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어제 새벽 책을 읽다 괜히 핸드폰의 방해금지 모드를 만지작 거렸는데, 그게 켜져 있었던 것이다.
큰일 났다. 큰일 났다. 를 외치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다행히 어제 밤늦게 머리를 감은 덕에 앞머리만 물로 대충 적시면 된다. 비누 거품이 났는지 어쨌는지 모르는 채 얼굴을 비비고 방으로 들어왔다.
손에 집히는 검은색 니트와 남색 바지를 대충 끼워 입는데 젖은 발이 바지통에 걸려 잘 들어가질 않는다. 되는대로 쑤셔 넣어서인지 타닥 실밥 터지는 소리가 난다. 어딘지 볼 새가 없다. 로션과 덧신 두 짝을 가방에 던지고 구두를 신으려는 찰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
고개를 들어 문쪽을 보니 고양이 눈을 하고 서 있는 둘째 아이가 보인다. 내가 이리저리 널뛰며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 이 아이는 문 앞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 이 녀석. 어젯밤 11시까지 내일이면 엄마 없다고 눈물을 글썽였었다. 출근하라고 깨워놓고는 막상 엄마가 집을 나서니 또 그렁그렁 인 것이다.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이마에 쪽, 볼에 쪽 뽀뽀해 주고 현관을 나섰다.
출근길, 신호등의 빨간불에 맞춰 로션, 자외선 차단제, 팩트, 립까지 초고속 화장을 마쳤다. 덧신도 발에 끼워 넣었다. 휴. 이제 출근준비를 마친 것이다.
10분, 20분 고요한 차 엔진 소리만 들으며 앉아있다 보니 졸음이 몰려온다. 3일 동안 아침 여덟 시에 일어나서일까. 뇌의 일부가 아직 자고 있는 듯하다. 입을 활짝 벌려보기도, 눈을 치켜뜨기도 하며 겨우겨우 사무실에 도착했다.
책상에 앉아 인트라넷에 접속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멍한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데 상무님이 부르신다.
'나랑 얘기할 게 꽤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시간 되나?'
당연히 '네.'라고 말해야 한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요, 어두운 차에서 찍어 바른 팩트 좀 다시 봐야 해서요. 보고 할 자료 준비도 해야 해서요. 잠시만요.' 라고 절대 말할 순 없다.
그렇게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회의실로 들어갔다. 아직 잠이 덜 깬 듯한 어버버한 말투로 보고를 시작했다. 상무님은 나의 그런 정신없음을 이해해 주시는 듯했고,큰 이견 없이 일도 잘 마쳤다. 다행이다.
자리에 앉아 손거울을 보니 두 볼이 벌겋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속눈썹 서너 개가 볼 위에 예쁘게 내려앉아 있었다. 늘 정갈한 모습만 보였는데 이렇게 오점을 남기다니, 하며 잠시 좌절했다가, 상무님은 노안이시니 이런 것까지 보이진 않으셨을 거야.라고 위안 삼아 본다.
이제 승인받은 내용들을 팀원과 유관 부서에 뿌려야 한다. 의식의 흐름대로 말이 나오지 않도록 정신을 똑바로 붙들으며 한 명, 두 명, 그렇게 내용을 전달하고 조율해 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물 한컵 마시고 고개를 들어보았다.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뇌의 상태는 여전히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던 순간과 같다. 빈속에 들이킨 커피 때문인 지 속도 쓰리고 목엔 뭔가 걸린 듯하다. 그래도 뭐라도 먹어야 오후를 견딜 수 있으니 음식들을 대충 입에 쑤셔 넣어 본다.
이후 두 시, 세 시, 손목에 채워진 워치는 일어날 시간이라며 알람을 보낸다. 목은 마른데 일어나서 물 마실 겨를이 없다. 내 나이 40살이야, 이제 몸을 챙겨야 해.라고 머리에선 외치는데 다리는 어떠한 미동이 없다. 대신 키보드의 손가락이 그 어느 때 보다 빠르게 동당 거린다.
똑딱똑딱. 시간은 또다시 물 흐르듯이 흘렀고,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가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각자의 집으로 향한다. 나는 그들이 가는 모습을 곁눈질하며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한 시간 내에 끝내자. 집중하자.
눈꺼풀을 몇 번이나 부릅뜨고 있는데, 옆 팀 차장님이 살금살금 다가온다. 환한 미소와 함께 책상 위에 무언가를 올려 주시는데, 그건 바로 쿠크다스 세 개.
말씀은 안 하셨지만 '힘들죠. 이거 좀 먹고 기운 내요. 피곤해 보여요. 우리 얼른 마치고 퇴근해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마음이 녹는다. 쿠쿠다스의 부드러운 크림처럼.
차장님의 따스한 마음과 함께 야근을 마치고 차에 올라탔다. 하늘은 아침에 봤던 어스름한 푸른빛 보다 더 짙어진 흑색을 내고 있다. 신기하게도 방금 잠에서 깬 듯한 그 몽롱함은 그대로인데 14시간이 지나가 있다. 그렇게 하루가 흘러간 것이다.
급하게 출근준비를 해서일까, 자리에 앉자마자 보고를 해서일까, 최근 들어 유독 피곤하고 힘겨운 하루였다.
그래도 주어진 일을 그럭저럭 잘 마친 나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주며, 휴, 하고 깊은숨을 내쉬어 보았다.
문득, 앞 유리창으로 보이는 빨갛고 노란 불빛들을 보니 오늘 밤 집에 들어서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멍뭉이처럼 달려와 나를 반길 두 아가들, 내 몸을 껴안는 작은 두 팔, 아이들의 향긋함, 보드라움이 벌써부터 마음을 감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