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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 눈치 보다가 취향까지 잃은 전무님

by 리유

'점심 함께 해요.'


메일 함에 메시지 하나가 올라왔다. 인사부서 최고 임원인 이 전무님.

요즘 수고 많은 인사 부서의 팀장들과의 점심 벙개에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초대라기보다는 소집일지도.)

이 전무님은 나이 육십을 바라보는, 하지만 '오늘이 나의 가장 젊은 날이다'를 외치며, 웬만한 트렌드들을 꿰고 계시는 분이다. 뛰어난 두뇌 덕분인 지 모르겠으나 최신 유행하는 노래제목은 물론 아이돌 이름을 줄줄이 외우신다. 유튜브 먹방으로 다이어트를 하시며 20대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편하게 대화를 하시는 분이기도.




12시, 점심시간이다.

팀장들 넷, 상무님, 그리고 전무님까지 여섯이 다 같이 모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여름엔 자고로 초밥이지'를 외치며 허허 웃으시던 전무님. 갑자기 그녀의 시선이 이 팀장의 발에 꽂혔다. 연한 핑크색 샌들에 빼족 나온 발가락들, 그리고 그 위에 반짝반짝 빛을 내며 얹어져 있는 레몬색 페디큐어.


"야~ 이 팀장, 페디큐어 색깔 지인-짜 이쁘다."

"아, 네. 하하. 어젯밤에 셀프로 발랐습니다."


전무님은 부러움 반, 회상 반 섞인 눈빛으로 말씀을 이으셨다.


"나도 저런 거 바르는 거 엄청 좋아했는데. 흠. 예전 사장님 모시면서 그게 좀 사라진 것 같아."


(이전 사장님에 대해 말하자면 한마디로 전형적인 여장군 스타일이었다. 남색, 회색, 브라운 색 투피스 바지정장이 회사 교복이었으며, 언제나 같은 길이의 검은색 쇼커트 헤어스타일을 고수하셨다. 매일 이발소에 다니신다는 소문까지 돌았던. 메이크업과 악세서리는 그 분의 그림자 근처에도 근접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때 사장님이 뭐 꾸미는 걸 엄청 싫어하셨잖아. 귀걸이, 반지, 매니큐어... 그래서 그때 내가 다 빼고 다녔지.. 그 좋아하는 걸. 흐흐. 뭐, 그래도 내 보스니까, 맞춰야지 어쩌겠어. 이후로 이상하게 예전처럼 잘 안 하게 되더라고."


씁쓸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시는 전무님.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 곳곳에서 번쩍 거림이 눈에 들어왔다. 팔, 목, 귀까지 '나 명품이요'를 외치는 연 핑크색의 꽃잎 문양들. 아마도 사장님이 바뀌고 나서 조금씩 본연의 취향을 찾아가고 계시는 걸게다.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에 스쳤다.


아, 임원이 되어서도 상사에 맞추는 건 여전하구나. 일하는 방식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까지도. 하긴, 임원이면 최고 경영자와 호흡을 잘 맞춰야 할 테니, 더더욱 사소하게 신경 쓸 일이 많겠지.


가만있어보자. 그럼, 그분의 눈에는 이제 회사생활을 시작한 지 2년도 채 안된 직원들을 어떤 눈으로 보고 계실까. 자신의 취향을 마음껏 드러내는 그런 명랑한 부하 사람들을 말이다.


아무리 수평적인 문화를 선호하고, 요즘 일하는 방식을 따라가고 싶다는 전무님이어도(설사 그 생각이 진심이더라도) 30년간 상사에게 맞춰온 분이다. 결국 누군가가 자신의 눈에 조금이라도 거슬리지 않는, 혹은 매우 잘 따라와 주는 사람이 더 이뻐 보이지 않을까? 부하 직원들은 상사에게 무조건 맞춰야 한다는 관념이 100만큼은 아리더라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마음속에 굳은살처럼 배겨있지는 않을까.

마치 부모의 말과 습관, 행동을 대물림 받듯이.


그나저나, 나는 그분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나에게는 그 대물림이 어느 정도 새겨져 있을까.


이 사실을 요즘 세대 직원들은 알까. 모를까.

알까.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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