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selle Riyoung Han Apr 20. 2017

로마에서의 기록, 여섯 번째

바티칸의 경이로움, 산 피에트로 성당

여행을 좋아하지만 유적지를 돌아보는 일은 해야만 하는 과제처럼 여기는 편이었다. 

안 돌아보면 개운치 않고 돌아보자니 유적지 탐방보다 더 흥미로운 곳들을 둘러보고 싶어 마음이 조급 해지는.

 



동일한 정보를 가지고 찾아가 동일한 건축물들의 사진을 찍고 돌아올 거라는 생각에 바티칸을 방문할 때에도 그리 마음 내켜하지 않았었는데, 뙤약볕 아래에서 앉지도 못한 채 꼬박 3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바티칸으로 모여드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 속에 서있는 것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경험이 아니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다른 모양이라는 걸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것도 흔한 경험은 아니었었기에.

제각각 다른 스타일로 다르게 생긴 사람들을 보면서 어디에서 왔고,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일까 예측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더니 3시간은 생각보다 금방 줄어들고 있었고 드디어 산 피에트로 성당에 입장을 했다.


 


바르셀로나 여행을 하며 무심코 들어서려 했던 성당에서 어깨가 드러나는 옷을 입었기에 입장이 안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돌아 나온 적이 있었다. 바티칸도 그렇다.

여자는 민소매 옷을 입으면 안 되고 남자는 짧은 바지를 입으면 안 되며 슬리퍼 착용도 안된다. 

날이 무척 더운 날이었기에 많은 여자들이 어깨가 드러나는 옷이나 반바지를 입고 있다가 성당 입장 전에 커다란 스카프로 어깨와 다리를 가리고 입장을 했었는데 그런 경우만큼은 허용을 해주었다.



너무나 많은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는 곳이기에 방문하기 전부터 어떻게 관람하고 소화를 해가야 할지 막막해하다, 모두 다 보겠다는 욕심은 내지 않고 의미 있는 몇 작품에서 작은 inspiration이나 effect를 받을 수 있으면 된 것이라 생각을 했었다.



놀랍다! 경이롭다!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 최대의 성당,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산 피에트로 성당에 들어서면 거대하고 아름다운 박물관과 같은 내부에 압도되어 탄성은 저절로 터져 나온다.

상갈로, 브라만테,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들의 세계가 한 공간 속에 펼쳐져 있는 장소.

324년, 처음 성당의 건물이 세워졌으나 1506년에 재공사를 시작해 100년의 기간을 걸쳐 뛰어난 예술가들의 손을 타고 완공되었던 것만큼 산 피에트로 성당을 표현할 단어도, 문장도, 떠오르질 않는다.



현대 건축물들과 다른 스타일로 설계된, 옛 시대의 건축물과 뛰어난 예술 작품들을 보고 있자니 각 시대마다 이루어가야 할 업적들이 다르다는 걸 머릿속이 생각하고 있었다. 가슴이 먼저 느낀 것 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르네상스 시대에 건축과 예술의 경이로움은 이렇게 이루어져 버렸고 후손들에게 남겨 주고 간 로마 역사의 한 지점으로 들어와 있는 듯했던 그때의 모멘트를 잊지 못할 것 같다.

경탄과 경이로움을 뒤엎는 복잡함과 의문은 성당 내부를 관람하는 내내 따라붙고 있었다.


앞선 세대로부터 넘겨받은 것들을 잘 보존해 가는 것은 후손들의 역할임과 함께, 그에 보태어 또 다음 세대에게 남겨줄 것들을 창조해 가야 할 텐데..

21세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는 남겨줄 것이 없는 빈손처럼 느껴져 오랫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유럽에서 지금의 인생을 보내고 있는 이유는 뭘까.

내가 무엇을 해나갈 것인지도 중요하지만 소속된 그룹에서 함께 이루어 나가야 할 것들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인생의 시기에 서 있음을 자주 생각하게 된다. 

내가 소속될 그룹, 그 속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해나가야 할 일.

내게 주어진 인생임에도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베드로 성좌안에서 기도를 하다.

베드로가 청동으로 만든 성좌라는 이곳은 기도를 하려는 사람만 들어갈 수가 있었다.

성좌 출입구 쪽에서 한 남자가 "기도를 하기 위해서만 입장이 가능한 곳"이라며 물어왔었는데 생각지 못한 나는 살짝 당황하면서도 그럴 거라고 대답했었는데 그는 거짓말은 못하고 안 할 거라고 말해 입장하지 못했었다.



개신교와 가톨릭을 구분하던 환경 속에서 크리스천이라고 교육받으며 살아왔던 나는 집에서 가까운 노트르담 대성당에도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를 감상하러 방문했을 뿐, 성당에서 기도를 해본 적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 이화 여고 정동 문 방향에서 나오면 성 프란체스코 성당이 있었고 한국 나이로 18살 때에는 자율 학습에서 빠져나와 그곳에 종종 들르곤 했던 기억이 났다. 

그땐 참 어렸었는데도 내 신앙이 멈춰있는 지점이라 힘들어했던 것 같고 무언지 해법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이 캄캄한 터널 속에서 방향을 잃고 갇혀 버렸다는 생각에 묶여 있었다. 

