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덟 살이 된 아이는 쌍둥이 언니와 싸우고 나면 본인 책상 위에 종이를 탁 하고 내려놓고 연필의 사각거림이 선명하게 들리도록 무언가를 휘갈긴다. 아마도 언니 바보, 멍청이, 제일 싫어. 뭐 이런 류의 말들일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본인만의 비밀 일기장을 갖고 싶다고 말한다.
순간, 연분홍색 바탕에 커다란 꽃 사진, 그리고 Secret 이라는 단어가 흘림체로 얹어져 있는 작은 직사각형의 노트가 떠오른다. 가운데 조그마한 은색 열쇠고리가 달린 중학생 나의 비밀 일기장.
되돌아보면, 그 일기장엔 불쾌하고 슬프고 억울했던 일들과 감정들을 그대로 쏟았던 것 같다. 대학교 입학 전, 과거의 내 생각이 부끄러워 한 장 한 장 뜯어 버리면서 그 내용까지 휘발되어 버렸으나, 억지로 떠올려 보면 대략 이런 것들이다. 노오력해도 오르지 않는 성적을 보고 과하게 했던 자책, 친한 친구와 싸우고 난 후의 갖가지의 욕들, 짝사랑 하던 선배에게 고백했으나 퇴짜 맞던날의 슬픔. 아, 되감기 해보니 그때의 날뛰던 내 감정선 들이 부끄럽기 짝이없다.
누워서 썼는지 글씨는 대부분 개발새발이었고, 곳곳에 눈물 자국도 좀 있었다.
그렇게 감정을 토로하고 나서 내 감정은 좀 나아졌는가.
그렇지 않았다. 전혀.
물론, 속은 시원하다 못해 개운함까지 느꼈다. 하지만 일기장을 덮고 은색 자물쇠를 딸깍 잠구고 나면, 봉인된 글자들이 금세 스물스물 기어 나와 내 머리 주변을 맴돌았으며, 말로 표현 못할 어떠한 서러움과 불쾌감에 휩싸이곤 했었다.
그때 만약, 하루 중 먼지만큼이라도 감사했던 일을, 좋았던 감정을 샅샅이 찾아내어 한 줄만이라도 적었으면 어땠을까. 아마도, 25년이라는 기간 동안 행복 세포들이 지금보다 더 자라있지는 않았을까.
아이가 일기장을 사달라고 한 다음 날, 회사 근처 문방구에 들러 노트 한 권을 구입했다. 그림이 거의 없는 표지에 새하얀 무지 노트.
퇴근하자 마자 아이에게 건네며 말했다.
여드름을 수어개 얼굴에 달고 매일 밤 복수체를 휘갈기던 예전의 내 모습과, 그곳에서 오는 우려를 애써 감추며.
“이건 너만의 일기장이야. 네 마음껏 표지를 꾸미고, 쓰는 것도 한 줄이든, 열 줄이든, 백 줄이든 다 괜찮아. 그런데 하나만 엄마랑 약속할 수 있을까?
일기는 그날 있었던 일과 솔직한 내 감정과 생각을 적는 게 맞기는 한데, 그날 하루 동안 기분 좋았던 일, 웃었던 일, 고마웠던 일처럼 좋은 것을 하나 이상씩 꼭 적어볼까?”
자신만의 일기장이 생겼다는 것 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아이는, 온 얼굴에 미소를 덮으며 대답한다.
“응. 나는 얘한테 예쁜 말, 좋은 말 많이 많이 해줄꺼야. 이름도 지어줄거야. 고마워, 엄마”
그렇게 아이는 노트를 집어들고 자신의 책상으로 항했다. 갖가지의 색연필, 스티커를 꺼내놓더니 알록달록 꾸미기 시작한다. 아이의 일기장은 어떤 이야기들로 채워질까.
내 아이는 나보다 더 건강하고 예쁜 마음이 가득하길 소원한다.
그렇게 되도록 엄마인 나 역시 부단히 행복해져야겠다.