폭이 넓어 보이게 해 미켈란젤로가 의도한 균형과 비례를 깨트렸다는 비판을 받았었다고.
어떻게 새롭게 증축이 되었다 해도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의 뒤엔 비판이 따라 붙을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찬사를 받기는 힘들었을듯 하다. 마르데나에 앞서 성당의 정면부를 설계했던 이는 '미켈란젤로'였었고 그의 작품을 증축시키는 한계 범위 안에서 단혀져 있는 작업을 해야 했었을 테니.
미켈란젤로의 명성이 워낙에 뛰어났었기에 수석 건축가로 참여 하던 산 피에트로 대성당 작업은 카를로 마데르나에게 비난의 화살을 피할수 없게 했겠지만 그의 실력 만큼은 꾸준하게 인정을 받았었다는건 남겨진 자료 속에서도 확인을 할수가 있다.
카를로 마르데나는 메디치 가문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바르베리니 가문의 궁전인 Palazzo Barbernini (바르베리니 궁전) 설계를 시작하는데 2년 만에 사망하게 되고 그의 조카였던 '보로미니'가 베르니니와 함께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그로 인해 그의 설계는 베르니니와 보로미니가 건물에 덧붙인 세부적인 설계들에 의해 오랜 시간 가려져만 있었다.
앞선 세대속의 예술가는 '미켈란젤로', 후세대의 건축가는 '베르니니'라는 거대한 위인들 사잉서 자칫 가리워질수도 있었지만 '카를로 마르데나'의 건축물들은 바로크 양식을 이끌었던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산 피에트로 광장의 2개의 분수를 설명하기 위한 밑설명이 길어졌다. 이 분수들 역시 카를로 마데르나와 카를로 폰타나가 제작한 것이다.
1615년, 마르데나의 분수가 제작된 시기 보다 훨씬 뒤늦은 1677년에 분수를 제작한 카를로 폰타나에 대한 자료는 없었는데 마데르나에게 처음 채석장 일을 가르쳐준 삼촌이 '폰타나'라는 성으로 기록되어 있는걸 보아 카를로 폰타나가 혹시 카를로 마데르나의 외가쪽 친지는 아니었을까 예상을 해본다.
마데르나의 궁전 디자인은 마테이 궁전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베드로 성당 입장을 기다리고 있던 시간이 2시간이 훌쩍 넘어갈 무렵, 연인은 줄을 짓고 있던 사람들 속에서 잠깐 빠져 나가 바티칸 시내로 젤라또를 사러 가었다.
이리 말하니 꽤 되는 거리 같지만 바티칸이란 나라가 우리 나라 경복궁의 절반 크기 밖에 안되는 국가라 산 피에트로 ㅘㅇ장에서 바티칸 시내까지 달려다는 그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었다.
단지, 뜨거운 여름날 녹아 내리는 젤라또를 들고 무리 속에 묻혀 있는 나를 찾지 못할까봐 기린 목이 되고 레이더 눈이 되어 버린 내 고개가 그를 쫓아 다녔었는데 같은 여행 시간 속에서도 그는 알지 못하는 혼자만의 내 기억이 오래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