그랬기에 어릴 적부터 크리스천이었던 내 종교를 개종할까 사춘기 시절에는 혼자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한다. 



#알렉산더 7세의 기념비 

대리석 소재로 만든 베르니니 생애의 마지막 작품인 '알렉산더 7세의 기념비'는  그의 제자들과 공동 작업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대리석 아래에는 모래시계를 들고 있는 해골이 있었는데 죽음에 순종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후레시를 터트리지 않은 채 사진을 찍어 선명하게 담기진 않았지만 실제로 보면 꽤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작품이었다.



#Baldacchino (교황 제단의 천 개)

발다끼노라는 작품 역시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높이 29m, 무게 37톤의 규모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아우르는 최고의 걸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판테옹 지붕의 청동을 사용했었다는 설도 전해지는데,  작품성은 뛰어나도 과다한 청동의 사용으로 당시의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기도 하는 발다끼노는 '교황 우르바스 8세'에 의해 제작하게 된 것인데 '베르니니'는 이 작품을 만드는데 11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 제단의 바로 밑에는 베드로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는데 베드로 성당의 지붕 꼭대기 Cupola (쿠폴라)를 오를 때 이 지하 통로를 지나서 갔었다. 

지하 공간에는 역대 교황들의 시신들이 안치되어 있어서였는지 그곳을 지날 때엔 사진을 한 장도 찍지 않았다. 



#산 피에트로 성당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들과 피에타 상.

피에트로 성당에 있는 작품들이 모두 다 하나 같이 대단한 것이라 어떠한 작품이 더 특별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르네상스 시대의 3대 조각가중 한사람이었던 미켈란젤로. 그의 3대 걸작 중 한 작품인 피에타 역시 더 좋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산 피에트로 성당 안의 작품들은 놀랍고 경이로운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피에타 상은 유럽이나 동양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유명한 작품이라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그 앞은 북적이고 있었다.

미켈란젤로가 '피에타' 작품을 만든 시기는 그의 나이는  25살이었다. 천재들의 머릿속은 나이를 뛰어넘는 혜안으로 채워져 있는 듯하다는 것, 실력은 쌓아갈수록 뛰어날 수 있다 있다지만 예술에 있어서 표현력만큼은 타고난 것과 훈련으로 된 것의 극명한 차이가 느껴진다는 것을 피에타 상을 눈앞에서 보며 확인하기도 했다.

어찌 25살의 나이에 그러한 예술적 표현력을 작품으로 드러낼 수 있었을까. 



#바티칸 지붕 꼭대기, 쿠폴라 (Cupola)에 올랐다.

산 피에트로 성당 내부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꽤 시간이 걸렸었다. 

살짝 허기가 지고 피곤해져 있는 상태에서 그가 쿠폴라를 올라갈까 물었더랬는데 성당 감상을 마무리하고도 지붕 꼭대기에 안 올라 가면 아쉬울 것 같아 올라가기로 했었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이후였지만 성당 관람을 모두 끝내고 먹게 되는 점심은 훨씬 더 맛있고 뿌듯할 테니까.




꼭대기까지 층계로 오르려면 5유로, 엘리베이터로 오르면 7유로를 지불해야 하는데 운동 삼아 걸어 오르기로 했다. 그런데, 5유로와 7유로의 차이가 어떤 건지 실감하겠더라.

2유로 더 지불했으면 그리 힘들게 올라가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나 숨이 차는 등반이었다는 걸 짐작했더라면 망설임 없이 2유로씩을 더 지불하고 엘리베이터로 올라갔을 것 같다.


올랐을 당시 꼭대기에서 볼 건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이 들어 실망도 조금 했던 것 같다. 

로마 시내를 조망할 수 있기는 했으나 그리 뛰어난 장관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었고 그렇다고 안 보았다면 아쉬웠을 테니까 보길 잘했다고 위로도 했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겐 굳이 추천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쿠폴라 까지 올라가 보길 잘했다.

다시 오른다고 해도 그때처럼 5유로 만을 지불하고 층계를 따라 걸어 올라갈 테다.

미로처럼 구불 거리던 좁은 층계는 중세 시대 건물 속에 숨어있는 비밀의 공간으로 들어가던 느낌이었고 그 묘한 기분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더웠던 로마의 여름날에 짜증 나도록 힘들었던 기억이 환각처럼 남아 있는 듯하다.


 


하지만 쿠폴라(Cupola)라는 지점, 바티칸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려면 미리 감지해야 할 사항은 있다.

537개의 계단을 밟고서 도달하게 되는 지붕 꼭대기는 3분의 1 지점에서 이미 숨이 차기 시작을 하는데, 계단의 폭은 점차적으로 심하게 좁아진다. 예민하거나 심약한 사람이 오르다 보면 호흡 장애도 느껴지겠다 싶을 만큼 가파른데 좁은 공간이라 비켜 줄 수도 없고 줄줄이 뒤따라 오르는 사람들이 있기에 중간에 쉬지도 못한다. 



