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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유 Nov 24. 2023

97세 왕할머니의 위로


오늘은 왕할머니를 뵈러 가는 날이다.

우리 집안에서 가장 어른이시라 왕할머니라 부른다.

할머님은 1940년도 아닌, 1930년을 훌쩍 지나, 1926년에 태어나셨다. 97년이라는 삶을 살아오신 것이다.


처음 할머님을 뵈었을 때의 놀라움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당시에는 80대 후반이셨으니, 지금보다 훨씬 정정하시긴 했다. 같은 연배의 분들과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170의 큰 키에 꼿꼿이 펴져 있는 허리, 염색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검정 머리칼을 자랑하셨다. 끼니때마다 밥 한 그릇 뚝딱 하시는 소화력, 그리고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까지, 내가 본 할머님 중에 가장 건강해 보이는 분이셨다.


왕할머니는 시댁 가족 중 나를 가장 따스하게 맞이해 주시는 분이기도 하다. 자신이 제일 아끼시는 손자의 며느리라니, 어찌 이쁘지 아니할까. 할머님을 뵐 때면 항상 내 등을 쓰다듬으며 '예쁘다, 애쓴다.' 말씀하신다. 회사에 일 하러 갔을 때 맛있는 거라도 사 먹으라며, 주머니에 만원 짜리 몇 장씩 가족 몰래 넣어주시곤 한다.






할머님의 아흔일곱 번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식구들이 모였다. 왕할머니, 어머님, 아버님, 그리고 우리 네 가족. 남편과 여덟 살짜리 두 딸아이들.


할머님은 3개월 전에 뵈었을 때와 똑같이 허리를 쭉 펴고 계셨다. 까랑까랑한 목소리도 여전하셨다. 늘 그랬듯 두툼하고 따스한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으시며 말씀하셨다.

'아가.. 잘 지냈지? 애쓴다.'라고. 


식사하시는 내내 두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셨다. 조그마한 녀석들이 밥 한 숟가락 입에 넣을 때마다 호기심 어 눈빛으로 바라보셨다. 물딱 지게 잘 먹는다고, 말하는 것 좀 보라며 연신 해맑은 미소를 지으셨다.

어머님은 친정엄마 챙기시느라 우리 네 가족에게는 눈길을 주지 못하셨다. 평소 같았으면 회사는 이제 많이 다니지 않았냐, 남편 좀 잘 챙겨라, 아이들 공부도 봐줘야 하지 않냐 등 따가운 말씀을 많이 하셨을 테다. 덕분에 나는 아이들이 먹을 반찬들을 챙겨주기만 하는 편안한 자리를 가졌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는데 할머님이 갑자기 내 옆에 멈춰 서셨다. 내 눈을 빤히 바라시길래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시더니 두텁고 울퉁불퉁 한 손으로 내 등을 토닥토닥하시는 게 아닌가. 이어서 잔잔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가, 힘들지? 돈 번다고 애들 두고 일하러 가고.. 사는 게 다 그렇게 힘든 거다. 에그.."



갑자기 눈가가 뜨거워졌다.

내 힘듦을 어떻게 알아채신 걸까. 요즘 마음이 꽤나 버거웠는데 표정에서 읽으신 걸까. 계속되는 야근으로 몸도 지쳐있었다. 둘째 아이가 자꾸 아픈 게 신경을 많이 써주지 못하는 내 탓인 것 같아 마음이 힘들었었다. 

끝이 시끈해 지더니 눈물방울이 또르르 하고 볼을 타고 내려갔다. 부르르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한 손으로 얼른 눈물을 훔쳐냈다. 어머님, 아이들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가까이 서 계시던 할머님은 울먹이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계셨다. 따스한 손으로 내 등을 위에서 아래로 연신 쓰다듬어 주셨다. 토닥이는 할머님 손의 온기가 나의 힘든 마음을 녹여 주시는 듯했다.  



이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언제 또 뵐 지 모른다. 아이들이 차례대로 왕할머니를 안아드렸다. 할머님은 손자와 손자며느리 손을 한 번씩 꼭 잡아 주시고는 '고맙다, 잘 살아라.'라는 말씀을 몇 번이나 하셨다. 






사실 할머님을 뵌 지는 이제 1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어떤 삶을 살아오신 분인지도 잘 모른다. 시댁의 할머님이시니 만난 적도 많지 않으며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했다. 그저 9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다섯 명의 자식을 뒷바라지 해오셨고, 10여 년 전 남편을 먼저 하늘로 떠나보내신 후 혼자 살고 계신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다.


하지만 할머님을 뵐 때면 어렸을 적부터 만나왔던 분처럼 느껴진다. 나를 아무 조건 없이 안아주실 것만 같다. 마냥 기대어 어리광 부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많다. 아마도 지금은 계시지 않는 나의 외할머니가 떠올라서 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무수한 감정들을 스쳐오며 오랜 시간 살아오신 분이 하신 말씀이어서 일까. 괜찮다, 애쓴다, 잘 살아라. 의 짧은 한마디가 누구도 거스르지 못할 진실로 다가온다. 그 진실들이 사는 내내 힘이 되어 준다. 



오늘도 또 하나의 위로를 받았다. 할머님의 따스한 토닥임과 사는 건 원래 다 힘들다는 말. 

마음속에 오래 머무를 것만 같다. 아니, 소중히 넣어둘 거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꺼내볼 거다. 

사는 건 원래 힘든 거라고, 그러니 괜찮은 거라고, 너무 좌절하지 말고 어서 일어서라고 말이다.

힘듦 속에서 감사한 일, 웃을 일 찾아서 그 힘으로 살아가자고 말이.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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