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평가의 달
이번 나의 상사는 심플하고 단호하다.
감정에 대한 이해나 공감력은 백분에 오만큼만 담아도 너그러운 수준이다. 그리고 그 성향은 성과평가 기간에 더더욱 빛을 발한다. (이럴 땐 그의 능력이 부럽다).
이제 곧, 그 성과평가 기간이다.
성과평가.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인사제도. 한 사람의 일 년 농사를 다른 사람에 의해 ‘평가’ 받는 자리다. 상위 고과를 받는 10%의 직원들은 고대하는 시즌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보통 이하의 등급이 예상되는 90%의 직원들은? 말하지 않아도 않아요일 테다.
평가는 이렇게 진행된다.
직원들은 1년 동안 시간과 열정을 갈아 넣은 성과들을 일목요연하게 한 장의 성과표에 정리한다. 작은 회의실에 들어가 상사와 매우 공식적이고도 긴장되는 1:1 면담을 한다. 이후 각 개인에게 부여할 4가지의 등급을 비율에 맞춰 확정하고, 상사가 팀원에게 결과를 통보하면 모든 프로세스가 끝.
팀장인 나는 평가의 대상이자 평가자 이기도 하다.
즉, 상무님과의 면담 시간에는 나에 대한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팀원들에게 내린 나의 결정을 상무님에게 보고도 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대망의 미팅 자리에 들어섰다.
그 심플, 단호로 똘똘 뭉친 상무님과.
까만 글씨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 한 장을 한 2초 정도 보셨을까.
"그래, 조직문화는 잘했고, 수치도 좋고."
딱 이 한마디였다. 그리고 나의 성과 면담은 끝.
이제 팀원들의 일 년 농사를 평가할 차례다. 전날 저녁에 등급과 사유를 1차 보고한 상태였다.
상무님은 또다시 냉기 서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팀원 중에.. 김 주임이 S. 사유는?"
머리 회로야. 어서 돌아라. 얼마 전 정리해 둔 팀원들 성과 요약 자료를 스캔해 본다. 아! 그거다.
(고과 등급은 S(우수), A(보통), B(개선 필요), C(매우 미흡) 네 가지로 나누어지며, 연봉 인상률과도 연계된다)
"네, 전사 전략에 대한 기여도가 팀 내에서 가장 높습니다. 이번에 맡은 승진자나 핵심인재 양성 과정들도 혼자 도맡아서 해도 될 정도로 역량과 책임감까지 우수합니다. 교육생들의 피드백이나 실효성도 높게 측정되었고요."
휴. 이 정도면 됐다.
"그래, 그럼 이 과장 B 고과 사유는?"
잠깐, B… 고과라니. 하위 15%에게 부여하는, 개선이 필요한 등급이라니. 나는 분명 한 단계 높은 고과로 제출했는데. 제 작년도, 작년도 중간 등급 이상을 받지 못했는데, 올해도 결국 그렇게 판단해 버리신 건가.
얕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이 과장은 전년 대비 다양한 사업장 교육을 맡았고, 피드백 등 결과도 좋았습니다. 그만큼 역량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는데요. 팀 내에서 가장 낮은 순위로 둔 이유는, 역시 기여도를 고려했습니다. 다만, 계획한 업무들을 완수하였고, 그 양도 적지 않습니다. 부문 내 다른 직원들과의 성과를 참고하여 제안드렸던 고과로 책정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이 과장의 성과에 대해 털실 풀듯 줄줄 읊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말했다가는 안 될 것 같았다. 전날 밤, 상무님께 이 과장의 성과에 대해 객관적인 수치와 함께 메일로 보고 드린 상태였기에. 그 내용을 또다시 읊어봤자 상무님의 미간 주름만 더 깊게 구길 뿐, 결과를 바꾸진 못 할 거라는 걸 직감했다.
"어. 그래."
끝.
그리고 한두 시간이 지난 후 성과평가 담당 팀장으로부터 메일이 도착했다.
'팀장님, 김 주임 S, 이 과장 B, 다른 팀원들은 모두 A입니다. 해당 등급으로 입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김 주임이 최고 고과를 받은 건 팀장으로서 기뻐할 일이다. 하지만 그 기쁨의 크기는 이 과장의 낮은 고과의 무게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수많은 생각들과 함께 어깨는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짓눌렸다. 내가 이 과장의 성과를 더 어필했어야 했나. 약간의 거짓말이라도 좀 보탰어야 했나. 그동안 상무님께 이 과장이 이룬 결과를 더 자주 보여드렸어야 했나.
적어도 올해만큼은 중간 등급이라도 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중요한 업무도 부여했고, 진행 현황이나 결과를 상무님과 다른 부서에도 슬쩍, 혹은 대놓고 공유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뭐가 부족했던 걸까, 내 능력의 한계가 여기까지 인 걸까.
온갖 후회들이 끝없이 휘몰아쳤다.
그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테지만.
(2편에 계속됩니다)
*사진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