쿠폴라로 올라가는 통로가 더 길어졌더라면 공황 장애가 없던 사람도 생길 것 같다 싶을 만큼 좁은 통로였는데 힘든 것 감안하고도 괜찮다면 올라가 볼 만하다.

바티칸 시국과 로마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지붕에서 내려오면서 탁 트인 스카이라운지와 같은 곳이 나오는데 그곳에서는 여기저기 건물 벽에 기대어 휴식을 가질 수 있다.



#성 베드로 광장 (Piazza San Pietro - 피아짜 산 피에트로)과 로마 시가지를 내려다 보았다.

베드로 성당 꼭대기에서 성 베드로 광장과 로마 시가지를 내려다보면 열쇠 모양처럼 성 베드로 광장이 설계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교황권의 상징인 천국의 열쇠 모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대리석으로 조각된 140명의 성인들도 한눈에 보이고 너무 작아 쉽게 눈에 뜨이지는 않지만 '카리쿨라의 오벨리스크'와 양쪽으로 설치되어 있는 '카를로 마데나'와 '카를로 폰타나'의 분수도 모두 다 한눈에 들어온다.




교황청 건물과 바티칸 휘장으로 꾸며진 교황청 앞의 정원도 보인다.




쿠폴라에서 바티칸 시가지와 산 피에트로 광장을 내려다본 우린, 그 옆의 작은 통로로 몇 계단을 빠져나왔었다. 위에서 말했던 노천 스카이라운지와 같은 작은 광장이 나왔었고 생각지 못했던 카페가 있기에 에스프레소 한잔씩을 마셨었다.

산 피에트로 성당 관람이 끝나자 그는 챙겨 온 반바지로 갈아입으러 화장실에 갔었는데 나는 문이 꼭 닫혀 있던 어느 건물 앞의 계단에 걸터앉은 채 그날의 중간 기록을 하고 있었다.



#바티칸 교황청의 근위대, 스위스 용병들은 멋진 밀랍 인형들 같았다.

르네상스 시대에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했다는 제복을 지금까지도 입고 있는 바티칸의 스위스 근위대원들.

Cupola에서 내려와 바티칸 광장으로 나왔더니 사람들이 한쪽으로 모여 있었다. 지금 기억해 보니 모여 있던 사람들은 대체로 여자였던 것 같기도.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쓱 내밀고 보았더니 스위스 근위대였다. 한꺼번에 다국적의 여성들에게 뜨거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저렇게 서있으려면 정말 힘들겠다 싶은데 시선만 살짝살짝 움직일 뿐, 밀랍 인형과 같은 저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여기저기 자신을 찍기 위해 터지는 카메라 셔터 소리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할까 싶은 궁금함이 들었는데 저렇게 굳은 표정으로 있다가 느닷없이 웃음 터지는 장면이라도 보게 되면 어떻게 할까 싶기도.

근위대가 들고 있는 것은 '미늘창' 이라는데 창과 도끼를 합쳐 놓은 중세 시대의 무기이라고 한다. 



#유럽의 선진국, 스위스 용병의 기원이 궁금해졌다.

교황의 안전과 궁정의 치안을 위해 조직된 바티칸의 근위대병들은 모두 스위스인들이다. 

21세기 유럽의 선진국인 스위스에서 바티칸으로 용병을 내보낸다는 게 이상하게 여겨졌지만 스위스 용병의 기원은 중세 시대로부터 시작이 된다는 자료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러고 보니 20세기까지 스위스는 용병의 나라였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알프스 산악 지대의 영토를 가진 스위스는 먹고살기에 열악한 자연환경 속의 국가였다.


이러한 삶의 여건으로 인해 중세 시대의 스위스 남성들은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용병으로 고용되어 전쟁터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고 한다.

용병들은 대체로 책임감이 없고 충성심이 약했기 때문에 전투 시 위험에 처할 때에는 배신을 하고 도망치는 경우가 많았다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던 스위스 용병들은 책임 의식이 신의와 충성심으로 연결이 되어 다른 국가의 용병들과 달랐었다고 한다.

그러한 스위스 용병들을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선호해 경쟁적으로 고용하려 했었다는데 스위스 근위대와 바티칸과의 연결 고리는 1506년 교황 율리오 2세가 베네치아를 침공하기 이전에 바티칸 근위대를 창설하면서부터 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에 침입했던 1527년, 189명 중 147명이 전사하는 희생을 치르고도 도망가는 용병 없이 신성 로마 제국의 침입에 맞서 교황을 끝까지 지켜낸 이들이 스위스 용병들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로마 교황청은 스위스 용병들의 희생과 충성심에 대한 답례로 현재까지 200여 명의 스위스 용병들을 고용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의 스위스는 자국의 군인이 외국으로 용병 나가는 것을 금지할 만큼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지만 바티칸만은 제외하고 있다고.


.

.

.


바티칸 방문과 산 피에트로 성당 관람은 좋았다. 

언제나 그렇듯, 돌아와서 더 좋은 느낌으로 기억되는 것처럼, 여행의 기록들과 사진들을 정리해 가고 있는 지금, 그때보다 더 좋은 느낌으로 채워지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로마에서의 기록, 다섯 번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