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다다닥. 타다다닥.
불이 꺼진다.
벌써 저녁 7시인가.
에너지 절감을 위해 회사 내 모든 조명이 동시에 Off 되는 시간이다.
지금 이곳은 서울 한복판 어느 건물의 사무실. 한 층에 200명이 근무하는 곳이며, 책상도 같은 수만큼 있다.낮과는 사뭇 다르게 황량해진 이 널따란 공간에 지금은 내 노트북의 파란 불빛만이 너울대고 있다.
그 불빛이 머릿속에 꿈들대던 생각을 깨운 것일까. 한 동안 잠잠했던 질문 하나가 휘적거리며 온몸을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이렇게 회사에 다니는 거 맞는 거니?'
흰색 바탕화면에는 OOO기획안, OO개선방안, OOO결과보고의 제목들을 단 아이콘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그렇게 소위 멍 때리기를 하며 앉아있던 중, '지이이잉' 핸드폰이 울린다.
나의 베스트 프렌드다.
그녀의 전화는 언제나 반갑다.
그녀와 통화를 하고 나면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랬다.
그냥 생각나서 전화했다는 그녀에게, 지금 내 상황을 투덜거렸다. 이렇게 회사에 다니는 게 맞는지, 지금 애들은 남편이 뭘 잘 챙겨 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애들 공부도 더 봐줘야 하는데 이대로 둬도 되는지 고민이다. 등의 토로였다. (아마 모든 회사 다니는 부모의 고민일 테다)
가만히 듣던 그녀가 씩씩한 목소리로 쿨하게 대답한다.
"야! 다녀. 올해 시장이 어렵대. 회사 다니면서 월급 받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거야.
열심히 다녀야 해. 부모님이 봐주실 수 있을 때 돈 벌어놔야지.
그리고 코로나 때 우리 아니었으면 생활비며 학원비며 어떻게 했겠냐. 한 명은 고정으로 벌어야 해.
(그녀의 남편도 사업을 한다)
이제, 우리가 가장이야. 야! 열심히 다녀.
상사 있을 때 열심히 해서 티 내고, 없을 때 좀 쉬고. 영리하게 너 좋아하는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일단 다니기로 했으면 주어진 것에 집중해. 우리 진짜 대단한 거야. 야. 너 잘하고 있어."
..
"어? 어.. 맞네. 알았어."
그녀의 말이 마법을 부린 것일까.
한 동안 내 머릿속을 휘집던 고민이 스멀스멀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나는 잘하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사무실 불을 켰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9시까지 할 일을 마치고 퇴근했다.
그녀는 두 아들의 엄마이자 10년 차 직장인이다.
그녀의 남편도 사업을 한다. (즉 평일에는 회사, 주말에는 독박육아라는 것이다)
그녀도 친정엄마에게 아이들 육아를 부탁하고 있다.
나와 모든 상황이 비슷하다.
그런 그녀가 저렇게 강인함과 유쾌함을 뿜뿜 하며 꿋꿋하게 회사 다니는 모습을 보면 덩달아 힘을 내게 된다.
그리고 우리 대단하다는 말을 해 줄 때면, 마치 전장에서 서로 살짝만 토닥여도 힘이 나듯, 마음이 단단해진다.
며칠 뒤면 아니 어쩌면 내일 아침이면, 또다시 '회사 다니는 게 맞나'라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 것이다. 그게 온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할 때 그녀가 또 전화를 하겠지. 그리고 또 한마디 할 것이다.
"야. 일단 다녀. 너 잘하고 있어."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의 베스트 프렌드였고, 마흔 살을 훌쩍 넘긴 지금은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가며 토닥여 주는 워킹메이트(walking mate)까지 되었다.
곁에 있어 주어 고맙다.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