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10분. 지이잉 지이잉. 요란하게도 울려댄다. 어젯밤에 맞추어둔 알람이다. 왼 손을 뻗어 더듬더듬 핸드폰을 얼른 집어 들었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작은 버튼을 한번 딸깍 하고 누르고는 베개 아래로 얼른 쑤셔넣었다. 그럼 조용할 줄 알고? 지잉. 핸드폰은 보란듯이 또 요란하게 떨어댄다. '아.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하다가 버튼 누르기만 세 번, 네 번.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차츰 또렷해지는 정신과 함께 눈을 떴다. 하얀 천장을 보고는 꿈뻑 꿈뻑. 후. 그래, 출근해야지.
새벽 출근을 한 지도 벌서 4년이 넘어간다. 꽤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이 시간에 일어 나는 습관은 도통 잡히지가 않는다. 나는 새벽형 인간이 결코 아니었던 걸까.
방 밖으로 나가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어스름한 불빛이 집안을 낮게 비추고 있다. 아이들이 낮은 숨소리와 시계 초침소리만이 어두운 공간을 채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연히 혼자 있으니)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 드라이기를 켠다. 고요함 속에 위잉 소리가 울려 퍼지면 어쩔 땐 뭔지 모를 오싹함이 들기도 한다. 특히 요즘처럼 해가 늦게 뜨는 늦가을이 시작될 무렵부터는 더욱 그렇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는 부엌으로 가 정수에 유산균 한알 꿀꺽 삼킨 뒤, 전날 싸둔 사과와 빵을 집어든다. 혹여나 바스락 거리는 옷자락 소리에 아이들이 깰까 움직임을 최소화하면서. 홀로 켜 있던 작은방의 불을 끄고 묵직한 가방과 노트북 파우치를 집어 든다. 마침내 현관문으로 다가가 조용히 문고리를 돌린다.
이때부터 나의 세계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문 앞에는 벌써 성실함의 흔적이 남겨있다. 조간신문. 신문을 집어 들고 회사로 향하는 길. 집 앞에 조성된 공원 길에는 산책 나온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지나가신다. 복실 한 강아지들과 함께. 너른 공간 앞에는 청과를 파는 할아버지가 트럭을 주차하고 계신다. 설날, 추석을 제외하고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문을 활짝 여는 분이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옆에 있는 학교 운동장에는 모래 밟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서너 명의 중년의 아주머니들. 평일이면 6시 가 훨씬 되기 전부터 러닝을 하시는 듯하다.
고요했던 내 세포들이 타닥타닥 깨어난다. 자동차 문을 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회색빛을 비집고 들어선 푸르름이 뭔지 모를 비장함까지 보여주는 듯 하다. 무얼까. 그래, 오늘도 정말 하루가 시작되었구나. 무언가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구나. 제대로, 잘 사용해 보자. 라는 다짐이 나도 모르게 올라온다.
아파트 단지를 나와 큰 길가로, 톨게이트로, 고속도로까지 나가면 그 생동감이 배로 느껴진다. 도로를 꽉 채운 빨간, 노란 불빛들. 지금 이 시간이 이곳까지 나오려면 다들 5시 즈음 일어났겠지. 이토록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다니. 새벽 출근 한다고 안쓰러웠던, 투덜댔던 내가 부끄러워져 버렸다.
지난 몇 달간 꽤나 고요한 시기를 보냈다. 미묘한 움직임조차 없는 물속에 홀로 들어가 꼬르륵 꼬르륵 간신히 견뎌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은 이토록 생기 있게 에너지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던 거다. 평소와 다름없이. 늘 그렇듯이.
내가 못 보았던 거다. 알아채지 못했던 거다. 나더러 힘을 내라고, 다시 일어서라고, 우리 좀 보라고, 같이 걷자며 외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말은 진리이다. 허나, 알면서도 매번 쉬이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아주 작은 어려움이 툭 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이내 안으로 안으로 움츠려 들고 만다. 그래도 다행인 건,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날들을 살아갈수록 또렷이 알아진다는 거다. 그럴 때일수록 밖을 봐야 한다는 것을. 매일의 움직임을, 에너지를, 온기를 알아채야 한다는 것을.
참으로 오랜만에 새벽녘의 그들과 함께 마음을 다잡는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바라보고, 더 나아가기 위해 또 한 걸음 떼어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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