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카페 특유의 잔잔한 음악과 고소한 커피 향이 몸을 감싼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거리와는 달리 바삭한 공기가 기분까지 보송하게 만들어 준다. 지난주부터, 아니 한 달 전부터 기다려 왔다. 이 분과 단 둘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을.
고민이 시작된 지는 사실 몇 년 되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 지금 이 일은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그래서 시작한 게 '읽고 쓰기'였다. 읽다 보면 지혜로움에 가까워질 거라 믿었다. 쓰다 보면 내가 진짜 잘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확신했다. 그렇게 매일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씩 책 읽는 시간을 늘려갔고 억지스레 읽어온 육아책 시기를 지나, 지금은 하루에 한 페이지 이상은 읽는 책과의 진짜 친구가 되었다. (사실, 아직은 더 찐하게 친해져야 할 것 같기는 하지만...)
브런치에 글을 1년 반 째 써오고 있고, 책 쓰기 프로젝트에 '자발적'으로 참여했으며 기획원고 투고까지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에 임하는 내내 물음표 하나가 자리잡지 못한 채 바닥을 동동 대며 떠다녔다.
'진짜 하고 싶은 건 찾았니?, 글쓰기가 정말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맞아?'
그러던 중, 그 답을 함께 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분을 만났다. 코칭 강사로 리더십 교육을 하고 있으며, 나처럼 기업에 소속되어 있다가 강의를 시작했고, 여러 권의 책을 써오고 계신 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본 여러 어른 들 중에 다량의 책을 읽어왔고, 대화 속에서 투덕투덕 쌓아온 지혜가 묻어 나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마치 본인에게 꼭 맞는, 그것도 편안하게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있는 듯 보인 점이 내 시선을 강하게 끌었다. 하루 일곱 시간의 강의를 마치고 나서도 마치 더 많은 에너지를 얻은 듯한 모습이었다. 실제, 쉬는 시간에 잠시 얘기를 나누던 중 '저는 정말 강의하는 게 좋아요. 제 행복이기도 해요.'라고 스치듯 말씀하신 적도 있었다.
이 날은 우리 회사의 리더십 강의가 오후에 예정되어 있었고, 강사님이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이다 싶었다. 핸드폰을 켜고 설레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적었다. '강사님, 제가 커피 한 잔 사드릴게요. 시간 좀 내어 주실 수 있으세요?'라고. 강사님은 망설였던 시간들이 무색하게도 너무나 흔쾌히 반겼고, 그렇게 둘 만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씩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첫마디를 꺼냈다.
"드디어 강사 님하고 이렇게 마주 앉네요."
"하하, 그러게요. "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아 그래요? 왜 무슨 일 있으세요? 팀원이 힘들게 해요?"
"하하. 아니에요. 개인적인 고민이 좀 있어서.."
"아~!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얘기해 보세요."
무엇이든지 다 들어줄 듯한 모습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떻게 이토록 좋아하는 일을 찾으셨는지 신기하다고.. 물론, 여기까지 오시는데 수많은 노력과 시간, 그 외에 여러 자원들이 투자되었을테지만 모두가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냐고. 정말 대단하시다고 말이다.
그러자 갑자기 질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팀장님은 지금 하고 계신 이 일을 얼마나 오래 하실 것 같으세요?"
"네?.. 최대 5년이요?.. 그런데, 5년 이상을 하고 임원이 된다 하더라도, 정말 재미있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그럼, 하고 싶은 일이 있으세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가치 있는 일이요?"
"네, 그런데, 그걸 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요. 사실,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아주 나쁘지는 않아요.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또 보람을 느낄 때도 있어요. 자주는 아니지만요^^
그런데, 정말 하고 싶은 일이냐고 물으면 여전히 답이 모호해요...
이 직장도 사실 생계를 위해 다니는 이유도 있는데, 무작정 그만두고 내가 좋아하면서 잘하는 일을 찾아볼 수는 없는 거고, 뭐라도 해 봐야 돈이 벌리는지 테스트라도 해볼 수 있을 텐데.. 그럴 시간이 아무리 쥐어짜도 나오지를 않아요.."
