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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잘 사주는 전무님

성공한 리더의 말들

by 리유


"김 팀장, 언제 저녁 한 번해요. 내가 곧 초대 메일 보낼게요."

"네? 아, 네. 전무님!"



회사 화장실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웃으며 던지셨던 말씀이 그저 인사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일주일도 되지 않아, 전무님 메일 주소의 발신으로 메일 한 통이 왔다.


'저녁 함께 해요. 장소는 내가 봐둔 좋은 곳 예약해 둘게요. 일정 안되면 얘기하시고요.'


와. 진짜였다. 상반기 마무리 되는 시점이라 더더욱 바쁘실 텐데 일개 팀장을 위해 시간을 내어주신다는 사실이 두렵게까지 느껴졌다. 나의 차 상위 상사인 전무님과는 직접 대면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두어 달에 한 번씩 있는 정기 미팅에서 질문 몇 가지에 답을 하고 나오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갑작스러운 저녁 초대가 의아할 수밖에.

무슨 일이 있나 싶었다. 내 거처가 달라지는 것인가, 아니면 전무님이 따로 부탁하실 일이 있으신가 하다가 혼자 결론을 내려버렸다. 그저 우연히 마주쳤고 가벼운 인사치레로 저녁 먹자고 한 건데 그걸 또 물릴 수는 없기에 에잇, 하면서 저녁 초대를 하신 거라고.....






저녁을 먹기로 한 날 저녁, 퇴근 시간 무렵 메일 한통이 다시 왔다. 석식 장소가 회사에서 떨어진 곳이라 전무님 차로 이동할 테니 여섯 시까지 주차장 입구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오, 더 이상하다. 왜 먼 곳이지, 뭔가 비밀 미션을 내어 주시려고 하는 건가. 불안한 마음을 안고 정신없이 일을 쳐내고 나니 어느덧 저녁시간. 접선(?) 장소에 일찍 도착해 전무님을 기다리고 있던 중, 저 멀리서 푸근한 미소를 지으시며 걸어오는 모습을 보니 긴장감이 한결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둘이 나란히 차에 올라타 전무님은 운전석, 나는 보조석에 앉아 이동하는 길, 어찌나 좌불안석이던지. 그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인지하셨는지, 전무님은 최근 출퇴근 길에 듣고 계시다는 플레이리스트를 틀어 주셨다. 싱어게인 3 소수빈 님과 포레스텔라의 곡들. 음악들을 들으며 이번 저녁은 안 좋은 일이 있어서도, 내게 미션을 주기 위해서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덩달아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도착한 곳은 이탈리안 레스토랑. 잔잔한 재즈음악과 시원한 공기, 따스한 노란 조명이 있는 공간이었다. 이미 예약된 테이블로 안내를 받고 전무님과 마주 앉아 어색한 웃음을 짓자, 전무님은 시그니처 메뉴를 미리 주문해 놓으셨다며 저녁 맛있게 먹자고 말을 건네셨다. 어쩜 이렇게 섬세하실 수가.


이어서 부사장님은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씀을 건네셨다.


"김 팀장이랑 언제 한 번 저녁자리 갖고 싶었는데, 이제야 시간을 내네요. 아이 엄마로서 직장까지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어요. 나도 다 경험해 봤고 정말 애쓰고 있는지 잘 알고 있어요. 그래도 이렇게 일까지 잘해 내고 있는 것 보면 대견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해서 밥 한번 사주고 싶었어요. "


그제야 마지막 남아있던 긴장까지 사르르 풀리면서 한결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전무님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오일 파스타와 스테이크, 샐러드가 서빙되었고 와인 한 잔을 곁들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김 팀장, 많이 먹어요. 이렇게 밖에서 애들 없이 외식하는 것도 오랜만이죠?"

"네, 전무님. 몇 달만인 것 같은데요?(웃음)"


"하하. 바빠도, 정신없어도, 나를 챙겨주고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해요. 출근 전에 한 번씩 커피숍이든 회의실이든 커피 한 잔 들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봐요. 그리고 생각해 보는 거예요.

나는 지금 잘하고 있는가, 나에게 맞는 길인가, 무엇보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행복한가? 하고요."

"아, 네..."


"... 나도 팀장 시절이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당시 가장 필요했던 건 나를 멀리서 바라보는 건데, 그때는 몰랐지. 눈앞에 닥친 일 하느라, 사느라고 바빴으니까. 애들이 몇 학년이라고 했죠?"

"이제 4학년이요. 제 딴에는 잘 키워보려고 하는데 이제 사춘기가 오려는 지 대들기도 하고, 제 뜻대로 안돼서 좀 속상할 때도 많아요. 하하."


"그쵸, 자식들 키우다 보면, 부모가 처했던 환경과 아이들이 누리고 있는 환경이 달라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 같아요. 비교적 부족한 환경에서 커온 부모들은 지금 많은 것들이 주어진 환경에서도 끝까지 치열하게 부딪히려 하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그 실망이 아이에게 느껴지고, 결국 서로 등을 돌리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 자기주장도 더 강해질 텐데, 부모는 그저 가디언스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제일 마음이 편할 거예요.