"아.. 그렇겠네요. 지금 이렇게 생활하고 계신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죠.
그럼... 팀장님에게 가치 있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음.. 글쎄요... 제가 감사하게도.. 팀장이라는 역할을 맡고 있고, 인사 부서에서 오래 일하기도 했고.. 일하는 엄마인 점을 생각해 보면, 비슷한 환경에 계시는 분들에게, 제가 시행착오로 겪었던 것을 전하면서 힘이 되어 주고 싶은, 무언가를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사실, 이것도 그냥, 막연히 드는 생각들이에요.."
"오, 좋은데요?"
"하하.."
"팀장님, 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일단, 하나씩 해보는 거예요. 저도 처음부터 강사 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원래 한 기업의 교육 담당이었는데, 강사가 갑자기 펑크를 낸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쩔 수 없이 강의를 했죠. 그런데 반응이 엄청 좋았던 거예요. 이후 대표 임원이 다른 그룹 강의도 맡아달라고 했고, 그러다 강의가 좋아지더라고요. 점점 콘텐츠가 쌓여가면서 책을 쓰게 된 거고, 우연히 유튜브를 시작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 차근차근 여기까지 온 거예요. "
"아..."
"팀장님, 정말, 하나씩 해 보세요. 뭔가 막연히 그려지는 게 있으면 그걸로 된 거예요. 지금 이 상황에서 해 볼 수 있는 거라고 해 보세요. 망설이지 말고요. 처음부터 커다란 문을 열 수는 없어요.
보세요. 지금 이 자리까지 오는데 거의 20년 걸리신 거죠? 처음부터 인사팀장 하겠다는 생각하고 시작하셨어요? 하다 보니까 잘하는 게 뭔지 알게 되고, 인정받고, 또 신나서 더 하게 되고 그런 거잖아요.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예요."
"아.. 그렇네요..."
"그리고, 하나 더 말씀드릴까요? 지금 팀장님이 갖고 있는 걸 생각해 보세요. 팀장님에게 이미 주어진 것들이 있을 거고, 그걸로 다른 무언가를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어쩌면 팀장님이 알아채지 못했을 뿐일지도 몰라요."
"정말, 그럴.. 까요?"
"그럼요~! 당연하죠!"
"하하.."
전문 코치의 질문 스킬 때문이었을까, 편안한 분위기 덕분이었을까. 그저, 좋아하는 일을 어떻게 업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대화를 하는 도중 내가 가치 있게 생각하는 일이 무엇인 지 떠올려 보게 되었고, 아직 확실 친 않지만 내가 바라는 일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어렴풋한 기대감도 생겼다.
스무 살 중반, 대학교 졸업 전 취업을 해야 한다기에 수 백 통의 자기소개서를 쓰고, 수 십 번의 면접을 준비했다. 마치 떨어지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온 정신과 체력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입사하게 된 이곳에서 기왕 하는 일 쪽 팔리지 않게 하자라는 일념 하에 일을 해왔다. 운 좋게도 좋은 상사들을 만나 배움과 성장에 즐거워하고 칭찬과 인정에 뿌듯해하며 매일매일 출근하고 퇴근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어느새 20년. 인생의 중반 즈음에 서 있어서일까. 진짜 무엇을 하고 싶은 지 고민 한 번 진지하게 하지 않은 채 달려온 삶이라 여겨졌고 그만큼 허무함이 종종 밀려왔다.
수 천 명의 직원들이 소속되어 있는 이 회사가 지속 성장하도록 돕는 것, 그리고 직원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며 일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분명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진정으로, 나는 그 가치를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었다. (지금도 그렇기에 여전히 이 회사에 매일 발을 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온전한 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저 깊은 곳 어딘가에서 허공을 향해 외쳐졌다. 그럼 이내 마음이 공허해졌었다. 20년 간 무얼 향해 달려온 거지. 하고 말이다.
허나, 오늘의 대화 이후, 내가 쌓아온 경험들이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20년 동안 매일 출근해 온 부지런함,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져온 끈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단단해진 마음, 그 하나하나가 다 내 정신에, 몸에 새겨지고 있던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