아이의 생각을 듣고, 행동을 이해하고, 결정을 존중해 주는 것. 더 잘 크게 하려는 부모의 욕심을 드러내는 것보다 조금 멀리 떨어져서 바라봐 주고 원하는 걸 지원해 주는 게 오히려 아이를 더욱 성장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전무님은 장성한 아들이 한 명 있다. 최근 회사에 취직을 했고, 이제야 정신 차리고 사람구실 하기 시작했단다. 초등학생 때는 잘 몰랐는데, 중학생 시절에 말은 안 했지만 매일 회사에 나가 늦게 들어오는 엄마의 자리를 많이 그리워했고, 그걸 삐뚤어진 모습으로 보였단다.

바로 잡겠다며 말도 해보고, 혼내보기도 하고, 환경을 바꾸려고도 했지만 쉽지 않았단다. 어떻게 그 시기를 지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엄마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제 자리를 찾았다고, 그리고 지금은 매일 출근할 때 허그까지 하는 관계라고 말씀하시며 잠시 아련한 눈빛을 내비치셨다.


그러고는 또 다른 말을 이어가셨다.


"그리고, 아이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정이 기반이어야 해요. 내 입장에서는 회사일 우선 해주면 제일 좋지만(웃음), 김 팀장님을 위해서 가정이 우선시되어야 해요. 아이들과의 관계도 그래서 현명하게 잘 유지해야 하고, 남편과의 끈끈한 전우애(?)도 돈독하게 다녀야 하고요. 일부러 대화할 시간도 많이 갖고 앞으로 삶을 어떻게 꾸려갈 지에 대한 고민도 같이 하는 것도 좋고요. 결국은 가족이에요. 어려운 상황이 있을 때 돌아가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곳. 그게 가족인거지."



어떻게 아셨을까. 일 하느라, 애들 보느라 남편에게 다소 무관심했다. 둘이 바통을 주고받으며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마주 앉아 대화 한지는 한 달도 넘은 것 같다. 도장 깨듯이 하루하루를 보이는 대로 살아왔지, 내 가정을, 가족이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곳, 힘을 낼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었다..



그렇게 전무님은 가정을 일궈온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하시다가, 눈빛이 조금 달라지시더니 나의 커리어에 대한 주제를 건네셨다.


"일은 어때요? 아, 업무 얘기 하려는 건 아니고, 인사 일을 하는 직장인으로서 어떤지 해서요."

"아, 네.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조금 버겁고 힘들긴 하지만, 여태껏 해온 게 인사 일이기도 하고, 또 잘 맞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매년 전무님이 새로운 업무를 주시니 배우는 것도 있고, 팀원들도 좋고요. 어떻게든 이어나가 보려고요." (결코 상사 앞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음... 좋아요. 분명히 어려운 시기가 있었을 거예요. 지금이 그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걸 수도 있고요. 그런데 그 어려운 시기를 거쳐야 더 단단해져요. 당시는 힘들었고 괴롭겠지만 그만큼 배우고 성장하게 되는 거죠. 무슨 일이든 어떤 상황이든 오롯이 내 힘으로 해 낼 수 있는 발판을 다지는 거예요."

"네, 잘 버텨보겠습니다.. 하하"


"나도 참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로 힘들어서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일을 악착같이 해 내다 보니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기회는 모든 것이 준비되었을 때 오는 것 같지 않아요. 모든 것을 준비한 후에 기회를 잡으려고 하면 안 돼요. 가고자 하는 방향이 명확하다면, 지금 내게 주어진 것들을 진심을 다 해 나가면 기회가 저절로 오게 되거든요.

그런데,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건, 준비하고 있는 사람, 현재에 진심을 다 하고 있는 사람만이 기회가 왔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어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기회가 와도 모르고 지나쳐 버리거든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면, 인사하는 사람은 비즈니스 의사결정권자가 발란스를 잘 맞출 수 있도록 지원하고 조력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 그것도 꼭 기억하고."


"아, 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업무'에 대한 이야기는 1도 하지 않으셨다. 지금의 내 마음을 어찌 그리 잘 아시는지 모든 말들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그리고 온전한 '나'로서 삶을 대하는 자세를, 성공한 여성 리더의 말로 전해진 소중한 시간이었다.


사실, 최근 지쳐있었다. 직장생활에 대한 회의감이 슬쩍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회사도 가정도 다 놓아버리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앞섰었다. 혼자서 딱 한 달만 어딘가에 있다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저녁 식사 이후, 이렇게 직장생활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도, 아이들도 키우고 나도 키우면서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유로움은 없을 거다. 흔히 말하는 경제적 자유를 이룰 기회도 더더욱 없다고 봐야 할 테다.


전무님이 이런 내 상태를 알고 저녁 자리를 마련하신 걸까. 그래서 이렇게 조언들을 건네신 걸까.

뭔들 상관없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된 것은 분명하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 더운 공기 속, 앞으로 옮기는 걸음 속에 그저 한 가지 생각만 들뿐이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진심을 다해 나가 보자. 그러다 보면 내면이 지금보다 더 단단해질 거다. 나만의 이야기를 쌓아나가 보자. 그리고 기회가 오면 잡자. 지금은 그게 최선인 듯하다. 집에 가서 아이들 꼭 안아 줘야지, 그리고 남편에게도 오늘 수고했다고 말해줘야지.'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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